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하게 하고, 추측하게 하고, 관찰하게 만든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으로 선명하게 구분할 수 없는 혼동, 상상, 착시의 지점에서
나의 상상력의 출발하듯이
겨울과 봄은 선명하게 구분할 수 없는 지점의 혼잡, 혼합, 섞임의 지점에서
만나고 헤어진다.
봄과 겨울이 악수하는 찰나의 바람, 빛, 물기로 반짝이는 숲을 마주하니,
지금이 바로 그 때다.
짧은 만남과 헤어짐의 순간을 생각하자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래서 다시금 <흰 바람벽이 있어>를 필사해 본다.
에밀 놀데의 여사제들
흰 바람벽이 있어 /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 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꿇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에밀 놀데의 최후의 만찬
교차하는 순간의 흔들림은 외로움과 슬픔과 두려움을 뿜어내는 호흡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작과 끝의 동시성에서 울리는 소리는
백석 시인의 시 / 흰 바람벽이 있어와 닮지 않았을까?
슬픔이면서 기쁨이고 외로움이면서 그리움과 사랑이고,
가난하면서 풍족하고 높은 곳이면서 낮은 곳이고 쓸쓸하면서 사색의 즐거움이고,
모르겠다. 상반된 것이 같은 뿌리에서 자라 피어난 꽃처럼 느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