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유(換喩)
DDP 건축물 투어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동대문 근처를 지나갈 때마다 눈에 띄던 건축물. 오늘은 그 안에서 열리는 전시회나 행사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DDP 건축물에 담긴 이야기를 들으러 간다.
도슨트는 날 보자마자 외국인 유학생이냐고 묻는다. 나는 찐 한국인이고 한국인의 생김새(전형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게 있다면)를 벗어나진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가끔 외국인이냐는 소리를 듣는다. 왠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어떤 분위기가 있나? 발음이 좋지 않나? 아니면 외국인이 많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을 혼자 찾아왔기 때문에 그냥 한번 물어본 것일 뿐일까? 궁금증이 생겼지만 이유는 딱히 물어보지 않는다.
나는 호기심이 많아서 평소 궁금한 것을 잘 물어보는 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미처 물어보지 못하거나 않는 것도 많다. 너에게도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가득이지만 항상 꾹꾹 눌러 담는다. 내가 궁금한 것을 물어본다면 너는 거리낌 없이 대답해 줄까. 하지만 듣고 싶지 않은 답이 돌아올까 겁이 나 제일 궁금한 것을 묻지 않는다.
아니면 말아. 내가 뭐가 아쉬워서.
라고 가볍게 넘겨버리기에는 너무 새가슴이다. 대담한 마음으로 용감하게 지르며 쟁취하고, 얻지 못한다 해도 금방 털어버리는 쿨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란 걸 안다.
DDP는 두 개의 뜻을 가지고 있다. Dongdaemoon Design Plaza 혹은 Dream, Design, Play.
개인적으로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훨씬 좋았지만, 지금에 와서 내 의견이 크게 중요할까.
이 건물은 이라크의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설계했다. 한때 건축물 없는 건축가로, 이론가로서만 명성을 날렸지만, 설계 도면을 넘어선 도발적인 건축물들이 실제로 많이 세워지면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 아키텍처 프라이즈 건축상을 수상했다. DDP는 세계최대규모의 3차원 비정형 건축물로 자하 하디드가 별세 전 마지막으로 완공까지 지켜본 유일한 작품이다. 유작이 되었기에 그 가치가 남다르다.
이 건물은 설계 공모전 때 당선된 자하 하디드의 초안 설계와는 많이 다르다. 건축 과정에서 유물이 발견되었을 때 설계가 다 바뀔 수밖에 없게 되자 자하 하디드는 무척 진노해서 자신이 이 건물을 설계했다고는 말하지 말라 했다 한다. 물론 건축의 과정 중에, 그리고 완공되었을 때엔 그 누구보다도 깊은 애정으로 바뀌었지만.
나라는 존재는 네가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 사람일까? 많은 사람들이 나를 겪으면 항상 하는 말들이 있다. 갈수록 모르겠다라거나, 아무튼 특이하다거나.
네가 보는 나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처음과 그대로일까. 아니면 처음 그렸던 머릿속의 도안과는 점차 달라진 사람일까. 나의 첫인상은 어땠을까. 지금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처음 만났을 때 나를 보던 너의 눈동자를 기억한다. 너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커지던 동공. 그건 어떤 의미였을까. 너는 그때 어떤 설계도를 그리고 있었던 걸까.
DDP 건축물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 중 하나는 외장재인데 45,133장의 알루미늄 패널이 사용되었다. 자하 하디드는 이 패널을 국내 기술로는 만들지 못할 것으로 생각해 영국과 독일업체를 추천했으나 제작에 20년이 걸린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시공사였던 삼성물산의 협력체 스틸라이프에서 1년 반 만에 제작에 성공한다. 현재 특허출원이 되어있다.
선박의 외관처럼 크게 제작한 다음에 레이저로 작게 자르고 각 패널마다 고유번호를 부여해 자료를 보관하고 있기에 망가진 패널은 따로 제작이 가능하여 수리할 수 있다고 한다.
