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마음
아직 날씨가 꽤 쌀쌀하지만 봄은 전령을 보냈다. 노란 옷을 입었다며.
16시 14분, 경의중앙선 응봉산역. 메시지의 발신처이다. 열차가 날 이곳으로 잘 데려다주었다.
1번 출구 계단을 내려가는데 특이하게 생긴 창문 너머로 꽃나무가 바짝 붙어있다. 얼룩덜룩한 유리를 통하지 않고 직접 마주하고 싶은 마음에 창문 열기를 시도하지만 쉽지 않다. 생긴 모양만큼 특이한 열기 기술이 필요한 걸까? 기술 점수가 모자라서 창문 열기는 실패다. 얼른 출구를 빠져나가는 편이 봄에게 가는 제일 빠른 길일지도.
네 마음에 난 창의 모양도 특이한 것일까? 그보단 나의 열기 기술이 모자란 걸까.
난 말야, 예술 점수는 좋아. 모자란 기술 점수를 커버할 수 있을 만큼. 그러니까 넌 그것에 충분한 점수를 주어야 해. 왜냐면 네 창도 보통은 아니니까. 난 네게 유리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뛰고 있으니까.
아스팔트 길바닥에 응봉산 가는 길이 친절하게 쓰여있다. 큼지막한 글씨와 화살표가 나를 무사히 인도한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노란 벽돌길처럼.
봄의 집은 대문과 본채 사이가 꽤 길다. (사실 그렇게 길진 않다. 가볍게 가기 좋은 산이다)
본채를 향해 응봉역 뒷길을 걷는다. 저 멀리 해발 81M의 응봉산 정상이 건물들의 꼭대기 너머로 아주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다. 곧 방문하겠어. 딱 기다려.
슬슬 산자락으로 들어선 모양이다. 아직 본격적인 산행은 시작되지 않았지만 길의 경사가 심상치 않다. 거의 45도 각도의 비탈길이다. (45도까지는 아닐지도. 참고하자, 나의 수학적 능력) 응봉산 공원 입구에 주차할 곳이 없다는 잦은 경고를 무시하고 기어이 산자락의 주택가를 비집고 올라온 몇몇 차들이 거북이걸음으로 힘들게 후진하고 있다. 내 일은 아니지만 어쩌려고 저러나 살짝 걱정이 된다.
내 뒤에서는 힘에 겨운 신음이 들려 돌아본다. 안타까운 일이 두 사람에게 더 일어나고 있다. 자전거를 타고 오다니. 뒤로 넘어가지만 않으면 다행일 텐데.
다른 사람들의 날 보는 마음이 혹시 이렇진 않을까. 쟤는 어쩌려고 저러나. 짝사랑은 이제 그만하지? 뭐 이런.
사실 티를 안 내서 아는 사람도 없으니 걱정해 줄 사람도 없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난다 해도, 내가 아닌 ‘우릴’ 걱정하는 시선이 생겼으면 좋겠다. 쟤들 어쩌려고 서로 저리 좋아해? - 뭐 이런.
응봉산 공원 입구에 도착한다. 이제 노랑으로 뒤덮인 본채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집구경을 시작해 볼까.
응봉산은 동부간선도로의 교차로 위를 지나가며 차 안에서만 보았지 그 안으로 직접 들어와 본건 오늘이 처음이다. 개나리로 온통 물든 산의 정면은 기억 속에 무척이나 깊게 각인되어 있는데 이제 내밀한 속살을 볼 때다.
일단 노란 벽지가 너무 맘에 든다. 인테리어가 좋다.
입구부터 개나리가 지천이다. 평일인 관계로 사람보단 꽃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든다. 카메라 어플을 연다. 기가 막히게 예쁜 꽃 사진 하나 정도는 수월하게 건질 수 있을 것 같다.
꽃밭에 묻힌 산새들이 많이 보인다. 천지에 진동하는 꽃내음에 취한 건지 꽃밭을 떠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산새를 발견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기다렸던 사람들이 또 사진을 찍고, 마지막 내 순서가 돌아와도 모델은 그대로 나뭇가지 위에서 자세만 바꾸고 있다. 사진 찍히는 걸 아는 건가, 즐기는 건가 싶은 의심이 드는 순간이다.
