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그 많던 깡패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사상전집과 문학전집. 지금은 기억도 가물거리는 그 책들이 그땐 왜 그리 대단해 보였는지 몰라. 살면서 누구나 책에 끌리는 시기가 오나 봐. 고등학교 가고 싶었던 열망이 지성에 대한 욕구를 자극했을까. 하나라도 더 알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강박도 작용했을 거야. 지금은 같은 책을 봐도 별 감흥이 없는 걸 보면 그 시절, 나에게도 지적 허영이 있었나 봐. 겨우 허영이나 채우자고 톨스토이를 읽다니. 작가가 알면 어이없을 일이지. 책이 좋아한 번 잡으면 백 번씩 곱씹어 읽었다는 어떤 선비의 독서 태도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어. 그저 하나를 알면 열 가지 아는 척하고 싶은 촐랑이였지. 근데 그럴 대상이 있어야 말이지. 결국 지하 다방의 그녀에게 편지를 썼어. 예전에도 그랬듯 그녀는 답장이 없었어. 뭐 그래도 상관없었어. 편지를 쓰는 순간만큼은 난 그녀에게, 그녀는 나에게 서로 속하는 기분이었으니까. 문구점에서 제일 예쁜 꽃 편지지를 한 묶음 사 왔어. 책에는 멋진 문장이 많았어. 소설 속 연인들이 주고받는 편지는 또 얼마나 나를 달뜨게 하던지. 그런 문장을 끌어다 적당히 어휘를 바꿔 그녀에게 쓰고 또 썼어. 근데 문장력이 없으니 써 놓고 보면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야. 편지를 쓰면서도 관통하는 주제도 못 찾아. 비유와 은유도 뭔가 난잡하고 천박했어. 그냥 설익은 애정이 익기도 전에 펜 끝으로 쏟아지는 느낌? 그런 편지들이었어. 답장도 못 받으면서 죽어라 쓰는 나의 순애보가 안쓰러웠을까, 편지를 배달하던 장깨가 어느 날 그녀에게 한 마디 했어. 편지를 그렇게 받았으면 뭐라도 한 장 쓰라고.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했대. 걔더러 주제 파악이나 하라 그래. 장깨는 내가 내미는 편지지를 확 찢으며 말했어. 그만해, 병신 새꺄. 그 누나 땡삐 새끼 좋아하는 거 같더라. 아, 땡삐... 시작해보지도 못한 내 첫사랑을 단숨에 낚아채 간 그 사람.
내가 일했던 목욕탕은 꽤 잘 되는 곳이었어. 우선 목이 좋아. 주변에 상가와 주택이 적당히 어우러져있지. 근처에 경쟁 목욕탕도 없었어. 미나리꽝이던 그 동네에 사장이 목욕탕을 연 건 오래전이었대. 당신엔 개발되기 전이어서 겨우겨우 망하지 않을 정도로만 운영을 했나 봐.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큰 중고차 시장이 생기고 사람들이 몰려왔지. 주변의 식당가, 유흥가들도 번성했어. 그 사람들이 목욕탕 고객이 됐지. 사장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때밀이 형의 노력도 꽤 컸어. 손님 중에 형의 단골이 꽤 있었거든. 우리나라 최고의 때밀이라고 추켜올리면서 멀리서 오는 손님들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손님이 많으면 다 좋을 것 같지만 사장이나 형에겐 고민이 하나 있었어. 바로 깡패 손님들이야. 등이나 어깨, 가슴에 용이나 물고기 같은 문신을 시퍼렇게 새기고 여기저기 흉터가 있는 깡패들. 그들은 중고차 시장에서 일한다고 했어. 돈이 될 것 같으니까 어디서 저런 새끼들이 파리처럼 꼬여 똥탕을 튀긴다며 사장은 투덜거렸어. 주변에 유흥가가 늘어난 것도 이유였겠지. 그들이 밤새 술 먹고 다음날 사우나하는 곳이 하필 내가 일하는 목욕탕이었던 거야. 그러니 일반 손님들이 떨어져 나가지.