단 한 장도 같은 것이 없다. 빛깔도 4가지로 모두 은은히 다른 색을 띤다.
스피드의 민족. 안될 걸 되게 만드는 힘.
나는 어떠할까. 스피드와는 거리가 멀지만 결국은 되게 만드는 힘을 과연 가지고 있을까. 적어도 짝사랑의 힘만큼은 특허출원감이다.
도전하면 이룰 수 있을까. 큰 마음을 작게 조각내어 가지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하면 상처를 입더라도 다시 복원해 이어 붙일 수 있으려나.
건물 내부의 어느 한 공간에는 안에서 밖은 보이지만 밖에선 안을 볼 수 없는 거대한 창이 있다. 아침에는 외관의 알루미늄 패널 구멍 사이로 햇살이 정말 아름답게 들어온다고 한다.
그 모습을 너와 함께 보고 싶다. 햇살보다 네가 더 빛날 것을 알기에.
DDP의 지붕은 다육식물이 40% 정도 심어져 있다. 전체 외관이 알루미늄 패널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여름엔 너무 뜨거워지는 것을, 겨울엔 너무 차가워지는 것을 방지해준다고 한다. 그리고 비 오는 날엔 패널 사이로 흐르는 빗물을 받아 화장실 용수로 사용한다. 알루미늄 패널이 DDP에서 정말로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
자하 하디드가 제시했던 DDP의 건축 컨셉은 <환유의 풍경 (Metonymic Landscape)>이다.
환유란 어떤 사물을 그것의 속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을 간접적으로 빌려서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그러니까 DDP는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추상적 건축요소들을 환유적으로 통합하여 하나의 풍경을 창조한다는 의미를 가진 건축물이다. 그래서인지 무언가에 영감을 받아 제작한 건축요소와 장식, 소품들이 굉장히 많다.
조선시대의 책가도에서 영감을 받아 설치된 책조명등, 동화 피노키오의 고래 뱃속을 표현한 어린이 놀이터 공간, 하이힐이나 용수철을 떠올리게 만드는 각종 조형계단들, 그리고 클로버•팽이•중세시대 마차•프리첼•크레바스 등의 모양으로 제작된 수많은 의자들. 그리고 고려시대 청자의 이미지를 살린 건물의 외관, 대청마루에서 영감을 얻은 건물의 바람길.
그래서일까? 이 알루미늄 패널의 외관과 바람길 덕분에 전체 건물은 직선 없이 곡선으로 유려하게 흐르는 모습이 용을 연상케 한다. 도슨트는 처음 들어본 의견이라고 했지만 내 느낌은 그랬다.
너는 나의 뮤즈다. 무언가를 할 때 너를 떠올리면 영감이 많이 떠오른다. 언제나 짝사랑은 할 말이 넘친다. 하지만 외사랑이 아닌 양방으로 통하는 관계였으면 좋겠다. 더 많고 창의적이고 다양한 것이 샘솟을 건설적인 그런 관계. 그렇다고 해서 너를 나의 재료로만 소진하고 싶진 않다. 너에 있어서만큼은 누구보다도 현실적이고 싶다.
국내에서 유일하다는 8 거리를 본다. 그곳의 중심에선 DDP의 어느 곳으로든 갈 수 있다. 주위를 둘러본다. DDP뿐만 아니라 지하철이나 외부도로로도 길이 나 있다.
건축물 투어를 하는 동안 현재 DDP에서 많은 전시회들이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왠지 오늘은 그것들을 볼 수 없다.
너에게로 뻗은 이 길 때문에.
갈래길을 걷는다. 매일의 마음이 우왕좌왕하는 나는 이 길 위에서도 몇 번을 왔다 갔다 서성인다.
이유도 모른 채.
나는 얼마나 더 가야만 할까.
나는 계속 걸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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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설계도 (by 넌 아만다 (You are am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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