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나로부터 시작된 이야기
나는 너희가 세계라 부르는 존재이자, 우주이자, 신이자, 진리이자, 전체이자, 하나 그리고 내가 바로 너다.
자만하지 못하도록 합당한 절망을 내리는 것이 진리라고 했느냐?
그러니 네게도 절망을 내려주마.
- 강철의 연금술사
작년 말, 혼자서 애니메이션을 보는 게 낙이었다. 특히 전쟁 후 회복기의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는데. 에반게리온, 데빌맨 등으로 대표되는 그 시절이다. 아는 사람은 바로 느꼈겠지만, 그 시기의 작품들은 대부분 어둡고 심오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누군가는 희망과 용기를 말할 때, 누군가는 좌절과 분노를 말했고 애니메이션은 메인 컬처로서 일본의 마음을 대변했다. 나는 이상하리만큼 어두운 그 시절의 이야기가 흥미로웠고, 그 속에서 절망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주인공을 보며 이상한 위로를 받았다. 삶에는 절망도 희망도 없다는 메시지가 위로가 될 줄은 전혀 몰랐으면서도 말이다.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 사람은 판타지로 기댄다고 하지 않는가? 희망찬 작품을 찾았다면 좋았겠지만 의도했건, 의도치 않았건 어두운 작품들만 보니까 스스로가 조금씩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묘한 위로 덕분에 죽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하게 됐지만, 살고 싶다는 생각도 딱히 하고 있지 않았다. 박진성 시인은 인생은 살고 있거나, 죽어가고 있거나로 나뉜다고 말했다. 나는 굳이 꼽자면 후자였던 것 같다. 살아가기보다는 소모되는 느낌, 마침 노화가 시작되는 25세를 건너뛴 지 몇 년이 지났기에, 생물학적으로도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맞았다.
그러던 중, 알고리즘의 힘으로 강철의 연금술사 명장면을 봤다. 자리에 앉아서 진리와 대담하는 장면, 악역으로 보이는 조그마한 검은 덩어리(이 녀석이 호문쿨루스였다.)가 발악하며 진리에게 얻어맞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러다가, "내가 바로 너다!"라는 메시지에 무언가 알 수 없는 흥미가 돋았고, 댓글창에 남긴 친절한 발자국 덕분에 저 문장이 이 만화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하루를 통째로 강철의 연금술사를 보는 데 썼고, 매 장면을 곱씹지는 않았지만, 몇 장면은 대사를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봤다. 돌려보고, 유튜브에서 추천받아 보고, 찾아보면서 알고리즘을 저 대사로 가득 채워갔다.
그런데, 알고리즘이란 게 참 재밌다. 애니메이션을 하루 종일 찾아봤는데. 단지 진리, 자아 같은 단어를 검색했다는 이유만으로 고전이 나타났다. 설민석 강독회라던가, 책 읽어주는 유튜버들이 자연스럽게 피드에 나타났다. 다들 썸네일은 어찌 그리 잘 만드시는지. 도저히 클릭을 하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만약 미끼였다면, 나는 진작 물어서 육포가 되었을 텐데. 다행히, 그들의 콘텐츠는 성선설의 증거였다. 그렇게 자주 보게 된 소설이 데미안이었다.
나는 싱클레어에게 동질감을 느꼈다. 감사하게도 우리 집은 나의 선을 지켜줄 수 있는 공간이었다. 매일 따뜻한 사랑을 주시고, 부족하지만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해 주셨다. 부모님의 부지런함이 내게 좋은 것들을 알려주었다. 문제는 나였다. 나는 나쁜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가치의 상대성은 내 앞에서 무의미했고, 나는 좋은 것들을 당연한 것으로 착각했다. 그런 내게 다가온 크로머는 다름 아닌 폭력과 방황이었다.
맞아 본 사람은 고통을 알기에, 타인에게 친절할까? 나는 모르겠다. 맞아 보니까, 때리는 사람이 부러웠다. 때리는 사람의 힘 앞에서 자유롭게 통제되는 관계와 질서가 부러웠다. 일전에 읽은 아몬드에서도 나오지만, 나는 그런 힘이 부러웠던 것 같다. 단지 내가 맞았다는 이유만은 아닐 테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크로머를 만나는 일, 아니, 크로머가 되는 일이었다.
나는 데미안을 찾고 싶었다. 그래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멋진 사람들에게 섞여 있고자 노력했다. 데미안을 만나고 에바 부인을 만나는 순간이 찾아오면 뜨겁게 눈물을 흘릴 각오도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몇 순간에는 만났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그들이 홀연히 떠나가 버렸기에, 데미안을 만난 것이 분명하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모습은 크로머와 가까웠다. 태어나기를 싱클레어로 태어난 줄 알았는데. 크로머가 되었고, 이제는 데미안이 되려 해도. 크로머인 내가 너무 강해져서 관성이 생긴 듯했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데미안은 남이 아니었다. 데미안은 나의 양심이자, 용기이며, 사랑이고, 희망이었다. 싱클레어가 나의 망설임이자, 두려움이자, 순수였고 크로머가 나의 공포이자, 권위이자, 악이었던 것처럼. 싱클레어와 크로머를 내 안에서 발견하고 발휘했으면서, 데미안은 밖에서 찾으려 했다. 싱클레어로 태어난 것도 나이며, 크로머를 발견한 것도 나였음에도. 데미안을 찾는 일을 외부에 맡겨버린 것이다. 왜 그런 것일까?
최근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다시 한번 읽었다. 그가 말하는 개인의 정체성이 외부로부터 형성된다는 아이러니 때문이었을까. 데미안을 바깥에서 찾은 이유에 논리를 대기가 어렵다. 크로머를 발견했을 때 취해있었던 것일까. "나 좀 봐, 나는 새로운 것들을 발견했어! 이제 나는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한 거야!" 나쁘고 좋은 것의 가치를 모른 채로 발견했고, 취했다. 역시 무엇이든 가지기 전에 알아보면 좋고, 너무 많이 빠지면 좋지 않은 법이다. 데미안을 만나고 싶은 이유가 되었던 크로머에게 스톡홀름 신드롬이라도 느낀 것 같았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크로머로 사는 순간이 미워서, 싱클레어가 답답해서, 데미안이 부러워서. 하지만,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란 목표는 조금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결국 내가 되어야 할 좋은 사람이 고작 나라는 것이 슬펐다. "너는 자라서 네가 될 거야." 이슬아가 말했다. 그 말이 왠지 슬프게 느껴졌다.
아무리 데미안을 읽어도, 문장을 남겨도, 나는 여전히 대부분 크로머이고, 가끔씩 싱클레어이며, 그보다 더 낮은 확률로 데미안일 것이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내가 자라서 내가 된다는 말이, 아직을 의미하고, 부족함에 핑계를 주는 말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나는 자라서 내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자라면 되는 일이다. 내가 좋아하는 과학의 세계에서는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이런 말을 쓴다. "관측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과학이 낭만적인 학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행운아이다. 데미안의 확률이 관측됐으니까. 게다가 꽤 자주 나오곤 하니까 말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각자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의 삶은 각자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