깡패들은 혼자 오는 법이 없었어. 보통은 서넛, 적어도 둘 이상은 왔어. 몸에 문신이 많은 사람이 왕초야. 왕초가 목욕탕에 올 땐 부하 하나가 먼저 들어와 탈의실과 탕 안을 살펴. 안전하다고 생각되면 왕초가 들어오지. 내가 어서 오십쇼, 외치며 신발 받으러 달려 나가면 부하가 눈을 부라리면서 나를 막아 세웠어. 꺼져, 새꺄. 그다음 잽싸게 왕초를 향해 형님, 신발은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러면서 신발을 두 손으로 들고 옷장으로 가. 난 일부러 무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주춤거리는 자세로 물러서 있기만 하면 돼. 나머진 그들끼리 다 하거든. 왕초가 옷을 벗으면 부하가 옷을 받아 걸면서 외쳐. 형님, 옷 모시겠습니다. 왕초가 옷을 다 벗고 탕으로 들어가면 부하 중 절반은 탈의실에 옷 입은 채 남아 있고 절반은 따라 들어가. 탈의실에 남은 부하들은 나이가 다들 어렸어. 머리를 짧게 깎지 않았다면, 그냥 내 또래나 몇 살 위 동네 형들 같은 그들. 음료수가 마시고 싶은지 냉장고를 기웃거리다가도 이내 탕 안쪽을 의식하고 졸병처럼 경직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바지춤을 올려 양말 속에 감춘 한 뼘쯤 되는 접이 칼을 꺼내 장난도 쳤어. 그래도 심심하다 싶으면 나를 불러 희롱했어. 칼끝으로 내 눈을 찌를 듯 말 듯 하면서 겁을 주는 거야. 시애끼, 요거. 눈깔을 파서 다마를 쳐 불까, 아니지 목을 따서 회쳐 먹어 불까, 콱 시발 배때지 확 따서 창자 꺼내 줄넘기를 해분다. 난 일부러 겁에 질린 표정으로 가만있다가 그들이 뭘 물어보면 조금은 멍청한 말투로 대답했어. 그러면 재미있다고 킬킬대거든. 그들은 돈도 잘 썼어. 잘하면 음료수를 얻어먹을 수도 있었지. 왕초가 목욕을 마치고 나오면 부하가 수건을 들고 있다가 날름 건네. 그냥 건네는 게 아니라 꼭 말을 해. 군대처럼. 수건 여깄습니다, 형님. 왕초가 물을 닦으면 다른 부하가 로션을 미리 들고 기다려. 로션도 다 바르면 부하가 드라이어 잽싸게 백 원짜리 동전을 넣지. 드라이까지 끝낸 왕초가 탁자에 앉으면 두 번째 서열 깡패가 냉장고에서 제일 비싼 헬스 펀치 하나를 꺼내 따서 있지도 않은 먼지를 닦는 흉내를 내고 두 손으로 척 바쳐. 왕초가 말없이 음료를 마시는 동안 부하들은 먹이를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도열해서 기다려. 그러면 왕초가 그제야 한 마디 해. 니들도 마셔라. 그러면 부하 중 한 명이 내게 눈짓을 해. 꼬마야, 영지 셋, 빨리, 새꺄. 왕초가 500원짜리 헬스 펀치를 먹었으니 자기들은 300원짜리 영지를 먹는 거야. 근데 웃겨. 왕초가 먹은 헬스 펀치는 부하인 자기들이 직접 꺼내서 따 줬으면서 자기들이 먹을 영지 음료는 나보고 꺼내 달래. 그럼 나는 그들이 왕초에게 하듯 뚜껑을 따 건네면서 외치지. 형님, 여깄습니다! 내가 마음에 들게 하면 그들 중 막내쯤 되는 부하가 말해. 얌마, 너도 하나 먹어라, 새꺄. 그럼 난 캄솨합니다, 형님, 하면서 영지보다 더 싼 베지밀을 꺼내 먹어. 돈이 많은지 1500원어치 먹고도 2000원을 척 내면서 거스름돈도 안 받아. 그건 내 수입이야. 그래서 그들에게 더 깍듯하게 대했어. 근데 시간이 갈수록 그들이 하는 '형님'놀이가 애들 장난감 병정놀이 같은 거야. 나도 모르게 웃음이 쿡 하고 나온 적도 있어. 맞아 죽을 뻔했지.