개나리 나무 밑동의 가지들이 신기한 모습으로 자라 마치 동굴처럼 보이는 곳도 있다. 울타리를 넘어 그 안에 한 번 들어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난 숨고 싶은 걸까? 내가 숨어버리면 넌 나를 찾을까. 잊지 말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나의 술래가 되어줄래.
팔각정이 있는 정상에 오른다. 사실 중간 지점에서 이상한 곳으로 빠질 뻔했는데 촉을 잘 세워 무사히 왔다. 아주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며 여유롭게 사진도 찍고 꽃구경을 했더니 등산하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는다. 내 허리는 잘 버티고 있다. 정상까지 10분도 안 걸린다고 했는데 나는 30분은 걸려 올라온 듯하다. 그만큼 자세하게 집구경을 잘했다는 뜻 같아 괜스레 뿌듯하다. 집자랑을 하고 싶었던 봄 주인은 분명 나 같은 손님을 좋아할 것이다. 이상한 지점에서 자존감이 오른다.
산을 오르는 중간중간 한강과 중랑천이 잘 보이는 스팟들이 꽤 많았는데 해발이 낮은 산이긴 해도 확실히 정상은 정상이다.
리버뷰와 시티뷰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광경이 가히 출사자를 모을만하다. 대포카메라에 삼각대까지 이고 지고 온 사람들이 정말 많이 보인다.
그 사람들은 중랑천과 한강과 도로와 도시를 바라보고 나는 그들을 본다. 좋은 그림을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머물러 있는 걸까.
오랜 시간 머무르다 보면 얻을 수 있을까. 기다려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순간의 마음은 어떠할까. 너는 나의 렌즈 안으로 걸어 들어와 줄까.
산을 내려간다. 올라온 방향보다 내려가는 방향의 꽃들이 더 가경(佳境)이다. 햇빛을 좀 더 잘 받는 방향인가 보다. 이미 꽃 사진을 찍을 만큼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다. 그래서 360도 동영상도 한 바퀴 담아본다. 영 기술이 늘지 않는 셀카에도 도전해 본다. 역시 맘에는 들지 않는다. 꽃 사진이나 찍어야겠다.
앞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온다. 산을 내려갈수록 소리는 점점 또렷해진다. 부부가 사진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당신은 왜 이런 구도로 사진을 찍어? 그러는 당신은 왜 이런 다리 각도로 사진을 찍어? ... 저기요? 그쪽에서 올라오셨으면 아직 초입이에요. 벌써 싸우시면 어떡해요, 하며 내적 웃음을 지어본다. 어쩐지 귀여운 커플이다.
산을 다 내려와 용비교를 걷는다. 산의 정면이 잘 보인다. 다만 나는 이제 산을 빠져나가는 중이라 응봉산이 점점 내 뒤에 위치하게 되는 것이 안타깝다. 잠깐씩 뒤돌아 멈춰 산을 바라본다.
경의중앙선 철도와 노란 산, 중랑천이 내 눈 안에서 노랗게 버무려진다.
대학 교양수업으로 들었던 원예학 수업에서 나무를 심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개나리는 꺾꽂이로 개체수를 늘릴 수 있다. 쉽게 뿌리를 내리기 때문에 개나리에 흔히 사용하는 원예 기술이라 했다. 단점이 있다면 자가증식으로 개체수를 늘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특산종인 개나리의 DNA 다양성이 줄고 있다고 했다.
지천으로 깔린 개나리를 보고 나니 응봉산은 자연적으로 발생한 개나리 군락지인지, 아니면 관광용으로 개발된 곳인지 궁금해진다.
이곳의 모든 개나리가 저마다의 고유한 DNA를 가진 다 다른 개나리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만큼 많은 너를 볼 수 있게.
너의 DNA는,
사슬의 꼬임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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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DNA (by 방탄소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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