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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고박물관

나의 가치

by 미하

세상을 움직이는 광고. 현대 사회는 온갖 광고가 넘쳐난다.


- 이건 좋은 거예요.

- 이게 올바른 거예요.

- 끝내주죠?

- 이렇게 합시다.


어떻게 하면 너에게 나 자신을 좀 더 잘 내보일 수 있을까. 광고박물관을 다녀오고 나면 가능해질까.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한번.


오늘의 행선지는 우왕좌왕. 1픽이었던 광고박물관을 가려다 현관에서 마음이 바뀌어버렸다. 광고박물관 말고 2픽이었던 전기박물관을 가자, 이등은 서러우니까. 우스운 이유이긴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나 홀로 서울 여행.

하지만 전기박물관에 도착하자마자 날벼락이 떨어진다. 휴관이라니!

전기박물관 홈페이지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서럽든 말든 처음의 결정을 따르는 건데. 다시 1픽이었던 광고박물관으로 향한다. 폐관까지 시간이 애매해 택시를 타지만 답답한 마음만큼이나 길이 꽉 막힌다.


우여곡절 끝에 택시에서 내려 광고박물관으로 뛰어간다. KOBAKO 광고교육원은 잠실의 높은 빌딩숲 사이 한 건물의 3층에 자리 잡고 있다.

광고박물관 안내데스크가 매우 한산하다. 오늘은 헛걸음하는 날인가? 혹시 여기도 문을 닫은 걸까? 불안함이 엄습하지만 다행히도 그건 아니다.

어느새 나타난 안내원이 나를 맞이해 준다. 원래는 예약이 필요하다고 하나 그 자리에서도 바로 온라인 현장접수를 할 수 있다. 두 시간의 관람시간을 기입하고 안내원을 뒤따른다. 문이 열리고 아무도 없는 박물관 안으로 발을 들인다.


문이 닫힌다. 완전한 혼자만의 시간이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꺼져있는 화면도 많다. 명색이 광고박물관인데 광고를 너무 못하는 거 아닌가요, 이러면 배우러(?) 온 저는 곤란해요,라고 속으로 외쳐본다.

그래, 속속들이 파헤쳐주겠어.


한국 최초의 근대광고는 1886년 2월 22일 자 한성주보 제4호에 게재된 독일상사 세창양행의 광고이다. 문구를 보니 각종 가죽, 말꼬리, 갈기털, 발톱(!), 옛 동전 등 다양한 물품을 공정한 가격과 방법으로 사들이고(그런다고 한다), 자명종, 뮤직박스, 램프, 직물, 성냥 등 서양에서 수입한 물건을 파는 회사다.

일종의 무역회사 개념인가 보다. 광고글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그 시절에 살고 있는 사람이 된듯한 착각이 든다. 현대인인 나도 혹하는 것을 보면 꽤 잘 만든 광고 같다.

계속해서 다음 설명문을 읽다가 눈이 커진다.


'고백'


??

‘광고’라는 용어는 1883년에 처음 등장하긴 했지만, 당시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동양 3개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했던 ‘고백(告白)’ 이란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독일상사 세창양행의 고백>이라고 쓰여있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고백이라니. 뜨끔하다.

-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감추어 둔 것을 사실대로 숨김없이 말함 - 이란 고백의 사전적 의미 그대로가 광고라니. 광고라 하면 뭔가 좋게 포장하고 부풀리는 것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나로서는 충격적인 단어다. 광고할 생각을 하지 말고 고백할 생각을 해,라고 나에게 말하는 거 같아서 갑자기 머릿속이 새하얘진다.


나는, 나는, 나는…… 어떡하면 좋지?

다 때려치워… 아니야…

때려치워… 아니야.


온갖 상념들이 갈팡질팡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이런 건 정말 생각도 못했다. 일단은 패스하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일제강점기 독립신문에 실린 광고들이 무척 재미있다. 한글과 영어 광고가 같이 실려있기도 하다. 한글이 지금과는 표기법이 좀 다르지만 읽을 수는 있다.


- 서울 식물회사 큰 정동

<외국과 내국 각색 식물을 우리가 파는데 값도 헐하고 모도 상등 물건만 매매하오. 와서 보시고 합의커든 단골로 정하시오>


- 주식회사

<광청교 북천변에 있는 이 회사는 내부와 군부와 경무청에 수용지물을 공납 하량으로 언약하고 갓과 신과 옷을 상품 물건으로 팔되 비싸지 아니하니 사가시기를 바라오>


- 고샬기 회사

<좋은 서양 반을이 이 회사에 많이 있으니 와서 사가시오. 값도 헐하고 품도 상등이니 서울 정동 고살기 집으로 찾아 오시오>


식물회사가 뭔가 궁금하여 영어 광고를 보니 grocery라고 되어있다. 식료품 잡화상이다. 꽃이나 화분을 파는 곳이 아니었다. 그럼 고샬기 회사에서 파는 것들은 뭘까하고 살펴보니 유럽과 미국에서 들여온 각종 물건을 파는 곳인데 어마어마하게 다양하다. 말라가산 건포도 / 푸딩 / 건포도 / 콘 밀 / 신선하게 볶은 모카커피 / 자바 커피 / 러시아 캐비어 / 훈제 연어 / 블랙베리 잼 / 밀가루 등등등. 그 시절에 저런 것들을 팔았다고? 정말 놀랍다. 역시 민간 상업의 세계는 대단하다.

그건 그렇고 광고에 쓰인 어투들이 상당히 도전적이면서도 당당해서 놀랍기 그지없다.

- 단골로 정하시오 / 사가시기를 바라오 / 찾아오시오 - 라니!


