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온실
"고등학생들이 싫어하는 나무는 뭘까요?"
난센스 퀴즈다. 정답이 확실할 나무의 이름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쳐서 크게 소리 내어 외친다.
"야자나무?"
식물원 가이드가 정답!이라고 말해주는 순간 갤러리들이 우와-하는 감탄과 함께 손뼉을 친다.
몇몇 아이들과 눈이 마주치고 왠지 모를 민망함과 쑥스러움이 어깨로 밀려온다. 얌전히 있고 싶었지만 나도 모르게 외쳐버린 정답이다.
어떤 순간이 돼야 지금처럼 너에게 내 감정을 망설임 없이 뱉을 수 있을까? 너의 마음도 나와 같을 거라는, 소위 '정답'을 느끼게 되는 순간에서야 가능할까?
너는 난센스 퀴즈 같다. 내가 맞출 수 있는 확률은 조금 전과는 달리 그리 높지 않다. 네 마음의 소리가 방금의 정답처럼 내 머리를 기분 좋게 울리는 순간이 오면 좋겠다.
오늘의 갤러리는 무척 발랄하다. 정답을 맞힌 기념선물로 미니 해바라기 씨앗을 받아 들자 갤러리들이 축하의 말을 건넨다. 민망함과 쑥스러움은 어깨를 한번 으쓱하는 것으로 날려버린다.
츄파춥스처럼 막대기가 꽂혀있는 동그란 씨드볼을 가만 쳐다보며 쓰다듬어 본다. 이 씨드볼을 화분에 꽂고 물을 주면 새싹이 자라난다고 쓰여있다.
너는 싹을 틔울 수 있을까? 식물을 잘 키우지 못하고 잘 죽여버리는 습성을 가진 내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너를 흙에 심을 수 있을까?
동그란 해바라기에 네 얼굴이 스친다.
서울식물원의 온실은 거대한 유리 돔으로 되어 있는데 그 생긴 모양이 내 눈에는 마치 연꽃처럼 보인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평균온도 20~25도와 습도 50~70%를 유지한다는 유리온실은 열대관과 지중해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실에 들어오니 일단 그 높은 온도와 습도로 인해 잠깐 숨이 막힌다. 초록 식물이 그득한 곳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 게 좀 아이러니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온실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인공적인 공간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왠지 모르게 숨이 조금 트인다.
어느 식물원의 실내 온실에선 진짜 직박구리가 살고 있다는 것을 어느 블로그에서 본 적이 있지만
이곳은 어떤지 모르겠다. 일단 지금 사방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동물 울음소리는 가짜다. 이런 모순에도 불구하고 이곳을 찾은 이유는 지금의 내가 온실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겨울이 존재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자생하지 못하는 식물들을 온실에서 키워내듯 내 마음에 온실을 만들어 그 안에 온갖 감정을 키워내고 있다. 내 마음 밖, 입 밖에서는 살아내지 못하는 그 많은 감정이 수많은 꽃말, 식물에 얽힌 이야기들처럼 내 안에 잔뜩 담겨 있다.
때문에 나는 생명이 가득한 온실에서 모순되게도 가끔 숨이 막힌다.
하지만 한줄기 숨이 트이는 이유는 꽃이 피는 데 중요한 것이 낮이 아니라 밤의 길이라는 명제 때문이다. 밤의 길이가 길어야 꽃이 피는 식물에 잠깐의 섬광을 주면 그 식물은 꽃을 피우지 못한다. 개화에 중요한 건 지속적인 암기다. 나는 지금 밤을 지나고 있다. 이 기나긴 밤을 지나면 언젠간 나도 꽃을 피울지 모른다.
열대식물은 꽃을 많이 피우지 않는다고 한다. 크기는 크지만 적게 피운다. 꽃을 피우는 이유는 열매를 맺고 번식하기 위해선데 열대지방의 식물들은 대부분 삽목이 가능하기 때문에 개화가 적어도 번식이 가능하다고 한다.
나도 꽃을 피우지 않더라도 뻗어나가는 힘을 키워야겠다고, 그러다가도 꽃을 피우면 크고 아름답게 피워보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면 너도 나비처럼 곤충처럼 나를 찾아와 머무르겠지.
