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은 덤이에요
사랑은 화려한 광휘가 아니라 일상의 빼곡한 쌀알 위에 있다. 늘어난 속옷처럼 얼핏 보면 남루하지만 다시 보면 우아한 우리의 부피. 매일 산책하는 강변의 기나긴 길과 일렁대는 강물과 버드나무 줄기들. 이 글을 쓰는 동안 나는 그런 아름다운 걸 "무채"라고 퉁쳐서 불러보았다. 배앓이를 하듯 자꾸 보고 싶을 때 무채 무채 말하다 보면 좀 나아졌다. 죽은 개들이, 인자했던 할머니 손끝이, 그렇게 건너온 저쪽, 너머의 존재와 말들이, 너무 귀하게 느껴져서 쥐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오랫동안 사랑받았다. 언젠가는 이 사랑도 비울 것이다. 그때까진 용감하게 사랑을 줘야지. 그럼 지금부터 이야기를 해볼까. 색을 열고 색을 삼키고 색을 쥔 채로 나를 키운 사람들의 마음 이야기.
색색마다 거두는 게 사랑이라, - 고명재 시인,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중
"엄마, 있잖아. 나 버터와플 좋아해."
뜬금없는 취향 고백. 나는 대답을 준비하지 못했기에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그걸 좋아하는구나."
설거지를 하면서 버터와플이 어떻게 생겼더라, 무슨 맛이었더라, 연실 떠올렸다. 주말에 같이 마트에 가면 잊지 않고 사줘야지. 사고 싶었던 최애 물건을 장바구니에 넣는 것만큼 신났다. 그 사람이 반드시 좋아할 거라 확신하며 장바구니에 넣을 때, 내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가진 기분이다.
나는 이거 좋아해....라고 나도 한 번 중얼거려 보았다. 어찌나 어색한지. 어느 날부터 좋아하는 걸 먼저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이 원하는 걸 타인에게 요구하거나 나의 취향만을 고집하는 유치한 행동 같다고 여겼다. 누가 물으면 그저 "딱히 좋아하는 건 없어"-로 얼버무렸다. 그게 더 성숙하고 고상하며 무난한 대답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오늘 아이가 선뜻 건넨 취향 고백은, 어쩐지 단순한 아이의 애교로만 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좀 더 쉽게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친절하면서도 귀여운 사랑 고백처럼 들렸다. '내가 뭘 원하는지 알긴 해?' -라고 되물으며 한 번도 제대로 내비치지 않은 사랑을 어렵게 구걸하거나, 사랑은 말이야-로 구구절절 가르치려 했던 연애 꼰대는 결코 풀 수 없는 냉랭한 마음의 성에가 버터와플을 끌어안고 녹아 버렸다. 주는 사랑의 설렘을 너에게 온전히 맡긴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 사람의 최애를 끌어안은 순간이었다.
내친김에 나의 입맛을 소개하며 아이와 나는 서로의 취향을 마음껏 교환했다. 우리는 둘 다 버터와플을 좋아하고 귤을 좋아하며 눈 오는 겨울을 좋아했다.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가수를 좋아했고 반전이 있는 추리 소설을 좋아했다. 좋아하는 걸 늘어놓으며 신난 얼굴마저 좋은 것. 그가 좋아하는 걸 더 많이 알고 싶은 것. 장바구니에 버터와플을 담는 순간 이미 크리스마스는 시작되었다. 좋아하는 걸 듬뿍 끌어안은 나도, 당신도, 메리 크리스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