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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닷 Apr 23. 2024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

이꽃님 청소년 장편소설 / 우리학교 / 2023 / 202페이지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공기, 감정, 느낌 등. 상상하는 모든 것에 대해. 그중에서 가장 포괄적 의미를 가지면서도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는 개념은 단연코 '사랑'이 아닐까 싶다. 나는 '사랑' 하면 핑크색 하트와 몽글몽글한 감정, 소중한 사람들과의 시간 등이 떠오른다.  사랑의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여기거나 즐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하지만 이런 정의와 짧은 문장으로 사랑이라는 말에 담긴 여러 가지 의미를 다 담아내기엔 역부족이다. 사랑은 수 만 가지의 얼굴을 가진 언어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너를'은 '죽이고 싶은 아이'로 청소년 독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이꽃님 작가의 2023년 장편소설이다.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대부분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나처럼 혼란스러운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애를 써야 했을 것이다.




이야기는 인적이 드문 저수지에 가지런히 벗어서 놓아둔 하얀 운동화 한 켤레를 낚시꾼이 발견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그날 그곳에서 주인공 해주는 물에 빠졌고, 여자친구가 허우적 대는 모습을 보고도 뒤돌아 도망치던 해주의 남자친구 해록은 실종되었다. 해주는 살아 돌아왔지만 실종된 해록을 찾아 탐문을 시작한 경찰과 해주의 대화로 소설은 이야기를 풀어간다.


해주는 경찰에게 시종일관 사랑했던 둘의 지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해주는 해록을 사랑했기 때문에 해록이가 시키는 대로 했다고 말한다. 해록이가 좋아할 만한 사진만 SNS에 올렸고, 해록이가 좋아하는 치마를 입고, 해록이가 좋아하는 단발머리를 하고, 해록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화장을 하고, 해록이를 만나느라 다른 친구들과 절교했다. 부모님과의 관계까지도 나빠졌지만 해록이의 사랑을 받을 수만 있다면 감내할만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것은 해록이를 사랑했기 때문이며 나는 해록이의 것. 해록이는 나의 것이라고 표현한다. 해주는 걸핏하면 헤어지자고 협박하는 해록이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던 시간들을 담담히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 이야기 듣지 마. 그냥 내 말만 들으면 돼.

해주 너 불쌍해 죽겠어. 버려질까 봐 깽깽거리고 눈치 보는 개 같아.

아직 학생인 둘의 위태로운 연애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치밀한 구성과 압도적 몰입감에 손을 뗄 수 없음은 물론이고, 읽을수록 사랑이라는 말이 목을 죄어오는 것 같은 답답함에 숨죽여 읽게 된다. 가스라이팅이나 , 연애폭력을 떠올리게 되는 상황이지만 해주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해록이가 있어야만 완성되는 나. 해록이가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버린다는 믿음. 조건 가득한 사랑. 작가는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속에 감춰진 비틀린 감정에 대해 스토리의 대 반전으로 독자들의 머리속을 뒤흔든다.


제가 그런 거 아닌데, 제가 죽였다고 할 거예요. 해주는 그럴 수 있어요. 걔는 그럴 거예요. 아저씨, 저 좀 살려 주세요!

해록은 실종 직전 저수지에 있던 낚시꾼 아저씨에게 이렇게 애원했었던 것이다. 사실 헤어지기를 간곡히 애원하는 해록에게 집착하며 그를 괴롭힌 것은 해주였다. 해주는 경찰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거꾸로 이야기했던 것이다. 아니 거꾸로가 아니라 해주는 사랑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모든 행동이 정당하다고 단호히 믿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니까 내 말을 들어야 해. 사랑하니까 이러는 거야. 사랑하니까 시키는 대로 해. 사랑이 점점 끔찍해지는 순서이다.


작가의 말에서 이 책의 시작은 아동학대였다고 한다. 아동 학대를 당하는 수많은 아이들은 자신이 학대당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유는 부모들의 '사랑해'라는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끔찍한 학대를 당해도 '사랑해'라는 앞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모든 행동을 정당화한다고 한다.


사랑을 잘 못 배우면 사람이 이렇게 될 수도 있구나 생각하니 끔찍했다. 어쩌면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지금 내 주변에 존재하는 사랑의 모습은 어떠한가? 책장을 덮고도 한참을 '사랑'이라는 말 앞에 서성였다. 지금 있는 그대로 소중히 여겨줄 수 있는 사랑. 따뜻하고 반짝이는 감정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랑. 그런 진짜 사랑만이 사랑이라고 불리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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