온실의 식물들을 너를 대하듯 차분히 본다. 식물원의 식물들은 만지면 안 되기 때문에 눈으로 본다. 그리고 가끔 냄새를 맡는 정도로만 가까이 간다.
스트렙토카르푸스 삭소롬, 프테리스 크래티카, 카틀레야 막시마, 네프로레피스 팔카타, 에피프렘넘 아우리움, 오크나 키르키.
모르는 식물들의 이름이 태반이다. 아는 식물은 코코넛 야자, 용설란, 스킨답서스, 선인장, 올리브 나무, 바오밥 나무, 로즈메리나 유칼립투스 같은 몇 개의 허브 정도에 불과하다.
나는 내 마음의 온실에서 자라나는 너에 대한 수많은 감정에 다 이름 붙이지 못했다. 밉게 생긴 감정에도 용케 자라난 생명력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하나하나 이름 붙여보아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식물과 교감하는 방법의 하나는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라 했다. 그러니까 나도 잘 모르겠는 감정들에 새로운 이름을 붙여 깊은 곳에 숨어있는 나와 만나봐야겠다.
지중해관 한편에는 가드너의 공간이 꾸며져 있다. 그 안에는 현미경, 비커, 장화 그리고 곤충 표본도 있다. 온실에도 계절이 있다. 아무리 인공적으로 높은 온도와 습도를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외부의 영향을 받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식물원의 초창기나 새로운 식물을 심을 때면 자리를 제대로 잡지 못한 식물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생육환경이 다른 식물들을 한 곳에 모아놓았기 때문에 각 식물에 맞게끔 햇빛을 적당히 잘 받아야 웃자라거나 하지 않는다.
해충관리도 끊임없이 이루어진다. 바람도 중요하다고 하는데 사방이 막힌 온실에서 바람의 조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르겠다. 돔의 뚜껑이 열리기라도 하는 걸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어쨌든 온실의 식물들은 가드너의 손을 많이 필요로 한다.
나는 식물에 있어선 똥손 중에 똥손, Black Thumb이다. 가드너의 재질은 1도 없다. 그런데도 어떻게 내 마음의 온실에 수많은 식물을 키워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그 수많은 감정은 다 잡초들인가 보다. 밟혀도 죽지 않고, 뽑아도 또 자라나는.
아까 했던 다짐을 한 번 더 한다. 이 이름 모를 잡초들에 하나하나 꼭 이름을 붙여야지. 그런 후라면, 넌 내 마음의 온실 정원사가 되어 내 마음을 부르고 어루만져 줄까. 그런 상상을 하며 잠시 기지개를 켜고 고개를 든다. 높이 자란 수목들 사이 유리 온실을 통과한 햇빛이 식물들의 잎에 아름답게 부서진다.
온실의 하이라이트, 스카이워크를 걷는다. 키가 큰 식물들의 잎과 열매를 가까이서 볼 수 있어 공중정원의 느낌이 난다. 아래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경험을 하는 순간이다. 바나나도 더 가까이서 보고 야자나무의 펼쳐진 잎을 위에서 구경한다. 수련이 있는 연못도 스카이워크에서는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관람객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온실을 구경하고 있는 관람객들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몽글몽글한 마음이 피어오른다. 언젠가 너도 이 풍경을 같이 보지 않을래?
온실을 나와 씨앗도서관으로 향한다. 서울식물원의 씨앗도서관은 가기 전부터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는 곳이었다. 씨앗을 대출해 주고 그 씨앗을 심어 식물을 키워낸 후 얻게 된 새로운 씨앗을 반납하면 된다. 어떤 씨앗들이 있을까, 나도 씨앗을 대출받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어떤 씨앗을 만나게 될까 궁금해하며 씨앗도서관에 들어선다.
대출코너 직원의 표정이 어쩐지 심드렁해 보인다. 그 마음을 가늠해 보려 쓸데없을지도 모를 상상을 펼쳐본다. 심심해서? 씨앗을 대출만 해가고 반납하는 사람은 없어서 실망했나? 아니면 그 역시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을까? 마음에 상처를 입었나?
