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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평도시유적전시관

유구(遺構), 유구(悠久)

by 미하

종로에 있는 법정동 중에선 인사동과 청진동이 유명하다. 태어나서 내내 서울에 산 사람으로서 조금은 부끄럽지만, 공평동이란 지명은 이번에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을 다녀오면서 처음 알게 되었다. 비단 모르는 것이 이것뿐만은 아니겠지만.

너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한 보따리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나는 너를 더 알게 되는 배움의 기쁨을 누리고 싶다.


공평동은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중부 8부의 하나였던 견평방에 속하였고 이곳에 자리하고 있던 의금부가 재판을 공평하게 처리한다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넌 조금 특이한 이름을 가졌다. 어떤 연유로 그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빌딩의 지하로 내려가자 생각지도 못했던 탁 트인 장소가 등장한다.

지하지만 전혀 답답한 느낌이 없다. 그리고 흙과 돌이 가득해서 일단은 시선을 무척 잡아끈다.

뭔가 타임슬립을 한 느낌이랄까. 잠들어있던 과거의 번화가가 지금의 콘크리트 도심 속 번화가 밑에 살아 숨 쉰다.

제일 눈에 띄는 것은 투명한 유리 바닥이다. 발을 딛고 서 있는 2.5cm 두께의 유리 바닥이 그 밑의 유구들을 잘 볼 수 있게끔 역할을 한다. 40톤의 무게도 충분히 견디는 내구성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리 바닥으로 인해 몰려온 공포감으로 관람을 포기하고 발걸음을 돌리는 사람도 꽤 있다고 한다.


내 마음도 이 전시관의 바닥처럼 유리 재질이지만 꽤 튼튼하다. 웬만해선 잘 부서지지 않는다.

누군가는 나를 보고 굉장히 감성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이성적이라고 했다. 이 둘은 상당히 상반되는 것 같지만 한 사람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복합적인 면 때문에 너에게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는 것일까?


이성의 끈으로 감정을 동여매고 있다. 유리 밑 유구를 만질 수 없다. 그걸 보기만 한다. 내 마음의 유리 너머에 마구 요동치는 감정이 고스란히 보이지만, 나는 그것을 꺼내어 너에게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유구 같은 욕망이 말한다. 제대로 꺼내어져 너에게 보여지고 싶다고. 나를 건드려달라고.


2015년 건물 신축공사 중에 땅속 4미터 깊이에서 15세기부터 19세기의 건물터와 골목길터가 발견되었다. 재개발 현장에서 유적을 발견했을 때 문화재를 보존하는 것과 개발의 문제는 언제나 큰 논란이었고 골치 아픈 이슈였다. 어떻게 하면 그 둘이 공존할 수 있을까. 있다면 문화재는 어디에 어떻게 보존해야 하고 개발 측은 손해를 떠안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 공평도시유적전시관을 계기로 큰 해법이 생겨났다. <공평동 룰>이라는 것이다. 그건 바로 유적이 발견된 곳에 문화재를 그대로 보존하는 대신 건물 개발사 측에 용적률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다.

그 룰의 적용으로 원래 설계 당시 22층이었던 건물이 지금은 26층 높이로 들어서게 되었다.


문화재 보존 지역은 서울시와 같은 국가 공공 기관에서 관리를 맡고, 나머지 민간의 구역은 터치하지 않는다. 하나를 주고 하나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윈-윈이다. 둘 다 상생하는 길이다.


나는 너에게 무엇을 주고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깊게 가라앉아 있는 마음 한번 용기 내 꺼내 놓으면 너는 무언가 작게라도 화답해 줄 수 있을까. 사람과 사람의 마음 사이에 이런 룰 같은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짝사랑으로 끙끙 앓는 일이 조금은 줄지 않을까. 적어도 한쪽의 비극으로 끝나는 일 따윈 줄어들겠지.

혹시 넌 나에게 내어주는 대신 받고 싶은 것이 있을까. 있다면 말을 해. 나는 협상에 응할 준비가 되어있다.


유리 바닥 밑 유구 중에 초석과 적심석이 눈에 많이 띈다. 그리고 전시관 한쪽 벽면에는 이 초석과 적심석을 잘 다져 건물의 기둥을 튼튼하게 세우는 등의 집 짓는 과정의 작업 영상이 틀어져 있다.

짧은 영상이지만 그 앞에서 쉽게 발길이 떼어지지 않아 여러 번 본다.


나도 마음의 기둥을 잘 세우고 싶다. 어쩌면 꽤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너지지 않기 위해 이성의 끈을 꽉 잡고 있으니까. 집이 무너져도 기둥터는 남는 것처럼 네가 떠나간 후에도 나는 너를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은. 정말은. 기둥터가 아니라 집과 기둥을 원한다. 집과 기둥이 있었던 처음 모습 그대로 남아있길 원한다. 터만 남긴 채 사라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든 것이 사라진 채로 덩그러니 남은 터 위에 서서 VR 영상처럼 너를 반추하고 싶지는 않다.


발굴된 6개의 문화층위 중 15-16세기와 18-19세기 문화층은 잔존상태가 좋지 않아 기록으로만 남기고 복원하지 않고, 상태가 제일 좋은 16-17세기의 IV문화층위를 중심으로 복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건물을 세우는 과정에서 문화재 위치와 건물 설계 간 충돌이 있는 부분은 복원 진정성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확하게 계산하여 수평 수직으로 이동시켜 복원, 전시하였다.


나의 마음도 조금은 이동할 수 있는데. 나의 마음의 원형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싫어했던 장르의 영화에 관심이 생긴다. 네가 좋아한다는 사소한 이유로.

원래도 잘 돌아다니지 않지만 네가 집에 박혀있는 걸 좋아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더 홈바디가 될 수도 있다. 서로의 취향을 알아가고 하루를 궁금해하는 것. 너를 더 알아가는 마음의 이동. 수평 수직 사선으로의 이동.


조선시대의 주요 관청과 시전 등 잘 꾸며놓은 육조거리를 본다. 여리꾼, 전기수, 왈짜, 순라군, 주모의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가 전시관을 울리고 있다.

나와 너의 이야기를 전기수가 떠들 수 있을 만큼 우리에게 많은 이벤트가 쌓이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 지지부진한 나 자신이 조금은 답답해져 술잔을 들고 싶어졌다.

다음번엔 주막을 찾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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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City Love (by 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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