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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내 마음의 주권자

by 미하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조금 걷다 보니 눈앞에 국회의 쪽문 하나가 보인다. 보안 시설이 있는 것을 보니 아무나 쉽게 통과할 수 있는 문은 아닌 것 같다. 문 바로 너머가 오늘의 첫 목적지인 국회박물관이다.

잠시 머뭇대고 있는데 국회의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카드를 찍고 보안문을 통과한다. 그리고 마침 그 옆으로 국회방문객은 1, 2, 3, 6문으로 가라는 작은 안내 문구가 눈에 띈다.

나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문이다. 입구가 어디지? 걸어온 길의 반대방향으로 걸어야 하나, 걷던 방향으로 직진해야 하나 고민하다 그냥 앞으로 걷는다. 조금 더 걷자 경찰관들이 지키고 있는 큰 문이 나타난다. 국회 1문, 정문이다.

‘모르겠을 땐 너무 망설이지 말고 그냥 직진!’ 이 오늘은 통한다.

너에게도 그냥 직진?


신분증 검사 없이 1문을 통과해서 오른쪽으로 꺾어 계속 걷는다. 국회박물관은 구석에 위치해 있다. 국회의사당 관람에 앞서 국회박물관에서 국회체험을 예약해 두었다.


안내데스크에서 예약사항과 신분증 확인을 받고 방문객 목걸이를 목에 건 후 사람들과 함께 체험관으로 가는 계단을 오른다. 직원이 체험관의 문을 열자 국회의사당의 본회의장이 나타난다. 축소판이지만

공간이 꽤 넓다. 미니 국회의원석에는 전원이 들어와 있는 터치스크린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다.

모니터에 시선이 가 있는데 앞 무대를 가리고 있던 거대한 스크린이 위로 올라가고 의장석이 나타난다. 체험에 앞서 잠시 의장석에도 올라가 본다. 포토타임이 끝나면 국회 본회의의 전자투표를 모의로 체험해 볼 수 있다. 어떤 법안이 상정될지 궁금하다. 스크린이 다시 내려오고 영상으로 모의 본회의가 시작된다.


국회의 가장 큰 기능 중의 하나는 입법이다. 상임위원회와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각종 법안들이 국회의원들의 토론과 투표를 거쳐 법률로 제정된다.

모의 본회의에 <보행 중 스마트폰 사용제한에 대한 법안>, <야간시간 층간소음 방지 법안>, <일회용품 사용규제에 관한 법률 일부 개정안>이 차례로 상정되고 반대의견토론과 수정안도 발표된다. 수정안이 나온 경우는 원안과 수정안 모두에 투표한다.


모의라지만 꽤 진지한 마음이 든다. 각 법안의 투표가 끝날 때마다 의장석 양쪽 벽의 거대한 전광판에 찬성과 반대인원이 즉각 표시된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꽤 큰 법안들도 발의되고 과반수 찬성으로 가결되기도 하는 것을 보니 새삼스럽다. 나는 반대표를 던졌는데 가결이 되는 때는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지기도 한다. 모의로 체험해 보는 것에도 이런 기분이 드는데 국회의원들이 허구한 날 치고받고 싸우는 것이 이해가 가기도 한다. 아주, 아주 조금은.


나와 같은 의견이 여럿 모여 법안이 되고 실제로 입법이 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사회질서를 수립한다는 정의로운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하고 자칫 지나치면 전지전능한 기분이 들 것 같기도 하다.

순간 이상한 기분에 번뜩 휩싸여 나 같은 인간의 처우 개선을 위한 법안을 마구 생각해 낸다.


지나친 두근거림을 방지하기 위한 카페인 일일 섭취 제한법, 사랑에 고민하는 자와 실패자를 위한 주류할인법, 짝사랑 제조일자와 유효기간 제정에 관한 법률, 균형 잡힌 마음 건강을 위한 상담쿼터제, 너덜너덜해진 심신의 재활을 위한 의료법과 재건 교육에 관한 법률, 안락한 기억삭제법, 추억기념관 설립법... 허무맹랑한 법률이 멋대로 쏟아진다.

“싹 다, 죄다 가결되었습니다. 이상 산회를 선포합니다. 땅땅땅!”


국회박물관의 전시실을 지금 둘러보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한 달 전에 예약한 국회의사당 관람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우선 국회참관을 끝내고 다시 돌아와야겠다.

박물관의 안내데스크 직원에게 국회의사당의 위치를 물어보는데 국회참관객은 의사당 뒤쪽의 3문을 이용해야 한다는 팁이 돌아온다. 미리 물어본 일은 잘한 일이다.

박물관을 나와 약 1km 정도 떨어져 있는 의사당 건물을 찾아 걸어가는데 약 십 분이 소요되었다. 국회의사당이 꽤 커서 들어가는 문의 위치를 알고 있지 못했더라면 참관 시간에 늦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헤매지 않고 한방에 입구를 찾은 덕에 옆의 국회셔틀버스 정류장에서 국회 캐릭터인 사랑이와 희망이의 사진도 놓치지 않고 찍는다. 포돌이처럼 유명해지려면 분발 좀 해야겠다. 사랑이, 희망이.


국회의사당으로 들어와 검색대를 통과하고 접수확인 후 줄에 선다. 방문객 중에는 외국인도 많고 단체관람도 몇 팀 있다. 4층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국회의장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이 들린다. 나는 온통 딴생각-법률 제정-을 하느라 놓친 순간이다.


참관석에 들어서자 500평 규모의 큰 본회의장과 마주한다. 웅장해서인지 거리감각이 없어진다. 의장석 뒤쪽에 걸려있는 국회의 상징 국회휘장은, 작아 보이지만 지름이 2.6미터, 무게는 1.5톤이나 나간다고 한다.

