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고 깊은
서울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바로 여의도 63 빌딩이다. 관광이라 하는 건 풍경이나 풍습, 문물 따위를 구경하는 것이니 이렇게 서울을 돌아다니며 내 마음에 담긴 너의 모습을 보는 나의 요즘도 관광과 다를 바 없다.
위로 길게 뻗은 63 빌딩의 지하를 먼저 본다.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처럼.
아쿠아플라넷 63. 갇혀있는 생물들을 보는 마음은 누구나 비슷할 것 같다. 동일시되는 순간.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마음.
빛이 나는 해파리, 무심하게 웃음 짓는 가오리, 구석에 가라앉아 있는 전기뱀장어, 뒤뚱거리는 펭귄, 이름도 어려운 수없이 많은 물고기들... 불쌍하다가도 귀엽고, 낯설기도 하고 익숙한, 또 징그럽다가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마음. 그건 분명 모순이다.
아쿠아플라넷 63은 작은 규모의 아쿠아리움이지만 가볍게 보기 좋게 꾸며져 있다. 너무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 같지 않아 부담스럽지 않다. 부담스럽지 않다니, 내 마음을 좀 더 들여다보고자 시작한 서울여행이지만 또 너무 깊숙이 샅샅이 파헤쳐보는 건 허락되지 않는 불편하고도 모순된 마음. 내 마음은 온통 너로 가득 차 있지만, 그래도 너 말고도 다른 것이 조금이나마 자리 잡고 있다는 게 미안한 걸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아쿠아플라넷 63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머메이드쇼다. 아쿠아리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것이 사람이 만들어낸 인어라니 이것 또한 모순이란 생각을 하며 쇼타임에 맞춰 중앙홀에 자리 잡는다.
쇼가 시작되기 전, 왼쪽벽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화면과 음악이 재생되고 있다. 옆의 아이가 그 벽으로 돌진하더니 신나게 몸을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부른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다. 한바탕 흥을 풀어낸 아이가 내 옆자리로 돌아왔을 때 스스럼없이 말을 건넨다.
"너 참 노래 잘 부르는구나?"
아이가 수줍어하며 엄마 품 안으로 몸을 숨긴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뜬금없이 발휘된 나의 대담함이 놀랍다. 너에게도 이렇게 떨지 않고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면.
머메이드쇼가 시작된다. 물속이지만 뭍 위로 올라온 인어처럼 목소리는 없다. 하지만 그들의 유연한 몸짓이 만드는 음파가 내 마음을 건드린다. 중앙홀의 뒷줄에 앉아있다가 앞으로 자리를 이동한다.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 가까이 보고 싶기에. 너에게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달려가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인어처럼 입을 뻥긋거려 본다.
나는 너를 생각해.
아쿠아플라넷 63의 출구는 여느 곳들처럼 역시 기념품샵과 연결되어 있다. 귀여운 인형들이 한가득이지만 아무것도 집어 들지 않는다. 너에게 말하지 못하는 내 모습처럼 꾹 눌러 참아보는 마음.
기념품샵을 나와 전망대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다. 63 빌딩의 한 층 한 층을 다 들여다보고 싶지만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 허락되는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위로 솟구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나는 네 마음의 몇 층을 볼 수 있어?
밖이 훤히 보이는 구조로 되어 있는 엘리베이터다. 같이 탑승한 커플이 무섭다는 말을 내뱉으며 서로를 껴안는다. 진짜로 무서운 걸까, 핑계 삼아 한번 안아본 걸까. 순수한 의심 뒤에 든 생각은 '나는 하나도 무섭지 않다'
엘리베이터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또 모순처럼 떠오르는 생각. 너에게도 이런 마음이면 좋을 텐데, 너를 생각하는 내 마음의 엘리베이터는 한순간에 낙하해 버릴까 두렵기만 하다. 없던 고소공포증이 갑자기 생겨버린다.
63 빌딩의 꼭대기 63 아트에서는 에릭 요한슨의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사진전을 본격적으로 감상하기에 앞서 전망대를 가볍게 둘러본다. 유리를 통해 보이는 한강은 끝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길게 펼쳐져 있다. 그리 넓지 않은 전망대이지만 높게 서면 길게 볼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너를 담은 가슴은 물리적으로 두 뼘 정도의 작은 넓이겠지만, 그 안은 층층이 쌓여 높아질 대로 높아져버렸다. 높아진 내 안에서 내려다보는 긴 마음의 끝. 널 생각하는 긴 마음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과연 끝은 있는지 이곳에서 바라보는 한강처럼 가늠할 수 없다.
