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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칵테일 바

다 모르겠고

by 미하

온종일 마음이 어수선하고 불안정하다. 항상 너 때문이긴 하지만 오늘은 특히 더 하다. 우중충한 날씨 때문일까. 오히려 이런 날씨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무엇 때문에 이런 싱숭생숭한 기분이 드는 건지 잘 모르겠다.

비가 오려하고 있다. 한바탕 시원하게 퍼부으면 좋으련만 내리지 않는다. 내 기분만큼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날씨.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던 그곳을 갈까 말까, 골백번도 더 고민한다. 어두운 조명과 화려한 술이 있는 곳, 위스키 바. 캘린더 스케줄에 넣다 지웠다를 수없이 반복했던 곳.

왜 이렇게까지 고민을 하는지 알고 있다. 그곳에 가면 혹시 너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비록 한없이 가벼운 만남일지라도. 만약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나는 너를 두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키는 상상이지만, 이건 위스키 바가 아니더라도 늘 하는 생각이다.


너 아닌 다른 사람을 몇 번 만나본 적이 있다. 하지만 같이 이야기를 하고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너를 떨칠 수 없어 다른 이가 나에게 주는 깊은 호감은 내 마음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그렇지만 ‘한없이 가벼운’ 만남은 다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내 마음속에서 너를 내보내어야만 한다면, 그런 만남은 너를 잊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어리석은 생각인 걸 안다. 그렇지만 오랜 짝사랑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커지는 이런저런 바보 같은 생각은 점점 더 제멋대로 활개 친다.


방구석을 뛰쳐나갈까 말까 고민만 하다, ‘준비하면서 고민하자’라는 단계로 넘어간다. 가지 않는 것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준비했던 시간은 그저 되감으면 된다.


평소답지 않게 한껏 차려입는다. 영화 속 흔한 장면처럼 이 옷 저 옷 꺼내 입다 보니 침대 위가 엉망이 된다. 화려하진 않지만 얼굴에도 엄청 공을 들인다. 한참 시간이 걸려 맘껏 나를 꾸미고 평소에는 신지 않는 구두까지 신어버린다. 그리고 그 구두를 신은 순간, 한숨과 함께 집 밖을 나선다.

가다가 영 내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뭐.


결국 위스키 바 앞까지 도착을 해버린다. 심장이 쿵쾅대지만 이겨내 보기로 한다. 에라 모르겠다.


꽃으로 장식된 아치형 철제 터널 아래, 계단을 내려가 육중한 문을 연다. 세련된 곳이라는 걸 알겠다. 들어서니 안쪽에서 밖의 소리를 듣고 나온 직원이 예약 여부와 일행이 있는지 묻는다. 예약 없이 혼자 왔다고 하니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아무렇지 않게 바텐더가 있는 바 자리로 안내를 한다. 에스코트를 받으며 소파에 앉는다. 나는 이곳에 와버렸다.


막상 오고 나니 마음에 변화가 생겨난다. 뭐가 그리도 어려웠을까. 다 모르겠고, 일단 알코올부터 주문하는 걸로.


본래의 목적은 위스키였지만 라임이 들어간 칵테일에 눈길이 간다. 주문을 하고 편안하게 말을 걸어주는 바텐더와 이야기를 나눈다. 부담 없는 대화 덕분에 긴장이 풀린다.

주스 같은 느낌의 칵테일이 부드럽게 넘어간다. 술기운인지, 장소가 주는 힘 때문인지, 결국 도착해서 술을 마시고 있다는 묘한 뿌듯함 때문인지, 역시 오늘 날씨만큼이나 나도 이상하다. 확실한 건 뭔가 안정되는 마음이랄까. 손님들이 점점 모여들고 술과 술이 경쾌한 소리 속에 뒤섞인다.

혼자 오는 사람이 꽤 많다. 아무렇지 않은 거구나. 가끔 방문해 볼까.