모든 건 다 내 마음의 반영이라는 생각을 하며 대출 목록에 있는 씨앗들의 정보 파일을 살핀다. 그리고 다시 씨앗 자체에 몰두한다.
강낭콩, 완두, 토종배추, 옥수수, 아욱... 모두 16개의 대출 가능 씨앗이 난이도 상중하의 목록으로 나뉘어 있고 현재 파종 적기인 씨앗들의 이름 앞에는 초록색 하트 스티커가 붙어 있다. 그리고 옆 테이블에는 각각 씨앗의 식물 정보가 상세히 담긴 파일들이 있다. 그 파일들을 하나씩 넘기며 신중히 씨앗을 골라본다. 천천히 읽다 맨드라미 페이지에서 눈길을 멈춘다.
꽃은 수탉의 볏을 닮았고 붉은 꽃은 타오르는 듯하며 차로도 마실 수 있다고 적혀있다. 난이도는 '하'다. 마음이 간다. 대출 코너로 가서 맨드라미 씨앗을 요청한다. 약포지에 담긴 맨드라미 씨앗이 건네진다. 소중히 받아 한참을 들여다본다. 온실에서 퀴즈의 정답을 맞힌 기념으로 받은 미니 해바라기를 볼 때처럼.
내 손으로 키워낼 수 있을까? 내 마음처럼 불타는 모양의 붉은 꽃을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너의 새로운 씨앗을 받아 이곳으로 너를 다시 돌려보낼 수 있을까? 아니면 넌 영영 이 약포지에서 나오지 못한 채 갇혀 있게 될까?
씨앗도서관에서 복잡한 마음을 지닌 채 나와 걷는다. 서울식물원에서의 마지막 행선지는 튤립정원이다. 지금 서울식물원에서는 튤립전이 열리고 있다. 실내에서는 튤립 사진전이, 밖의 호숫가 근처 정원에서는 지금 막 개화하기 시작한 생생한 튤립들을 만나볼 수 있다. 튤립 정원을 가기에 앞서 기념품샵에 들러 튤립 도감을 구입한다. 그리고 튤립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곳까지 걸으며 도감을 빠르게 훑는다. 내가 찾는 튤립이 있다. 너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조금은 특별한 튤립. 그래서 수많은 식물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단연코 오늘 무대의 주연은 그 튤립이다.
하지만 도감 어느 페이지에서도 특별한 기억이 있는 그 색다른 모양의 튤립은 찾을 수가 없다. 튤립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곳에서도 그 튤립의 사진은 찾을 수가 없다. 점점 커지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뒤로 하고 건물 밖으로 나온다. 나는 그 튤립을 실제로 보고 싶다.
식물원 곳곳에 정말 많은 튤립이 심겨 있다. 아직 개화하지 않은 튤립도 있다. 튤립과 팻말 모두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사진을 찍는다. 특별한 그 튤립을 만나길 기대하면서.
식물원의 모든 튤립을 다 본 것 같다. 어느새 식물원 폐관 시간이 가까워져 출구로 향한다.
희망을 놓지 않고 마지막까지 샅샅이 튤립밭을 살핀다. 하지만 그 튤립은 나에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내가 찾는 색깔과 무늬를 가진 튤립이 없다.
그 튤립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까? 너와의 이야기를 품은 그 튤립 사진은 사람이 만들어낸 가짜 사진이었을까? 나는 존재하지 않는 튤립에의 기억을 부질없이 안고 있는 걸까? 너와의 특별함을 담은 튤립의 기억은 내 눈앞의 실재가 되길 거부하는 걸까?
수많은 생각들을 하며 지하철에 오른다. 자리에 앉아 다시 한번 튤립 도감을 살피지만 다시 한번 없다.
한숨을 쉬다 문득 개화하지 않은 튤립들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 다른 튤립들 사이에서 꽃 피울 거야.
돌연변이라 할지라도.
그게 단 한 송이일지라도.
그렇게 내 마음의 온실에 튤립 한 송이를 심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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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화분 (by 러브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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