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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야책상 | 책, 지워지는 나를 지키는 일

순삭 되지 않는 순간 생존자로 거듭나기

by 헤이란 Sep 23. 2022


독립출판물에 관심이 생겨 책을 몇 권 샀다. 처음에는 한 권, 그러다가 또 몇 권 더 사고, 더 사고. ....

책상에 놓인 책들의 표정이 이뻐서 그런지 쇼핑 치고는 죄책감이 덜하다. 실제로 먹는 데 쓰는 돈을 생각하면, 책장에 꽂는 돈은 우습다.



이번에는

흰 도화지에 또박또박 낙서하듯 쓴 표지를 가진 책을 골랐다.


빳빳한 무광에 검은 색 글씨.


또박또박 하고 싶은 말을 적으며 나름 줄 세워 한 자 한 자 그렸을 법한 작가의 신중함이 풍기면서도


아침 일찍 엄마표 반찬과 50H라고 쓰여있는 밥솥의 도움으로 한 끼를 해결했을 것 같은 (나의 아침 밥상을 닮은) 단순함이 눈에 밟힌 걸까.


작가의 평범하고도 비범하게 결심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틀어보겠노라며

호기심으로 고른 게 맞다.


작가에 대해서도 미리 알아본 정보 없이, 첫 페이지를 시작했다.


우울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나의 몸


아마도 직장을 다니다 퇴사를 한 모양이다.

작가는 책 속의 어느 구절처럼 "우울과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나의 몸"으로 살아가던 중, 더 이상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회사로부터의 독립을 결심한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취업난에 안 해본 것 빼곤 다 해보며 직장인 타이틀에 도전한다. 그렇게 힘들게 들어간 회사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말한다. "백수였을 때의 내가 사회에서 잊힌 사람이었다면, 회사에서는 내가 내 자신을 스스로 지우는 데에 열심히 동조하고 있었다. "



백수였을  때의 내가 사회에서 잊힌 사람이었다면, 회사에서는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지우는 데에 열심히 동조하고 있었다


맞다. 자칫하면 순삭 당하기 쉬운 세상이다.


'사회'생활은 말 그대로 사회에 나를 잘 맞춰 넣어 적합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사회'는 내가 어릴 때부터 직-간접적으로 경험해오던 사회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문화와 이해관계를 품은 안드로메다 급의 아득한 사회일 수도 있다.


회사는 그중에서도 "최대 이윤을 추구하는 공동체"라는 점에서 철저한 계약 관계 하에서 저마다 보일 듯 말듯한 피아노 줄 따위로 이어져있고, 어떤 힘이나 논리에 의해 건반 놀이를 하며 관계들은 얽히고 꼬이고 끊어지길 반복한다. 그러다 보면 '사회'를 만드는 사람들은 구성원 지위에 충실한 호칭과 직함으로 박제된다.



결혼은 나 혼자 배우자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 가족과 가정사까지  세트로 묶여서 판매되는 기획 상품에 가까웠다


'사회'생활의 논리는 회사를 넘어서 친구, 지인을 포함한 어떤 종류의 인간관계에서도 적용된다. 명함이라는 말끔한 포장지에 배우자 스펙이라는 데코레이션을 추가한다. 나는 상업적이고 직설적인 단어를 보면 피식 혼자 웃는 버릇이 있는데 '기획 상품'이라니 통쾌했다. 나 또한 어디에 내놔도 무난히 팔리는 MD's Pick 이길 바라며 얼마나 발버둥 쳤는지 떠올라 민망해 죽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나의 상품성에 대한 고민이 많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가치를 드러내고 생존을 위해 어떤 종류의 방어기제이든 놓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지워가지 않고도 존재가치를 잃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에 대해서는 계속 고민해 나가겠지만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가치의 대상, 목적이 그것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존재를 결정하고 가치를 매기는 주체는 나여야 하고, 가치를 제공하는 대상은 내가 결정해야 한다.



신용불량자가 될 것 같아서 일을 시작했는데 남들은 항 우울제가 잘 먹힌 줄 알더라


페이지를 넘길수록 작가 특유의 매콤한 위트가 재미있다. 호구스럽지 않게 작가로서 1인 독립 출판가로서 자신의 결심을 응원한다. 나도 이렇게 셀프 칭찬을 툭 던질 수 있다면 남의 칭찬이 그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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