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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

궁금한,

by 미하

궁궐 야행.

밤의 궁궐은 어떤 모습일까. 예전의 그 시대 사람들이 살던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지만 현대 서울과 옛 서울의 정취를 한 번에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어제 해설사에게서 밤궁궐은 정말로 정말로, 상상외로 춥다는 문자가 왔다. 겨울 점퍼로도 견디기 힘들 만큼.

너 만큼 추우려나. 엊그제 따뜻한 날씨에 봄맞이 꽃구경을 하고 왔기에 조금 고민했지만 해설사를 믿고 꽤 단단히 차려입었다. 확실히 손이 시리다. 밤은 아직 춥다. 궁궐 안은 더 춥다.

꽤 쌀쌀맞은 오늘의 너는 어떤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까.


예약된 투어의 모임 장소인 춘당지로 간다. 동행할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다. 그동안 도슨트 독점이 많았는데 이번엔 그렇지 않아서 꽤 설레는 마음이 든다. 출석체크를 하고 수신기를 받아 목에 건다.


창경궁과 창덕궁은 후원도 연결되어 있을 만큼 담 하나를 두고 붙어 있다. 그래서 하나의 궁궐처럼 인식했다고 한다. 하지만 서궁으로 불리던 창덕궁이 정치적 공간이었던 것과 달리 동궐인 창경궁은 주로 침전과 생활공간으로써의 내전의 성격을 보였다.


조선의 9대 임금 성종 때 지어진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전부 소실되었는데 광해군 시절 제1궁궐이었던 경복궁보다도 먼저 재건되었다. 지금 남아있는 다섯 개의 궁궐 중 제일 오래된 창경궁은 남아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이 국보 아니면 보물이라고 한다.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도, 임금의 주 업무공간인 명정전으로 가는 길목의 옥천교도 보물이다.


옥천교 가운뎃길은 어도, 왼쪽은 무반의 길, 오른쪽은 문반이 지나는 길이다. 해설사는 각자 바라는 바가 있다면 그 소원의 성격에 따라 그 방향으로 한번 걸어보라고 한다. 큰 망설임 없이 오른쪽으로 걸어본다. 그러나 곧 후회한다.

소심함을 벗어던지고 너에게 용감해지려면 왼쪽, 무반의 길을 걸었어야 했을까. 하지만 네가 서 있는 어도를 밟을 수 없어 반대편으로 건너가지 않는다. 용감함 대신 영리해지기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오른쪽 길을 끝까지 걷는다. 사실 문반에게도 무반에게도 영리함과 용감함은 다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양쪽을 다 걸어봐야겠다. 네가 있는 어도를 밟지 못할 이유도 없다. 나는 네 앞에서 왕이 되어보고 싶다.


‘궁금하다’의 어원도 듣는다. 옥천교 아래 옥류천처럼 궁궐 정문 안에 흐르는 물길을 금천(禁川)이라고 하는데 일반 백성은 이 금천(禁川)을 건널 수 없다. 때문에 궁궐의 궁과 금천(禁川)의 금이 합해져서 ‘궁금하다’ - 궁궐 안이 궁금하다-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너와 나 사이에도 금천(禁川)이 흐른다. 내가 건널 수 없는 걸까. 네가 건널 수 없는 걸까.

너도 나를 궁금해한다는 걸 안다. 지금 옥류천은 가뭄 때문인지 많이 말라버렸는데 우리 사이의 금천도

마르면 건너는 게 가능해질까. 아니면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처럼 그리도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하는 걸까. 우리 사이는 가능하지 않은 걸까. 궁금하다는 게 이렇게 갈라져 있기 때문이라니. 건널 수 없기 때문이라니. 그저 궁금하기만 했던 너였는데 나는 갑자기 서글퍼진다.


명정전 앞마당 조정의 품계석을 앞에 두고 조선시대 과거 시험의 이야기를 듣는다. 최종 관문인 대과 3차시 장원급제자의 책문(답안지)이 다른 모든 수험자들의 책문 맨 위에 놓인다. 여기서 ‘압권(壓卷)’이란 말이 유래한다. 누를 압(壓), 책 권(卷).

