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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서울 284

역사(歷史)와 역사(驛舍)

by 미하

“서울역에서 만나.”


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들어본 적 없지만 달콤할 것이 분명한.


전철에 실려 떠내려가다 도착한 곳은 서울역. 비둘기 떼를 뚫고 구 서울역사인 문화역서울 284에 들어선다. 신, 구 두 서울역은 서울의 중심인 용산구와 중구의 경계에 있다. 현 서울역은 용산구에, 구 서울역은 중구에 속해 있는데 보이지 않는 금이 같은 이름의 두 역을 가로지르고 있다. 현재 활발히 역사의 역할을 수행 중인 현 서울역과 구 서울역의 북적거림을 고스란히 기억한 채 문화복합공간으로 태어난 문화역서울 284. 284라는 명칭은 서울역의 사적 번호에서 따왔다고 한다.

서울역은 명실공히 만남과 떠남의 설렘을 간직한 살아있는 장소이고 문화역서울 284는 과거의 그 모든 감정을 모두 품은 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공간이다.


서울역은 단순한 기착지만은 아니었다. 신문화를 제일 먼저 경험하기도, 구시대를 떠나보내기도 한 문화의 용광로였다. 그러한 유전자를 증명이라도 하듯 문화역서울 284에서는 생활상, 건축, 교통에 대한 해설을 비롯하여 각종 체험프로그램과 전시가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이곳이 나를 이끌었다. 너를 생각하는 마음의 중심에서는 떠남과 머무름의 기차가 내 하나의 이름 아래 쉴 새 없이 기착하고 있다. 과거의 추억에 젖어 머무를까, 미래를 향해 떠날까 갈팡질팡 경계를 넘나들면서.

티켓을 끊을지 말지도 고민하고 있다. 목적지를 정하지 못한 탓이다. 이게 나의 현재다. 내가 용기를 낸다면 우리도 여기 서울역에서 만나 어디론가 떠날 수도 있지 않을까.

남북이 통일된다면 베이징이나 시베리아까지 열차가 계속해서 달릴 수 있듯이 너와 나의 마음이 이어진다면 우리는 아주 멀리멀리까지 가서 세계를 일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가 타는 열차는 모든 추억의 정거장을 다 멈췄다가는 느리디 느린 비둘기호일 수도, 단숨에 냅다 달려버리는 특급 급행열차일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떤 열차를 좋아하게 될까.

사실 어느 종류의 열차라도 상관은 없다. 객실도 마찬가지다. 삼등실이어도 입석이어도, 함께라면 거기가 귀빈실일 테니까. 조금 늦어도 괜찮다. 출발 시간은 정해져 있지 않으니까.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내게로 티켓을 든 네가 다가오는 상상을 한다. 사실, 용기는 왜 나의 몫일까 하는 원초적 궁금증이 있긴 하지만 그건 아마도 너의 마음보단 나의 마음이 조금은 더 크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너도 나와 똑같은 마음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가슴에 역사를 품고 있다.


지금 문화역서울 284에서는 <사물을 대하는 태도>라는 체험 프로그램이 진행 중인데 청자 컵과 전통 한지를 만들어볼 수 있다. 먼저 오래전에 예약해 놓은 부안관요에서 진행하는 도자기 체험 코너로 간다. 벌써 꽤 많은 사람이 옹기종기 테이블에 앉아있다. 나도 한자리를 차지하고선 공간을 은은히 메우고 있는 흙냄새를 맡는다. 체험은 약 20분가량이 소요된다고 했는데 컵이나 그릇을 만들어 무늬를 새기면 가마에서 청자로 구워지는 과정을 거쳐서 한 달 후에 배송이 된다고 한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건 나뿐만이 아니란 생각을 하는 찰나 흙 한 덩이가 앞에 놓인다. 밑바닥을 만드는

것부터가 시작인데 너무 얇지 않게 평평하게 펴는 것이 1단계다. 그래, 뭐든지 바닥부터 시작이다. 내 마음이 어떤 형상으로 나오는지 한번 빚어내 볼까?


한쪽만 두꺼워도 안 되고 균일하게 두드려야 한다. 너무 얇으면 구멍이 생길 수 있다는 소리에 소심하게 두드리자 그것보다는 좀 더 세게 두드려도 된다고 강사님이 조언한다. 매사에 너무 조심인 것이 티가 난다. 꽤 두드리다 보니 이 정도면 됐다 싶다. 수강생들이 어느 정도 바닥을 다 만들자 이번에는 흙이 세 덩이 전달된다. 이제 몸통을 만들 차례다. 세 개의 흙덩어리를 얇은 가래떡처럼 밀어 벽을 삼단으로 올려야 한다. 긴 점토의 끝과 끝을 이어 바닥에 붙인다. 1단을 하고 나면, 2단과 3단은 올리는 방법이 같다. 바닥부터 시작인 것과 마찬가지로 뭐든지 기초공사가 중요하다.

꾹꾹 누르는 과정에서는 기포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주문이 들어온다. 기포가 생기면 도자기가 가마 속에서 깨지면서 다른 도자기까지 망치는 이유에서다.

너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관계의 기초가, 처음이 잘못될까 싶어 조바심이 나지만 애써 차분함을 유지한다. 가마 속의 불량 도자기처럼 너와 관계한 나의 한 부분이 깨지면 나의 또 다른 부분도 망가져 버릴까. 그렇기에 다치지 않게 조심, 또 조심.


손에서 나온 열기로 인해 흙이 마르지 않도록 너무 만지지 않는다. 너무 만지지 말라는 말에 살짝 뜨끔하다. 너무 만져만 대고 미적거리다 마음이 다 말라버릴까 봐 두렵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빠르게 만진다. 단을 꽤 잘 쌓아 올렸다.


