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축(角逐)
간단히 끼니를 때우고 있는데 전화가 온다. 오늘 있을 도보여행 해설사님의 예약 확인 전화다.
가고 있다는 말을 전한 후 샐러드빵과 커피를 마저 털어 넣고 서둘러 카페를 나선다. 지하철 출구에 지긋하신 나이의 해설사님이 서 계신다. 예약 인원 중 다른 팀 사람들이 코로나 확진이 되어 오지 못했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혼자다. 너를 찾아 떠나는 서울 여행에선 유난히 도슨트 독점이 많다. 약 두 시간가량 해설사님과 도보 데이트를 즐기면 되겠다. 네가 아니라 해도 좋다. 너는 언제나 길 위에 있으니까.
풍납토성으로 향한다. 송파구엔 꽤 많이 들렀지만 그동안 풍납토성은 보지 못했다. 눈앞에 나타난 풍납토성이 꼭 네 마음의 장벽 같다. 생각보다 높은 높이에 놀란다. 본래의 높이는 더 높았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백제 시대부터 현재까지 유구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조금은 낮아졌다고 한다.
너의 장벽도 혹시 시간이 지날수록 깎여나갈까.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까. 하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여전한 이 풍납토성처럼 넌 높은 벽으로 남아있을까.
풍납토성 안에 많은 가구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문화재가 어마어마하게 깔려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이곳이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부터 살던 사람들이어서 쉽게 이주시킬 수 없다. 정부와 서울시에서 오랫동안 많은 대책을 고민하고 있지만 쉽지 않다. 제일 큰 문제는 이주 비용과 보상비이다.
너도 그 안에 있다. 어떤 보상이 있어야 네가 그곳에서 나올까. 나오긴 할까. 만약 장벽 밖으로 나온다면 나에겐 어떤 이주 대책이 수립되어 있는가. 어마어마한 플랜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확실한 건 있다. 내 마음으로 들어온다면 살뜰히 대해줄텐데.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토양이 유실되면서 땅 속에 묻혀있던 유물이 상당수 발견되었다. 이곳이 옛 한성 백제의 수도였던 만큼 백제의 유물이 대부분이었고, 한강 유역을 삼국이 모두 번갈아 차지했던 관계로 고구려와 신라의 유물도 많이 발견되었다.
내 마음도 그렇다. 너를 향한 마음이 점점 불어나 홍수를 이루면서 애써 덮어두었던 것이 쓸려나갔다. 그리고 깊은 곳에 묻어둔 진심이 드러났다. 생각보다 많이 좋아하는 마음. 나는 더 이상 이걸 모른 척할 수 없겠구나. 오래 간직하고 있는 마음이 유물이 된다. 이 유물을 좀 보아주지 않을래.
삼국의 역사이야기를 하며 몽촌토성으로 이동한다. 역사를 좋아하는 관계로 꽤 많은 이야기들이 재밌게 잘 통하고 있다. 해설사님이 한국사자격시험에 한번 도전해 보라는 말씀을 하신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편으로는 짝사랑의 마음에도 자격시험 같은 것이 있을까, 있다면 나의 자격은 너라는 시험에서 몇 급이나 될까 하는 잡념에 빠진다. 마음에 어떻게 점수 같은 것을 매길까 생각하면서도 진짜 시험이든 너라는 문제든 도전해 볼까 하는 용기가 잠깐 고개를 든다.
이야기는 무르익고 몽촌토성에 도착한다. 풍납토성보다 훨씬 높고 튼튼해 보인다. 해자도 고랑도 꽤 잘 복원되어 있다.
너는 네 마음을 견고하게도 수성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엔 밖에서 보기만 했던 풍납토성과 달리 토산을 오른다. 너무 높고 가팔라서 말들은 넘기 어려웠겠지만 나는 오른다.
네 마음의 고랑을, 해자를, 다리를 넘어.
전망이 무척 좋다. 꼭대기까지 오르니 저 앞에 보이는 롯데 타워도 생각보다 크지 않다. 타워 아래에서 볼 때는 그렇게나 높아 보였는데.
계속 이렇게 네 마음을 오르다 보면 커다란 네가 조금은 작아 보일까.