강가를 따라 늘어선 빌딩들 너머 지평선이 보이고 거기 저물어가는 붉은빛의 노란 해가 걸려있다. 내 마음의 끝에도 저물어가는 무엇인가가 걸려있을까 이 마음도 언젠가는 끝이 날까 어지러운 생각을 할 때쯤 유리창에 붙어 있는 문구가 마음을 찌른다.
- 보석처럼 빛날 너를 응원해 -
그래,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니까 저기 걸린 해가 끝이 아니야.
어느새 시작된 에릭 요한슨의 사진전. Section 1은 <혼자만의 여행> / Section 2는 <내가 보는 세상> / Section 3는 <추억을 꺼내본다> / Section 4는 <나만의 공간> / Section 5는 <미래의 일상>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나를 위한 전시인 걸까. 나조차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입가에 피어난다.
둘러보던 중 하나의 사진이 꿈처럼 나타난다. 난 그 앞에 오래 머무른다. <All We Have Now>란 작품명이 붙어있다. 한 인어 커플이 노을 지는 바닷가의 바위 위에서 껴안고 있는 사진이다. 사실 그들이 인어인지, 남녀인지, 커플인지, 노을 무렵인지, 바닷가가 맞는지도 분명치 않지만 작품은 해석하기 나름이니까 내 멋대로 상상하기로 한다. 어차피 이 사진전의 주제도 상상이었으니까.
그들이 인어처럼 보인 건 아쿠아플라넷에서 보았던 머메이드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목소리를 잃고 싶지 않다. 소리 내어 너를 부르면 넌 인어가 되어 내게로 와줄까. 이 작품처럼 따뜻하게 서로를 안을 수 있을까. 그때 우리가 가진 모든 건(All We Have Now), 서로의 품이 되겠지.
에릭 요한슨의 자필 글씨로 꾸며놓은 작품도 있다. 하나하나 뜯어보다 한 구절이 눈을 사로잡는다.
- go your own roads -
난 나의 길을 가고 있다. 너로 가득 채워진 나의 길. 조금은 외면하면서, 또 조금은 깊이 침잠하면서.
나 말고도 혼자 와서 삼각대를 들고 다니며 열심히 사진을 찍는 분이 계신다. 그리고 내게로 선뜻 다가와 친절하게 정보도 알려주신다. 무슨 이유로 이곳에 와 계신 걸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는다.
그분 역시 나와 같지 않을까. 우리는 다 <혼자만의 여행> 중일 것이다.
에릭 요한슨의 사진전 관람을 마치고 나오자 전망대 카페로 통하는 길이 바로 나있고 전망이 좋은 창문이 보인다. 해가 완전히 떨어져서 야경이 눈부시게 펼쳐져 있다. 네가 참 많이도 반짝이고 있다. 음료 주문을 해야만 저 창문 옆 테이블에 앉아 밖을 볼 수 있는 걸까 생각해 보지만 보아하니 마감 무렵이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일단 발을 들여놓는다. 별 제지가 없는 것을 보니 왜 망설였나 싶다. 네게도 용기 내어 말을 꺼낸다면 왜 망설였나 싶은 일이 벌어지려나.
음료주문은 하지 않고 가볍게 둘러보니 소원엽서를 붙이는 곳이 있고 전망대를 빠져나가는 엘리베이터가 있다. 일종의 기념품샵 같아 보이지만 그냥 빠져나가기 아쉬워 소원엽서를 써보기로 한다. 자판기에서 키트를 구매하고 잠깐을 고민하다 마음을 끄적인다. 이런 곳에 소원을 적어 놓은들 이뤄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넘치는 마음을 그냥 버리는 것보다는 무엇인가에 덜어 담아보는 것을 선택한다. 마음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려나.
어쩌다 이루어진다면 그건 좋은 일일까?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나를 아래로 내린다. 밖으로 나와 다시 낮은 곳에 발을 딛는다. 고층 빌딩이 잔뜩 늘어선 골목에는 바람이 길을 가득 메운다. 바람길에 세찬 바람이 시리다.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 눈을 오랫동안 비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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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엘레베이터 (Elevator) (by ri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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