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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뜰 Apr 07. 2020

혼자가 아니야

10. 기다리기


  내 메일이 본사 인사팀 과장에게 전달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추가적으로 자신이 도울 일이나 신경 써줬으면 하는 일이 있다면 알려달라는 다정한 문장들도 함께.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리는 일이었다.


  처음 내가 이 일을 겪었을 때로부터 한 달하고도 이십여 일이 흘러있었다. 아직 만족스러운 결과를 받지는 못했지만 나에게 일어난 일을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일단은 그걸로 됐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번 일을 겪으며 집에 틀어박힌 날이 많았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모든 것이 흐릿한 시간이었다.


  이번 일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결된다고 해도, 그 다음은?

  다음에 또 면접장에서 그런 질문을 받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경험상 높은 확률로 임신 및 육아에 대한 질문을 받을 것이 분명했다. 한국에서 일하는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 정도 질문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암담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곳이 세상이라면 굳이 이불을 벗어나 나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다른 여성들의 삶을 찾았다. 그런 질문들이 불편한 것이 나 하나가 아니기를 바라며 주변을 둘러보니, 이미 많은 여성들이 세상과 싸우고 있었다.


  2018년 2월 한 원로 남성 시인의 문단 내 성추행을 고발한 후 시집을 출간할 출판사를 찾지 못해 직접 출판사 등록을 해 시집 <다시 오지 않는 것들>을 펴낸 최영미 시인.

  직장 내 성추행을 고발했지만, 이 여파로 오히려 직장 내에서 불이익을 겪게 되어 직장을 상대로 한 소송을 4년 넘게 버티며 끝내 승소, 퇴사 후 로스쿨에 진학한 이은의 변호사.


  그 밖에도 한국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여성들이 저마다 자신이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이렇게 살 수 없다, 는 단 하나의 마음으로.


  쉽지 않은 일이지만 앞서 간 여자들의 발자국이 내가 걸어갈 길을 어렴풋이 비췄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 사실이 다시 세상으로 나갈 용기를 주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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