나무들이 꽤 많다. 벚꽃과 개나리는 아직이지만 산수유는 꽤 많이 피었다. 오동나무 회화나무도 보이는데 해설사님께 이 나무들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다. 옛날엔 딸이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심었고 아들이 태어나면 회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오동나무는 가구를 만들려는 목적이었고 회화나무는 재상이 나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고 한다.
나는 무슨 나무를 심어볼까. 대나무를 심어야 하나.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 하고, 대나무 숲 속에서 소리 지르고 답답한 마음을 남몰래 내보이고 싶다 생각할 무렵 키 작은 대나무숲이 조그맣게 자리 잡은 곳을 지난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지만 소리를 낼 수 없다. 사람이 참 많다. 당나귀 귀는 마음속으로만 지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아까부터 잔디 사이사이로 눈에 띄는 것이 있다. 스프링클러인가? 그것이 무엇일까 계속 궁금했는데 드디어 정체를 알게 된다. 팻말이 서있다. 친환경 두더지 퇴치기다. 내가 재밌어하자 이곳을 수없이 오르셨던 해설사님이 오늘 처음 알게 되셨다고 신기해한다. 뭔가 뿌듯하다. 해설사님은 다음 해설에서 이걸 소개해주실 수도 있겠다.
퇴치기라니. 두더지는 생태계를 이롭게 하는 동물인데 쫓아내진 말지 하는 생각과 함께 두더지에 동화가 되어버린다.
- 네 안에 살고 싶은 마음이 무슨 해라도 끼치는가, 왜 쫓아내는데? 하다가도- 혹시 내가 네 땅을, 네 마음을 마구 뒤집어 들쑤셔 놓는 걸까 하는 상상을 한다.
너는 고요하고 싶은 걸까. 그래서 나를 밀어내는 걸까. 아예 내 마음을 죽이는 게 아니라 그냥 조금 쫓아만 내는 걸까.
뿔이 난다. 계속 들쑤셔 놓고 싶다는 본능이 꿈틀거린다.
몽촌토성을 내려오면 그 끝에 한성백제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 도보여행의 마지막코스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풍납토성이 실제크기로 전사되어 있다. 풍납동토성 성벽 전사면. 2011년 풍납동토성의 동남쪽 성벽을 발굴조사할 때 성벽의 단면을 그대로 얇게 떼어내 보존처리를 한 뒤 박물관 로비로 옮겨왔다고 한다. 아랫변 43m, 윗변 13m, 높이 11m. 실로 거대하다.
내 마음은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떼어내 보아야 할까. 보여주는 일이란 필요한 것일까.
실은 발걸음 닿는 곳마다, 가고 있는 곳마다 조금씩 떼어내 전사하고 있다.
한 번에 거대하게는 아니지만 조금씩 마음 한 귀퉁이씩 떼어 둔다. 언젠간 네가 그 덩어리들을 봐줄까.
백제의 수막새를 본다. 너무 예쁘다. 신라의 수막새만 예쁜 줄 알았는데 백제의 기와도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 기와는 암키와와 수키와로 이루어져 있고 이를 합쳐 와당이라 한다. 그리고 처마 끝은 수막새와 암막새로 마감한다. 수막새는 수키와가 쭉 이어져 형성된 기왓등의 끝에 드림새를 붙여 만든 기와를 말하는데 이 수막새의 무늬에 각 국가별 특징이 드러난다.
백제의 수막새에 푹 빠져 사진을 거의 예술적으로 찍어본다. 수막새는 화려하다.
너의 무늬는, 안정감이 있고 자기중심을 잘 잡고, 싫고 좋음이 분명해서 싫은 건 싫다 말한다. 그래서 내가 언제 처참히 내쳐질까 두렵기도 하다. 조금 다가갔다가 밀어내는 바람에 완벽히 포기하려 했었다.
그러다 네가 나를 다시 조금 당겼다. 나는 처마 아래 물 웅덩이 어장에 있는 것 같다. 너의 무늬, 수막새를 보느라 나는 목덜미가 아프다.
삼국의 각축을 전시하고 있는 부스로 간다.
너와, 나와, 어떤 이의 세력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나는 지금 제일 작은 존재다. 신라?
신라. 결국 마지막엔 패권을 쥐는 걸까? 그게 말이 돼? 하면서도, 역시 내 멋대로 별의별 상상을 다하게 만드는 오늘의 서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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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걔 말고 (by 스무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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