이제는 물레 타임이다. 물레를 돌려보는 것에 엄청난 환상이 있었지만, 이번 체험에서는 그것을 해볼 수 없다. 중심을 잘 잡아야 하는데 살짝 뒤틀리거나 힘을 조금만 잘못 주어도 쉽게 망가져 버리고, 한번 망가지면 원상복구를 시킬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레는 강사님이 돌리고, 나는 그릇을 만들지, 컵을 만들지만 정하면 된다. 실패해도 좋으니 물레를 한번 돌려봤으면 싶다.

나의 현실은 물레를 돌리는 일처럼 선생님이 대신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실패해도 좋으니 한 번 만이란 말을 쉽게 할 수 없다. 물레를 돌리고 싶다면 실패를 감내하는 용기를 가지고 현실에 도전해야 한다.


강사님이 물레를 돌린다. 순식간에 컵의 모양이 만들어진다. 모든 것은 순식간이다. 잠시 손을 대 보는 것은 허락되었다. 돌아가는 물레 위에서 흙을 어느 정도의 힘으로 만지는지 느낌만 가져본다. 손에 물을 적셔 손으로만 살짝 감싸듯 한다.

너무 조심스러워하자 조금 더 만져봐도 된다는 말이 들려온다.

그래, 조금은 더 다가가도 돼.

손에 묻은 흙을 물에 적신 스펀지로 씻어내는데 왠지 눈가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든다.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슬쩍 바라본다.


마지막 단계로 컵에 무늬를 새겨 넣는다. 너의 마음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면 하는 마음으로 고래의 꼬리와 하트를 닮은 튤립을 그려 넣는다. 선이 들어간 곳의 색깔은 좀 더 진한 색이 나온다고 한다. 너무 얇지도 너무 깊지도 않게 구멍이 생기지 않도록 힘 조절을 해가며 집중해서 무늬를 판다. 그러고는 한 달 후에 받을 배송지를 적어 전달한다. 가마에 들어간 도자기의 완성률이 20%가 안 된다고 하는데 내 도자기는 완성이 되어 나올지 궁금하다. 그리고 청자의 푸른빛도.

한 달 후의 마음은 어떤 모습일까.


전통 한지 뜨기 체험은 바로 옆 공간에서 이뤄지고 있다. 도자기 만들기가 끝난 사람들이 한지 뜨기도 체험해 보기 위해 줄을 서 있다. 나도 천천히 줄 끝으로 가 차례를 기다린다. 체험에 긴 시간이 드는 것이 아니라서 사람들이 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자니 대기줄은 금방 줄어든다.

물이 가득 든 커다란 사각의 통에 하얀 건더기 같은 것이 풀어져 있다. 한지는 닥나무 껍질을 원료로 만든다고 했으니 아마도 저건 닥나무 껍질인 모양이다. 보통 사이즈의 도마보다 살짝 큰 정도의 네모난 나무틀 위에 대나무 발이 얹혀 있다. 그리고 그 틀을 닥나무 껍질(아마도)이 가득한 물속에 살짝 담갔다 꺼내어 좌우로 흔드는 방식을 취하는데 12번 정도 반복한다. 물의 촉감이 린스나 섬유유연제를 풀어놓은 것과 비슷하다. 흔들면서 담갔다 꺼내길 반복할 때마다 대나무 발 위에 하얀 껍질이 조금씩 얹힌다. 어느 정도의 두께가 되면 이걸 떼서 말리는데 그러면 우리나라 고유의 창의적이고 독특한 종이인 한지가 되는 것이다.


80도 정도의 경사가 있고 뜨거운 열기가 나오는 철판 위에 젖은 종이를 붙여 말린다. 내가 만든 종이가 말라가는 것을 보고 있자니 한지 만드는 과정이 마치 흐릿하고 조그만 마음의 조각들이 점차 쌓여 커다랗고 진한 하나의 마음이 만들어지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거의 직각의 철판 벽에 물의 힘으로만 붙어 있는 한지를 보니 떨어질까 위태로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저건 꽤 안정적이다. 꼭 요즘의 나처럼.

위태로움과 안정감이란 전혀 다른 성질의 감각이 내 안의 저울 양쪽에서 흔들리면서 팽팽하게 무게를 맞춰가고 있다. 문제는 흔들림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한지처럼 12번 정도만 흔들리다 멈추면 좋을 텐데.


내가 만든 종이가 다 말랐다. 투명한 비닐에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히 넣는다.

한지의 다른 이름인 백지는 닥종이로 만든 흰 종이라는 뜻과 함께 한 장의 종이를 얻고자 99번 장인의 손이 가고, 사용하는 사람의 손이 마지막 100번째를 채운다는 의미를 가진다고 한다. 이 종이에 너를 그려 채워 넣는다면 이 종이는 또 다른 이름을 얻게 될까.


문화역서울 284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시들도 마저 다 둘러보고 문을 나선다. 뒤돌아 올려다보니 서울역의 상징인 건물 벽의 큰 시계가 단연 눈을 사로잡는다.

한국전쟁 시기에도 역무원들이 시침과 분침까지 다 분해해서 피란길도 함께 떠났을 정도로 소중히 여겨진 서울역의 산증인. 이 시계는 그 당시만 빼고는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나도 이처럼 소중히 여겨지고 싶다. 그리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그 에너지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발걸음을 뗀다.


“서울역에서 만나.”


내 안에서 너에게로 흐르는 시간의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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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바람이 불어오는 곳 (by 김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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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