참관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본회의장을 꼼꼼히 둘러본다. 참관객이 방문하는 시간에는 본회의가 없지만 국회의원석의 명패와 터치스크린 모니터에 전원을 켜 놓는다. 내가 좋아하는 국회의원의 자리도 눈에 띈다.

국회의원의 자리는 자유석이 아닌 지정석이다. 국회의장석을 기준으로 의석수가 제일 많은 정당이 가운데에, 그다음 정당이 오른쪽, 그 다음다음 정당이나 무소속 의원은 왼쪽에 위치한다. 가장 왼쪽의 색깔이 다른 좌석은 국무총리나 각 부처의 장관들이 앉는 국무위원석이다.

같은 교섭단체 내에서는 관례적으로 같은 상임위원회 소속 의원들끼리 가까운 자리에 배치하며 3번 이상의 다선 의원들은 보통 뒤쪽에 앉는 경향이 있다.


심장이 두 개의 심실과 두 개의 심방으로 이루어져 있듯 너의 가슴에도 구역이 있다면 나는 가운데의 뒤쪽에 자리하고 싶다. 회의장 좌석배치처럼 네 마음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한, 그러니까 선거에서처럼 계속해서 여러 번 선택당한 사람이고 싶다.

내 마음의 주권자는 내가 아닌 너인 걸까.

아무튼, 의장은 되고 싶지 않다. 내리 9선을 하더라도. 의장이 되면 소속 정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이 되어야만 하니까. 당적을 버리지 않아도 되는 부의장 정도는 괜찮겠다.

나는 너에게 속하고 싶다.


본회의장 양쪽 전면에는 233인치 초대형 전광판이 걸려 있다. 체험관 전광판의 두 배는 거뜬히 넘어 보인다. 전자투표를 하면 어떤 의원이 어떤 법률안에 대해 찬성하고 반대했는지 이 전광판에 결과가 모두 기록되는데, 이 표결현황은 여기뿐 아니라 국회 공식사이트와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국회의 투표는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같은 인사에 관한 안건이나 국회에서 실시하는 국회의장 등의 선거, 그리고 대통령으로부터 환부된 법률안 같은 경우에는 무기명투표로 표결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공개투표다. 투명한 의정활동을 위해서라고 한다.

너도 이 전광판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 비밀스럽지 않고 투명한. 그래서 내가 네 맘을 자세히 알 수 있도록, 네 마음의 표결현황을 즉각 알아볼 수 있도록.

기인지 아닌지, 바로바로.


국회의장석 바로 아래에는 발언대가 있고 그 바로 앞에는 속기사석이 있다. 체험관에는 없던 공간이다. 총 4명의 속기사가 회의의 모든 발언을 기록한다. 그리고 이 회의록은 국회 홈페이지에서 누구나 열람할 수 있다.

나도 기록을 작성하고 있는데. 네가 만약 이 기록을 열람한다면 너는 무얼 찾게 될까. 눈치는 챌까.

이 글들이 너에 대한 발언이란 걸. 여기엔 수없이 많은 너와 내가 있다.


참관석 바로 아래에는 기자석이 있다. 방송사의 카메라와 기자들이 자리하는 공간이다. 가끔 국회의원들의 스마트폰 화면이 카메라에 잡혀 뉴스의 정치면을 장식하곤 하는데 기자석과 국회의원석 간의 거리를 보니 화면에 잡힐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보여주는 건가 싶다. 얼마든지 카메라로 잡을 수 있는 위치다.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치게 궁금하다. 너도 내게 조금 알려주고 싶다면, 네 마음을 들키고 싶다면 힌트를 주었으면 좋겠다. 엿볼 수 있게 뭐라도 조금 흘려둔다면, 나는 캐치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아마도 꽤 떠들썩한 뉴스가 되겠지.


본회의가 실제 열리는 것을 직접 보고 싶다면 자신이 사는 지역의 국회의원 사무실에 방청 신청을 하고 방청권을 교부받으면 된다. 이런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한번 신청을 해보고 방문하는 건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든다. 뭐, 다음에 너와 올 기회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과연?)


의사당 참관을 마치고 나니 여유가 있다. 배도 출출하다. 바로 옆 건물인 국회소통관에서는 방문객도 식사를 할 수 있다. 허기진 배를 천천히 채운다. 그럼에도 뭔가 허전한 마음은 저렴한 가격과 국회 직원들의 수다를 엿듣는 것으로 달래 본다.


다시 돌아간 박물관에서는 아까 미처 보지 못한 4개의 전시실을 천천히 둘러본다. 내 옆은 전시실 안내 로봇인 큐아이가 따라다니며 채운다. 아니 내가 따라다닌다고 해야 맞겠다. 똑똑한 녀석이어서 외롭지 않다. 나오는 길에 손까지 흔들며 작별인사를 나눈다. 새로 사귄 친구에게 너를 소개해 주고 싶다.


박물관 옆에 위치한 국회도서관에서는 도서 대여를 시도했지만 실패. 도서관 밖으로 책을 반출할 수 없다. 도서관 건물 내에서만 대출과 반납이 가능하다.

밖으로 꺼내지지 않는 내 마음 같아서 잠시 처참한 기분에 휩싸였지만 괜찮다. 도서관 앞 야외공연장에서 열리는 작은 음악회와 북토크로 날려버리면 되니까. 그리고 친구와의 만남으로.

친구가 도서관 앞마당에서 열리는 작은 도서축제에 참가하고 있다. 오늘은 옆길로 좀 새야겠다. 가라앉을 땐 역시 패턴에서 일탈! 이만한 게 없다.

내 친구와 인사할래? 우리 같이 수다나 떨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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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아 왜 (I Wait) (by Day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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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