데낄라 원액이 들어간 칵테일을 마시다 보니 보드카와 데낄라의 차이가 궁금해져 바텐더에게 질문한다. 설명과 함께 시음해 보라고 두 개의 잔이 놓인다. 번갈아 마셔보니 나의 취향은 데낄라인가 보다. 목 넘김 후에 느껴지는 조임이 좋다.

첫 번째로 주문한 Tommy’s Magarita를 다시 한 모금 들이킨다. 시큼하고도 깔끔한 갈증이 느껴진다.


“갈증“.

너 때문에 목이 타서 술을 들이켜는데 그것이 다시 목을 타게 만든다. 위험하다. 한도 끝도 없이 마실 수 있겠다. 그래서 오랜 시간 아껴 마신다.

나의 모습을 지켜본 바텐더는 팁을 준다.

오랜 시간 얼음이 녹아 맛이 희석되는 것이 신경이 쓰인다 한다. 한잔을 마시는 데 예상되는 시간, 예를 들면 빨리 마실 것인지 천천히 마실 것인지 미리 바텐더에게 알려주면 좋다 한다. 오랜 시간 마실 거라면 그것에 맞춰 잔에서 얼음을 꺼내어주고, 알맞은 타이밍에 다시 넣어준다 한다.

좀 더 시큼한 맛을 원한다면 라임을 직접 짜 넣지 말고 역시 바텐더에게 말해달라 한다. 다시 조절해 만들어 드린다고. 최상의 맛을 선사하는 게 바텐더 최고의 기쁨이라는, 무슨 클리셰 같은 대사도 분위기 있게 곁들인다.


와서 경험해 보니 바텐더는 일종의 중재자다. 술과 그것을 마시는 사람 사이를 조율한다.

나에겐 너를 대하는 팁과 함께 내 마음을 조율해 줄 바텐더가 필요하다.


- 오늘은 그 사람 생각을 너무 많이 했군요, 이제 그만

- 오늘은 딴생각을 너무 많이 했군요, 다시 그 사람 생각


뭐 이런.

서늘해지려고 마음에 넣어놓은 얼음이 너무 녹지 않도록 다시 얼음을 꺼내놓는 일. 미지근해졌을 때 다시 차갑게 만드는 일. 너무 뜨거울 땐 얼음이라도 넣어 좀 식혀야 하는 일.

이성을 잠시간 꺼내놓았다가도 다시 넣어 최적의 상태로 마음을 오래 유지할 수 있는 방법. 이성과 감성의 온도의 비율.

나는 그 방법과 알맞은 때를 잘 모르겠다. 이러다간 결국 얼음 자체가 다 녹아버리는 건 아닐까.


두 가지의 칵테일을 추천받아 하나씩 마셔본다. 세 잔 째를 마실 무렵 바텐더가 어떤 것이 제일 좋았는지 묻는다. 첫 번째가 제일 좋았다고 하자 미소와 함께 역시 추천보단 스스로 골라야 한다는 말이 돌아온다.


내가 마음에 들어 고른 사람, 반대로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 너에게 나는, 너를 좋아해 주는 사람일 뿐인 걸까. 멋대로 판단해 보건대, 너도 나에게 상당한 호감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네 앞에는 이미 마시고 있는 술이 있다.

그 술이 맛이 없는 것이면 좋겠다. 너는 새 메뉴판을 오래도록 보고만 있는 것 같다. 네 앞의 그 술을 빨리 마셔버리거나 치워버린 후에 새 술을, 나를 선택하기를 바라는 마음.


방금 들어와 앉은 옆 자리 사람의 우산이 젖어있다. 드디어 비가 내리는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역시나,

네가 문을 열고 걸어 들어와 내 옆에 앉는 상상을 한다.

비 내리는 날을 좋아하지만, 마지막에 내 기대를 저버린 하루의 비는 나를 조금 우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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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Tequila (by Dan & Sh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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