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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뜰 Jan 28. 2020

'빡쳐도' 다시 한번

4. 녹취록 작성하기


  정확한 정황을 확인하기 위해 녹취록을 작성하기로 했다. 면접 전에 스마트폰을 이용해 면접 내용을 녹음해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예전부터 나는 면접을 녹음했다. 면접 때 했던 말을 언제 그랬냐며 손쉽게 뒤집는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고, 부당한 계약 내용 등이 없는지 추후에라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날도 습관처럼 녹음 기능을 켜고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감정으로 흐려졌을지 모를 주관적인 기억을 배제하고 실제로 내가 받은 정확한 질문을 알 필요가 있었다.

  내가 면접관의 의도를 곡해했거나 오해했을 수도 있었기 때문에, 면접관이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는 발언을 한 것인지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했다. 다시 그 상황을 경험한다는 것은 부담스러웠지만 고발하기로 결심한 이상 피해 갈 수 없는 과정이었다. 커피 한 잔을 내려놓고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거친 소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다시 그 면접장에 들어간 듯 기억이 떠올랐다. 잘 들리지 않는 부분을 몇 번이고 다시 돌려 들으면서 녹취록을 완성했다. 문제가 되는 부분을 추리면서 내가 느꼈던 불쾌감과 모멸감이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면접관 : 결혼은? (1분 01.53~)

나 : 네, 했어요.
면접관 : 했어요?
나 : 네.

면접관 : 자녀는 있어요? (4분 44.26~)
나 : 아니요, 없어요.
면접관 : ~~ 자녀 생각은 없고?
나 : 네, 없어요.
면접관 : 왜 자녀 생각이 없을까? 자유로운 영혼이라서? (잘 안 들림) 국가정책에 위배되는데. (웃음)

면접관 : 정말 안 낳으실 거예요? (5분 19.33~)
나 : 네, 네.
면접관 : 이유가 뭐예요?

면접관 : 지금 아이들 ~~ 강사 하는데 거기 진심으로 다가가 지나요? 엄마 같은 마음으로 다가가야 할 텐데. (5분 30.91~)



  다시 들어봐도 어이가 없었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두 남성 면접관은 공적인 자리인 면접장에서 농담조로 임신과 출산에 대한 내 결정을 재단했을 뿐만 아니라 업무와 하등 상관없는 내 모성을 논했다. 그런 질문 앞에서 나는 일자리를 구하는 한 사람의 독립된 성인이 아니라 임신과 출산, 육아를 해야만 하는 가임기 여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질문은 단지 사회생활에 대한 나의 의지를 꺾어놓는 데서 멈추지 않고 인간으로서 나의 자유의지와 존엄성까지 훼손했다. 두 면접관의 발언은 시간을 내어 면접에 임하러 간 면접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음은 물론, 우리 사회 곳곳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일을 하는 여성 전체에 대한 멸시였다.


  고발에 대한 의지가 다시 한번 확고해졌다.

  이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더 이상은 안 되는 일이라는 걸 알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나를 비롯한 여성들이 불쾌하고 말도 안 되는 이런 질문을 단 한 번이라도 덜 받게 할 것이다. 2019년의 대한민국에서 틀린 것은 내가 아니라는 아주 작은 증거라도 있어야 다시 웃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시 들어봐도 어이가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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