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을 두고 온 뒤에 든 생각
식당에 우산을 두고 왔다. 돈까스 하나에 6천원이던 식당, 화정역은 그런 곳이다. 굳이 비싼 고급 음식점은 없어도 여러모로 든든한 식사 하나 하기엔 충분한 곳. 올 일 없던 곳을 4년만에 들렀다. 고작 20분 거리지만 4년 간 한번도 들릴 일이 없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그렇다. 집 앞에 있고, 가까운 곳일수록 갈 일이 없다. 아마도 등잔 밑이 그저 가까워서는 아니고, 특별히 갈 이유가 없기 때문이겠다.
그 우산은 스페셜 에디션이었다. 인턴으로 근무했던 회사가 디즈니 코리아와 제휴를 했을 때 받은 우산, 검정색 배경에 빨간 마블 마크가 수 놓아져 있다. 굿즈에 시큰둥했던 선배들 덕분에 마케팅 팀 막내였던 나는 자연스럽게 그 우산을 가질 수 있었다. 아니, 그분들은 좋아하는 물건이었어도 내게 먼저 양보했을 사람들이다. 막내라면 능히, 나도 막내가 팀에 있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 우산은 매우 컸다. 거의 파라솔만큼. 그래서 누군가와 만나면 자연스레 내 우산을 쓰는 일이 잦았다. 시쳇말로 썸이라고 부르는 관계에서 그 우산의 활용도는 쏠쏠했다. 비를 핑계로 가까이 닿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작은 우산이었다면 더 가까울 수 있었겠지만, 가까쓰로 어깨가 스치는 거리도 충분했다. 오히려 각자 우산을 들고 온 날에도 같이 쓸 핑계가 되어주니 큰 우산에게 고마울 일이 많았다. 서로가 좋아하는 사이라면 작은 우산이어도 같이 썼을 것이라는 친구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런 줄만 알았다. 큰 우산이여서 같이 쓸 수 있었지만, 큰 우산이여서 알아채지 못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 사무실에 우산을 두고 나온 게 기억났다. 굵어지는 빗방울을 사이로 선배들과 뛰듯이 걸으며 마음이 불편했다. 분명 우산을 챙길까 고민했었다. 그치만 그냥 맞고 말지라고 생각하며 걸어 나온 게 아쉬웠다. 이기심으로라도 우산을 챙겼으면, 셋 다 비를 적절히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기적인 행동이라도 나눌 구석이 있는 것이다. 너무 빡빡하지 않게만, 누군가에게 내어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충분히 이기적이어도 됐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에는 어제 두고 온 우산을 찾으러 식당으로 갔다. 어젯 밤 안쪽 중간 자리에 있던 손님 맞죠? 사장님이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때때로, 지금도 가끔씩은 기억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기억에 초점을 두면 과해지는 것 같다. 대부분의 오버나 실수는 기억되고 싶다는 욕심에서 출발했다. 욕심부리지 않아도 기억될 것들은 기억된다. 애초에 기억은 내가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각인을 목표로 일하는 마케터지만, 결국에 기억해주는 것은 상대의 몫이다.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해주는 것이다. 식당 사장님처럼. 가만히 앉아 기억나는 얼굴들을 떠올렸다. 머리에 구름이 꼈고, 역시 큰 우산을 들고 다니길 잘 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