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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제 Oct 29. 2024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나를 감쌌다.

♬Kenny Burrell | Listen To The Dawn

"우리는 싸울 여력이 없어." 그가 말했다. 참으로 그렇다. 나는 우리가 얼마나 늙었는지 잊고 있었다. 모든 것을 잊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세상에는 늘 괴로워할 것과 불평할 것이 존재한다.

-앨리스 먼로, '디어 라이프'



그가 집에 다 와서 계단을 올라가는데 그녀의 이름이 떠올랐다. 리아.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 낸 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이 그를 감쌌다.

-118p


"이런 광경 본 적 있어요?" 나는 없다고 했다. 단 한 번도. 나는 그녀가 또 다른 말을 해서 그 순간을 망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우리 둘 다 그러지 않았다. 우리는 그 순간 한없이 즐거웠다.

-200p


모든 것은 가두어 잠가버릴 수 있다. 그러는 데 필요한 것은 단지 결심뿐이다. 그는 여섯 살인가 일곱 살 때 그의 계모가 놀림 혹은 장난이라고 말했던 그 놀림을 가두고 잠가버렸다.

-278p



[디어 라이프]. 장편 소설인 줄 알고 읽었더니 '디어 라이프'를 포함해 몇 개의 짧은 소설을 모은 단편집이었다.

앨리스 먼로의 글은 간결한 만큼 풍요로웠고, 함축적이었으나 명료했다. 이 때문에 나는 더없는 편안함과 충만감을 느꼈다.


호흡은 결코 길지 않았다. 오히려 어떻게든 더 짧게 끊어내고, 더 느리게 한 장면을 확대하여 보여주려는 듯, 단순히 서술하는 것이 아닌 절제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 같았다.

정말 중요한 순간에는 말이 필요치 않은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에는 정말 모든 것, 개인의 삶이기도 하고 인류의 삶이기도 한 모든 게 담겨 있다.

애처롭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감사하기도 하고- 마지막에 남는 건 무상함뿐.

그건 모든 것이다.


먼로의 소설을 다 읽고, 내 마음은 깨끗이 빗질한 텅 빈 광장이 된 듯했다.

한 줄기 햇살이 조용히 내려온 광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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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ny Burrell | Listen To The Da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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