나는 지금 시험을 치르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금 뿐만이 아니라 항상. 나에게 연애는 너무 어렵다. 특히 너라는 문제는. 내 답안지는 압권이고 싶으나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분명하다. 나는 급제자가 아니라 낙제자다. 정말 형편없다는 걸 알기에 나는 또 조금 우울해진다.

9번의 장원급제를 하여 구도장원공이란 별명을 가졌던 율곡 이이 선생처럼 되긴 어렵겠지.

오천 원권을 부적처럼 지니고 다녀볼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본다. 모두를 제치고 시험이란 시험은 다 싹쓸이해 버리는 그런 사람이 되려면 다시 태어나야 하는 걸까. 나는 그저 턱걸이라도 시험에 통과해보고 싶다. 너라는 문제 앞에서 자랑스럽게 답안지를 흔들어 보고 싶다.


국보인 명정전의 어좌, 일월오봉병, 닫집, 봉황 조각을 본다. 그리고 400년 된 엄청난 길이와 두께의 소나무 기둥도. 창경궁만 유일하게 가지고 있다는 건물 외관의 꽃창살과 400년 동안 한 번도 수리하지 않고도 견고함을 유지하고 있는 벽돌구조물도 너무 아름답다. 고개를 들어 건물의 서까래와 부연을 본다.


옛 건물들을 볼 때마다 항상 궁금증을 자아냈던 그물이 눈에 띈다. 저 그물에 대해서 해설사에게 질문을 해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설명을 해주신다. 새가 둥지를 짓는 것을 막고, 그럼으로써 뱀을 비롯한 동물들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이름은 ‘부시’다. 그리고 이 부시는 현대에 설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드디어 궁금증이 풀리는 순간이다.


네 마음에도 부시 같은 것이 있는 걸까. 나는 순식간에 새가 되고 뱀이 되고 멧돼지가 되어버린다.

네가 쳐놓은 그물 하나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대단한 기술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다가 문득 어느 순간에 이 모든 것은 나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부시는 네가 아니라 내가 쳐놓은 것일까. 내가 다가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다가오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너라는 새가 둥지를 틀 수 있게 그 그물을 걷어내고 싶지만 너무 얽혀있어 풀어버릴 수 없을 것만 같다. 풀어버릴 수 없다면 끊어내야 하는데 가위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걸까.


수많은 기억을 품은 밤의 창경궁은 너무나도 아름답고 쓸쓸하고 절절하고 흥미롭다.

문정전 앞 계단에 걸쳐 앉아 영조와 사도세자와 정조의 이야기를, 숭문당에선 영조의 친필 현판을 보며 영조의 이야기를, 화민정에 걸터앉아선 연산군의 이야기를, 경춘정에선 정조의 탄생과 인수대비 혜경궁 홍씨 인현왕후의 이야기를, 환경전에선 광해군과 소현세자 중종의 이야기를, 통명전에선 장희빈과 인현왕후와 숙종 그리고 정순왕후와 정조의 이야기를, 양화당에선 인조와 소현세자의 이야기를 듣는다. 너와 나의 이야기는 어느 곳에 걸터앉아 말해야 하나.


통명전 앞에서부터 관리자가 돌아다니면서 ‘이제 끝났어요’ 라며 폐궁 시간임을 여러 번 알리고 있다. 이제 슬슬 나가라는 소리지만 이런 일을 항상 겪어온 해설자는 당황하지 않고 나름의 시간 배분을 하며 묵묵히 할 이야기를 다 해주고 있다. 당당한 전문가 덕분에 초조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투어가 마무리되고 간단한 대화와 질문을 한 후 수신기를 반납한다. 해설자와 인사를 나누고 홍화문을 향해 걷는다. 어두운 궁궐 안에서 발목을 한번 삐끗했으나 이상은 없다.

너무너무 춥지만, 살짝 우울도 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 한 구석을 따뜻하게 데우는, 묘한 밤의 궁궐을 빠져나온다.


이몽룡이 장원급제를 했다는 장소 - 춘당지가 가을에 무척 아름답다니 그때쯤 한번 더 방문해 볼까.

너도 같이 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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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꽃샘추위 (by 별빛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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