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듬, 우리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동화된 마음, 감정의 전이. 내 마음에서 네 마음으로. 네 마음이 곧 내 마음인 것을. 나의 것과 너의 것이 다르지 않음을. 그것은 우리가 된다.
내가 아닌 우리, 네가 아닌 우리. 우리라는 말만큼이나 가슴을 울리는 것이 또 있을까.
우리소리박물관에는 어떤 감정들이 품어져 있는 걸까.
라디오가 켜져 있을 때면 자주 듣게 되는 프로그램이 있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1991년, 이 코너는 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었지만 지금도 송출을 이어오고 있다. 방송에서 소리가 흘러나올 때면 어김없이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 시간에는 차 안에서의 대화가 자주 멈추곤 했다. 늘 비슷한 가락이어도 우리 소리가 주는 강도는 꽤 세다. 무엇을 할 때 부르던 소리였는지 마지막 멘트를 늘 귀담아 들었다. 그리고 그 후엔 항상 사랑에 관한 소리를 생각했다.
“이 소리는 짝사랑하는 이가 님을 그리며 부르는 소리입니다.”
이런 것에 대한 기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사랑을 노래하는 소리는 언제나 기다려졌다. 하지만 들어본 적은 없다. 내 기억 속엔 존재하지 않는다. 언젠가는
나온 적도 있으려나.
버스 안에서 박물관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많은 자료들을 다운로드할 수 있어 실컷 저장을 한다.
우리 소리 음원도 꽤 있다. 하나씩 꼭 다 들어봐야겠다. 듣다 보면 네가 떠오르는 그런 소리를 찾게 될 수도 있겠지.
창덕궁 정류소에서 내려 맞은편으로 건너간다. 우리소리박물관의 외관은 매우 깨끗한 이미지의 아담한 느낌을 주는 한옥 건물이다. 내부로 들어가니 한옥의 누마루가 주는 예스러움에 현대적인 분위기가 묘하게 섞여있다. 꽤 최근에 개관한 박물관이기 때문일까.
본격적인 관람을 시작하기 위해 코너를 돈다. 맨 처음 맞닥트린 전시는 2020 조영배 기증 제주민요 특별전이다. 꾸며진 모습을 보니 왜 현대적인 분위기가 풍기는지 알 것 같다.
세워져 있는 벽마다 가사와 영상을 보고 음원을 들을 수 있도록 되어있는데 디자인은 모던한 세련미가 있고 청취기능과 영상기능시설은 직관적으로 깔끔하니 매우 훌륭하다. 컵처럼 생긴 수신기들이 자석처럼 벽에 붙어있다. 수신기를 떼어 귀에 대어 보니 음질도 꽤 좋다.
<오돌또기>를 들으며 앞에 붙어있는 가사를 본다. 사랑노래다! 제주방언이라 정확히 모르는 단어들이 많지만 느낌이 전해져 온다.
/ 둥그대당실 둥그대당실 너도당실 연자머리로 달도 밝고 내가 머리로 갈까나 /
이 부분이 많이 반복되고 있다. 연자머리는 뭘까? 연자를 검색한다. 연꽃의 열매? 윤기가 있는 푸른빛을 띤 검은색의 제빗과의 새?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 어쩐지 푸른빛이 도는 검은 머리를 둥근 열매처럼 틀어 올린 모습이 떠오른다.
너는 어떤 헤어스타일을 좋아하려나.
다음 벽에서 <너영나영>을 듣는다. ‘너하고 나하고’라는 의미로 ‘함께 어울린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 너영나영 두리둥실 놀고요 낮에 낮에나 밤에 밤에나 쌍사랑이로구나 /
이것도 사랑노래다! 너랑나랑 두리둥실 놀고 낮에나 밤에나 쌍사랑이라니. 쌍사랑이라니! 짝사랑 아니고 쌍사랑이라니. 좋다. 이때쯤 되니 비로소 어떤 소리를 찾아 이곳에 왔는지 정확히 알게 된다. 내 마음의 반영을 만나고 싶은 거다.
<해녀 노젓는 소리>나 <밭매는 소리>도 좋지만 결국엔 사랑노래를 듣고 싶은 거다. 세상에 흔해빠진 게 사랑 노래지만 결국엔 또.
상설전시장은 지하 1층에 마련되어있어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이 꽤 깊다. 밖에선 볼 땐 건물이 아담해서 전시공간이 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지하 2층까지 꾸며져 있는 것을 보니 건물을 매우 잘 활용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 마음이 지하로 내려가더라도 괜찮다. 네가 날 알아주지 않더라도. 깊게 깊게 마음에 구덩이를 파고 끝없이 가라앉을 때가 많아도.
보다 깊고 보다 넓은 곳에선 나의 내면을 잘 들여다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심연을 들여다보다 보면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소중하니까. 나를 망가트리고 싶진 않다. 너도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사람을 만나고 싶진 않겠지. 나는 조금 더 나 자신을 아껴야 한다. 그게 잘 되지 않더라도. 자주 상처 입는다 해도.
상설전시장 앞에 마련된 3개의 키오스크를 통해 기증자 소개 영상과 400여 편의 우리 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다. 전인평 선생님의 인터뷰 영상 중에 ‘귀맛’과 ‘시김새’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을 유심히 본다.
