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수라 (阿修羅)
- 2022년 겨울은 유독 지루했다. 당시 북경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중국은 뒤늦게 코로나가 정점을 달리고 있어, 모든 도시는 봉쇄와 해제를 번갈아 반복하고 있었다. 기본 체력이 약했던 광고 법인은 곧 한계를 드러내고 빠르게 침몰하기 시작했다. 힘이 없어진 개체가 얼마나 비굴하게 변해 가는지와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본래 모습을 여과 없이 볼 수 있었다.
- 법인의 본사와 주거래처인 하우스(고객)들은 빠르게 우리를 손절했다. 법인은 그렇게 청산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이런 소문이 퍼지자 그나마 남은 직원들을 동요하기 시작했고, 한 푼이라도 더 위로금을 받아 가려는 직원들과 나의 협상은 하루하루 비난과 힐책의 연속이었다.
- 당시 모두들 이 상황에 대한 탓을 돌릴 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회사는 직원에게, 직원은 회사에서, 고객에게, 시장에게..... 이 상황에 당위성을 찾기 위해서는 될 수 있다면, 더 많은 탓할 대상들이 필요했다.
- 그렇게 22년의 겨울은 아수라장이었다. 아수라(阿修羅) : 서로 헐뜯고 싸우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머무는 장소.
2. 소시오패스
- 아주대 김경일 교수는 "사람의 기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사회적 능력치가 향상되었을 뿐이다." 내성적인 사람이 갑자기 PT를 하거나 조직의 리더가 되는 건, 사회가 요구하는 능력에 어쩔 수 없이 맞추게 되었을 뿐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자기가 처한 상황에 맞게 변할 수 없다.
- 변화한다는 것은 어쩌면 인간성마저도 바꿔야 할 때가 온다. 법인이 쇠락해 갈 때. 나는 직원들을 수단으로 보기 시작했다. 당장 매출과 이익을 맞추기 위해서 그들은 조절해야 할 대상이었다. 프로젝트가 생기면 보유하고 아니면 가차 없이 해고해야 했다.
- 그때 기억이 난다. 사람이 사람에게 줄 것이 없을수록 가장 많이 쓰는 방법이 바로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돌아보면 그때 직원들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너는 내 사람이다.", "내가 너는 책임진다." 우리 같이 가는 거다" 사실 내 마음 한편에는 언제든 상대를 버릴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에게 보상이나 확정을 줄 것이 없으니, 그렇게라도 심리적 족쇄를 채우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어느 순간 이중적인 소시오패스가 되어 있었다.
3. 도사리고 있다.
- 23년 한국으로 귀임 이후 나를 대하는 회사의 태도에 적잖게 실망했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나는 나의 북경에서의 모습을 똑같이 보고야 말았다. 이중적인 언어 구사. 상대를 안심시키지만 교묘한 압박 같은 걸 느꼈다.
- 그들이 구사하는 언어나 단어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가 아니라, 윗사람들의 결정이야". "있는 듯 없는 듯 버텨봐" 어딜 가나 이런 모습은 항상 도사리고 있다. 가장 손쉽고 저렴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 회사를 자발적으로 퇴사하면서, 나는 내가 이러려고 직원들과 그렇게 설전을 벌이고 험한 소리를 했나 싶었다. 아니 솔직해지자면 나 역시 누군가의 탓을 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렇게 돌아보니 직장에서 풍족한 물질적 보상을 받은 것 이외에는 나는 꽤 망가져 있었다.
4. 중국 속담
- 중국 속담에, "남 탓을 하는 사람은 가야 할 길이 먼 사람이고, 내 탓을 하는 사람은 이미 절반은 온 사람이다. 아무 탓도 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도착한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 나는 누군가를 탓해 왔다. 그러기 위해 더욱더 나를 숨겼다. 명분을 만들기 위해 윗사람들을 팔았으며, 소신을 위장하기 위해 효율성이라는 이름을 가져다 활용했다. 사람들에게 가치 없는 감정을 팔고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 결국 남는 건 "누구 탓"이라는 것뿐이었다. 살면서 누구든 뜻하지 않게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 원하든 원치 않던. 하지만 한가진 확실하다. 찌릿하고 불편한 기억은 꽤나 오래간다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