나도 너에게 그렇게 광고(고백) 해야 하는 걸까. 클래식은 영원하다는 말도 있는데.


<<품성도 상등이고 비싸게 굴지 않으니 와서 보시고 맘에 들거든 얼른 채가시오.>>


광복 이후 광고가 급성장을 하던 시기의 광고들도 하나하나 읽어본다. 재미있는 광고도 많고 꽤 의미 있고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광고들도 많이 보인다. 석유를 비롯한 에너지 절약 캠페인 같은 공익광고도 이때부터 많이 제작되었다.

새우깡 광고에서는 전라남도 법성포 근해에서만 잡히는 중하의 60%가 이 과자의 원료로 사용되며 1봉지당 중하 3마리가 들어간다고 적혀있다. 다음에 마트를 가면 새우깡을 사 먹어야지. 그리고 지금은 국내산 새우인지 태국산 새우인지 확인을 좀 해봐야겠다. 왠지 외국산 새우라면 조금 서운할 것 같다. 법성포 새우로 만든 새우깡이 더 맛있을 게 분명하다.


열심히 광고들을 읽고 있는데 조금의 소란이 느껴진다. 두 사람이 더 들어왔다. 밖에서 안이 보이는 건 아니지만 열심히 탐구하고 있는 나의 광고 효과? 그런 건 아닐 테지만 왠지 반갑다. 조금은 활기차진 박물관 내부의 공기가 좋다.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만들어진 공익광고들도 많이 전시되어 있다. 환경 / 인종 / 장애인 차별 / 장기기증 / 노인 / 범죄 / 전쟁 / 저널리즘 문제 등 그 범위가 정말로 넓다. 그중 몇 개의 문구들이 시선을 끈다.


<우리는 잘할 수 있습니다>

<용기는 아름답다>


그래 용기를 내. 잘할 수 있어.


흠... 과연 그럴까?

짝사랑 인간의 소심함을 격려하는 공익광고가 있다면 나는 과연 동화될 수 있을까? 그 광고가 나에게 먹힐까? 나는 용기를 낼 수 있을까?

하지만 “스토킹은 사랑이 아닙니다. 범죄입니다” 같은 공익광고는 만들어질지언정, 짝사랑 격려 프로젝트? 꿈도 꿀 수 없다.


요즘은 성범죄에 대한 인식이 달라져서 짝사랑은 더욱 어렵다. 짝사랑은 범죄가 아니지만 그 과정에 있는 사람들은 상대가 받아주지 않을 가능성 하나만으로 이미 너무 힘들다. 티를 낼 수가 없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티는 조금씩 나겠지만 그래도 애써 감추고 또 감춘다. 좋아하는 마음을 순수의 영역에서 조용히 혼자 간직하는 것은 너무 어렵고 무겁다. 열 번 찍는 건 범죄 수준이라서 단 한 번조차 좋아한다 말하기 어렵다. 거절당하면 그걸로 끝일 테니까.

그냥 속으로만 혼자 앓고 천천히 썩어가는 거다. 나는 속이 문드러지고 있다. 용기 내어 말하지 않으면 양방향의 소통이 아닌 혼자만의 사랑으로 끝나버리겠지. 그건 어쩌면 꽤 안전한 끝일지도 모른다. 거절의 두려움은 모든 긍정의 가능성을 덮어버린다. 이겨낼 수 없다.


<다시는 깨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졸음운전 공익캠페인 문구를 읽지만 ‘깨다’의 사전적 의미는 나에게 와서 달라져 버린다. 나는 짝사랑의 바위를 깨부수지 못할 수도 있다.

영영 갇혀버리게 되는 걸까? 하지만 또 다른 문구가 들어온다.


<소리 내어 말하세요. 변화할 겁니다>


아…… 도대체 어쩌라는 건데?!


<단 한 개의 계단도 너무 높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심각한 혼란스러움을 조금은 잠재워 줄 코너가 나타난다. 크로마키 사진 합성 체험코너다. 머리를 식혀야겠다.

당장 부스 안으로 들어가 배경을 고른다. 비에 젖은 숲 속 배경을 선택한다. 그리고 한껏 포즈를 취해본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다. 나중에 들어온 두 분은 다른 곳을 보고 있다.

사진이 꽤 잘 찍혔다. 출력도 가능하다. 당장 전송하기를 누른다. 안내데스크에서 사진을 찾아갈 수 있다는 문구가 뜬다. 이따 잊지 말고 찾아가야지.


광고의 기능을 여섯 가지 정도로 정의한 설명보드를 읽는다. 너에게 나를 광고한다면 나는 어떤 효과를 얻을까. 적힌 대로라면 적어도 여섯 가지는 얻을 수 있겠지. 광고제작에 관한 영상도 열심히 본다. 어찌 됐든 하나라도 배워보자.

나는 광고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니까. 몰라봐 준다면 너의 손해다.


마지막 즈음에 공익광고협의회의 사진광고를 이용한 퍼즐 게임 코너가 있다. 어렸을 때 많이 하던 정사각형 조각의 슬라이딩 퍼즐이다. 퍼즐 맞추기에 열심히 몰두한다. 성공하고 싶다. 하지만 절반의 성공. 그래도 오늘의 모든 혼란과 복잡한 마음을 달래주는 문구가 나타난다.


<괜찮아, 안전해>


안심하려던 찰나 바로 그 아래 이런 말이 적혀있다.


<방심이 하는 거짓말에 속지 마세요. 안전사고는 나를 속이는 작은 거짓말에서 시작됩니다>


하아.. 정말, 오락가락 왔다 갔다 하는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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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Rompecabezas (퍼즐) (by 바닐라 어쿠스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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