시김새는 전통음악에서 선율을 이루는 골격음의 앞이나 뒤에서 해당 음을 꾸미는 장식음이나 음길이가 짧은 잔가락, 올라가는 음, 내려가는 음, 꺾어지는 음을 가리키는데 이 시김새를 잘 들으면 우리 음악의 멋을 잡아낼 수 있다. 소리의 맛을 드러나게 하는 것, 사람의 취향을 잘 담아내는 것. 시김새는 노래하는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표현되는데 사람의 말투 같은 것이라고 한다.
너의 노래하는 모습은 본 적 없지만 말하는 모습을 떠올려본다. 조금은 시니컬하면서 단호하고 가끔은 머뭇거리며 늘어지기도 하는 말투. 너의 말소리를 듣고 있으면 유쾌하고 웃음이 난다. 약간의 호탕함과 짧게 탁 하고 터지는 경쾌하고 높은 웃음소리도 좋다.
너의 시김새. 기분 좋아지는 너의 말투와 웃음소리. 내가 널 좋아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나만의 느낌일 뿐일지라도 그게 너의 멋이다. 너의 목소리를 많이 듣고 싶다. 귀맛이 좋으니까.
이 키오스크에서 왠지 내가 찾는 민요를 들어볼 수 있을 것 같아 음원들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우선 제목과 노래의 소개글을 훑은 다음 끌리는 음원을 들어보는 것을 빠르게 반복한다. 그러다 한 소리의 제목이 눈에 띈다.
<너녕나녕>
1층에서 들었던 <너영나영>과 비슷한 제목인데 역시 같은 제주도 민요다. 4분 19초의 우리 소리를 들으며 가사를 본다. 듣고 있자니 <너영나영>이 쌍사랑을 노래한 둘의 이야기라면, <너녕나녕>은 그 둘 중 하나를 떠나보낸 남은 하나의 외로움을 노래한 것 같다. 묘하게 다른 느낌도 든다. 쌍사랑을 지켜보는 다른 한 사람의 마음, 그러니까 짝사랑하는 이의 심정을 노래하고 있는 것도 같다. 아마도 나의 마음이 투사되었나 보다.
/ 질투를 하여서 무엇을 하리요 /
/ 짝 없는 기러기 강가에 홀로 놀고 임 없는 이몸은 요 방안에 논다 /
그리고 특히 내 마음을 울리는 부분이 있다.
/ 가는 임 허리를 두리덤썩 안고요 가지를 말라고 감돌아든다 /
너의 허리를 감싸 안고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상상을 한다. 가지 말라고. 가슴 한편이 아려온다.
상설전시실은 다녀본 박물관 중에 시설과 아이디어가 가장 좋다. 구역별로 설명보드의 QR을 찍으면 더 자세한 설명이 담긴 유튜브 영상과 연결이 되고 우리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한 방법에도 여러 가지 첨단 기법이 사용되었다. 장식장의 서랍을 열면 소리가 나오기도 하고 그림이 있는 벽면을 터치하면 우리 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그림과 가사를 볼 수 있게 해 놓았다. 또 키오스크도 잘 되어 있다. 하나씩 빠짐없이, 조금씩 다 들어본다. 그러다 너에게 들려주고 싶은 소리를 하나 발견한다.
/ 금을 주니 너를 사랴 은을 주니 너를 사랴 자장 자장 우리 애기 잘도 잔다 /
일종의 펌프 게임 같은 ‘장단의 달인’ 체험 코너에선 제일 느린 단계의 세마치장단을 골라 기세 좋게 덤볐지만 51점을 받았다. 하지만 조이트로프 입체 영상코너에 마련된 퀴즈는 다 맞춰서 신나는 축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다시 1층으로 올라와 누마루의 조그만 테이블에 앉는다. 창덕궁을 바라보면서 우리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터치스크린과 수신기 시설이 되어있다. 오늘의 관건은 스피드. 역시나 빠르게 가사를 훑으며 음원을 조금씩 들어본다. 그러다가 <나나니타령>에 꽂혀 8분의 소리를 두 번이나 듣는다. 발까지 까딱거리면서.
지하 1층 상설전시관 앞 키오스크에서 들었던 <나나니타령>과 가사는 같지만 장단이 달라 무척 경쾌하다. 물바가지 장단, 참 좋다. 같은 가사인데도 신세한탄에서 벗어난 경쾌한 사랑노래가 되다니.
2022년 특별전 <ARARI : 우리의 삶이 아리리요>가 열리고 있는 별채로 이동한다. 사랑뿐만이 아니고 다양한 삶의 모습을 노래한 아라리가 정말 많기도 하다. 가사가 지닌 감정과 의미에 따라 노랫말을 주제별로 나누어 작은 공간에 잘 전시하고 있다. 음원도 들어볼 수 있다.
역시나 난 사랑을 노래한 아라리 코너 앞에서 한참의 시간을 보낸다. 아라리만큼 아름다운 선율이 또 있을까.
아리랑. 아리랑 고개. 아라리. 곱고 그리운 님이 고개를 넘어간다.
네가 어떤 방식으로든 내 삶에서 떠나간다면. 그렇다면 나는.
/ 당신이 내 속 썩는 걸 요다지도 모르거든 앞 남산 봄 눈 썩는 걸 건너다가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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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Reflection (by Minit, AVOKID (에이보키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