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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다 May 31. 2016

모든 꽃은 피어난다
내가 꽃이라는 것만 잊지 않는다면

[영화 ㅣ 브루클린 Brooklyn]

한 여자가 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직은 설익은, 그래서 어떤 사람으로 성장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여자가 맞을 것 같다. 여튼, 한 여자가 있다.


항상 벗어나고 싶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뻔하기 그지없는 무료하고 작은 이 마을로부터, 괴팍하거나 지나치게 간섭하는 좁디좁은 동네 사람들로부터, 과년한 나이가 되었건만 여전히 한 사람분의 제 몫을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어제 같은 오늘, 오늘 같은 내일이 반복되는 생활이 싫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나를 꿈꾸는 방법은 애초에 배워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저 아침에 눈을 뜨고 밤이 되면 눈을 감는 일상의 반복 속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여가는 자신이 초라해질 즈음이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여자를 알아주고 지지해주는 언니로부터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일랜드의 작은 마을을 떠나 미국 뉴욕 브루클린으로 떠날 기회를 얻게 된 것.


영화 ‘브루클린(Brooklyn)’의 시작이다. 



근래 보기 드문, 참 반듯한 영화가 나왔다. 언젠가부터 온갖 영화들이 강박처럼 안고 있는 ‘반전’에 관한 부담을 떨쳐버리고 올곧게 제 갈 길을 찾아가는 영화다. 극단적인 갈등이나 사건이 주인공을 괴롭히지도 않는다. 그래서 더 현실적이다. 1950년대 아일랜드 시골 마을과 뉴욕 브루클린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얼마든지 2016년 지금을 살아가는 과년한 한 여자를 빠져들게 할 수 있는 그런 영화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한 여자가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그래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인지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성장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사에서는 전혀 다른 매력의 두 남자 사이에서 겪는 로맨스 영화라 홍보하고 있지만, 로맨스는 우리 삶에서도 그러하듯, 살아가는 과정에 등장하는 하나의, 하나이지만 꽤 중요한 요소로 존재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주인공 에일리스(시얼샤 로넌)는 아일랜드의 시골 마을 에니스코시에 산다. 집안 형편도 좋지 않고 변변한 일자리도 없어 작은 식료품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러던 중 언니와 아는 신부의 도움을 받아 낯선 뉴욕 브루클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을 한다. 낮에는 고급 백화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대학에서 공부하며 브루클린에 적응하려 하지만 지독한 향수병에 시달리게 된다. 


차츰 생활에 안정을 찾아가던 어느 날, 아일랜드 이주민들의 파티에서 이탈리아계 청년 토니(에모리 코헨)를 만나게 된다. 성실한 배관공 토니의 소년같은 매력에 빠진 에일리스는 점점 브루클린 생활에 적응해가며 독립적이고 세련된 뉴요커로 변해간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닥친 사랑하는 언니의 죽음. 급히 고향으로 향한 에일리스는 그곳에서 토니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진 짐(돔놀 글리슨)과 만나게 된다. 부유한 집안의 상속자이자 젠틀한 아일랜드 신사인 짐과 안락한 미래를 장담할 수는 없지만 밝고 유쾌한 토니 사이에서 에일리스의 갈등이 시작된다. 



나 역시 그랬다. 벗어나고 싶었다. 좀 더 새로운 세상, 좀 더 큰 세상이 내게 펼쳐지기를 항상 바라고 기대했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기회가 왔을 때 나 역시 에일리스처럼 기회를 잡았다. 내가 살던 작은 동네를 떠나 낯선 곳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느낀 그 설렘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나와 작별하고 오롯이 나의 선택과 노력으로 만들어갈 새로운 나와의 만남을 고대했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생각했다. 에일리스가 뉴욕으로 가지 않았다면, 에일리스는 제 몫을 하는 진취적인 여성으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에일리스가 뉴욕으로 가지 않았다면, 토니는 물론이고 짐과의 만남이 그녀 앞에 기다리고 있었을까?


그런데 영화를 모두 보고 나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에일리스는 자신을 위한 최선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에일리스와 내가 그렇듯, 우리는 모두 한 송이 꽃과 같다. 결국 우리는 피어나는 꽃이다. 언제 피는 꽃인지,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 잘 피어나는 꽃인지가 다를 뿐, 우리는 결국 꽃봉오리를 터뜨려 제 역할을 다 해내는 꽃이라고. 



2014년 개교해 우리나라 교육계에 일대 혁신을 불러일으킨 벤자민인성영재학교(교장 김나옥)가 올해 새롭게 신설한 과정이 있다. 바로 벤자민갭이어(Gap Year)다. 20대 청년들을 대상으로 인생의 주인으로서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1년을 제공한다. 620명이나 입학했다고 한다. 30대도 상당수 있다.


그만큼 성인이 되고 나서도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는, 그래서 찾고 싶은 청춘들이 많다는 것 아닐까. 초등학교 6년, 중고등학교 6년, 대학교 4년까지 짧게는 12년, 길게는 16년 이상 쉼 없이 배우고 공부하고 그것들을 잘 알고 있는지 확인하는 시험도 쳐왔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을 배우지 못했다. 바로 내가 누구인지,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것 말이다. 찬찬히 돌이켜보면 이런 질문을 스스로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 채 그저 시키는 대로 국·영· 수만 냅다 팠던 것 같다.



영화 ‘브루클린’에 주목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영화가 직접 에일리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하기를,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지를 답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에일리스가 가족이라는 그늘, 작은 시골 동네의 시선들에서 벗어나 오롯이 '' 자신으로서 삶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부터 영화는 줄곧 한 가지를 향해 달린다. 

바로 주인으로 살아가는, 주체적인 삶이 그것이다. 


몸은 성인이 되었지만 무엇 하나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서 책임까지 져 본 적 없었던 에일리스였다. 그랬던 에일리스가 뉴욕을 향하는 배에서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배워나간다. 지독한 뱃멀미를 피하기 위해 파고가 높을 때는 속을 비우는 것이 좋다는 것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사람들의 눈을 맞추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을, 향수병을 이겨내고 낯선 곳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해나가는 것을, 그리고 엄마를 비롯한 주변의 기대가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나갈 인생길을 함께 걸어나갈 누군가를 온전히 선택해내는 것을. 



한 걸음 한 걸음 자기 삶의 주인으로 성장해가는 에일리스를 보며 나는 돌연 '서른'을 떠올렸다. 어릴 때는 ‘서른 살’이라고 하면 ‘대단한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부모님은 서른 나이에 이미 나와 동생이 있었고 집과 차가 있었고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서른이 지났지만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고 내 이름의 집도 차도 없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직업이 있다는 것 하나려나.


그리고 서른을 목전에 둔 동생에게서 온 메시지가 생각났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는데, 여전히 제 몫을 해내지 못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였다. 답장을 이렇게 보냈다. 


'사람은 꽃과 같아. 어떤 사람은 봄에 적당히 따뜻한 때 피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한여름 뙤약볕이 내리쬘 때 피어나기도 하지. 흰 눈이 펑펑 내릴 때 피는 꽃도 있고.

그런데 중요한 건, 내가 꽃이라는 걸 잊지 않는 거야. 누가 피워줄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꽃이라는 걸 잊지 않고 나에게 가장 완벽한 때에 맞춰서 꽃을 피워내면 되는 거니까. 힘내자.'



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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