깡패끼리도 목욕탕 오는 시간을 조절하는지 동시에 같은 무리가 오는 경우는 드물었어. 한 무리가 오전에 오면 다른 무리는 점심때 온다든가 왕초는 오전에 오고 조무래기들은 오후에 온다든가. 싸우는 것도 몇 번 봤어. 한 번은 왕초가 다른 왕초와 말장난을 하다가 시비가 생긴 거야. 왕초 하나가 소리를 버럭 지르니까 부하들이 일제히 한 뼘쯤 되는 칼을 꺼내 상대를 겨눴어.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몰라. 순식간에 탈의실이 경직되고 사람들이 놀라서 구석에 숨고 난리였지. 그런데 그 순간에도 왕초는 다르더라. 표정 하나 안 변해. 배를 훌렁 까더니 상대편 칼끝에 갖다 대고 막 들이미는 거야. 쑤셔보라 그러면서. 그렇게 한 일분쯤 있었나? 상대 왕초가 눈짓을 하니 다들 칼을 거뒀어. 두 왕초는 서로 담뱃불을 붙여 주면서 화해를 하더라. 그런 것도 처음엔 무서웠는데 여러 번 보니 병정놀이처럼 느껴졌어.
주먹을 휘두르는 깡패들이 자동차를 판다는 생각을 하려니 잘 연결이 안 되었지만 그들도 나름 열심히 사는 것 같았어. 경기가 안 좋다고 걱정을 하고 차가 몇 대가 나갔네, 손님들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둥. 멀쩡한 얘기도 했어. 또 무슨 상사 사장 새끼는 조만간 손을 봐줘야겠네, 어느 동네 애들이 싸가지가 없는데 한 번 쳐들어가 조져놔야겠네, 그런 얘기들도 했어. 그들은 주말보다는 평일에, 오후보다는 손님들이 별로 없는 오전 시간에 주로 왔어. 그런데 보통 그 시간에는 점포를 가진 사장들이 오는 시간이야. 가게 문 열고 종업원에게 대충 시켜놓은 다음 목욕탕이나 와서 느긋하게 때 밀고 장기를 두는 거지. 이 시간에 깡패들까지 와서 때를 미니 형이 바쁜 거야. 사장은 이참에 때밀이를 하나 더 고용하고 싶어 했어. 하지만 형에게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두 명이 수익을 나누면 돈이 줄잖아. 고민하던 형은 나를 시키기로 했어. 그러면 수익을 형이 다 가질 수 있거든. 나는 형에게 며칠 동안 때밀이 요령을 전수받았어.
내가 처음 때를 밀어 준 사람의 얼굴은 기억 안 나는데 몸은 아직도 눈에 선해. 때를 미는 일이 몸을 기억하는 일이거든. 일반 수건 크기의 이태리타월을 반으로 길게 접어 얇은 수건과 겹친 다음 끝을 엄지와 검지에 끼우고 손에 둘둘 말아. 끝 부분은 야무지게 꼬아서 안쪽으로 넣으면 때밀이 준비가 돼. 때밀이 수건을 손에 말아 끼우면 권투장갑을 낀 것처럼 답답했어. 때를 미는 순서는 항상 손부터야. 고객의 손을 살짝 들어 어깨부터 손끝이 일자가 되게 한 다음 어깨 방향을 따라 살살 밀기 시작해. 때가 밀려 때수건에 어느 정도 모이면 박수를 두세 번 쳐. 그러면 때가 털려 나와. 이때 치는 박수소리가 목욕탕 안에 반사되어 팡팡 소리가 나. 때밀이 형은 일부러 이 소리를 크게 내라고 시켰어. 그래야 손님들이 때밀이 존재를 의식하고 때를 밀 테니까. 때를 미는 방향은 아래에서 위, 심장 먼 곳에서 심장 방향이야. 그래야 피부가 쓸리지 않고 잘 밀리거든. 앞 쪽을 다 밀면 손님을 돌아눕게 한 뒤 다시 발가락부터 밀어 올라와. 등을 밀 땐 다른 곳 보다 조금 세게 밀어야 해. 때가 많아서가 아니야. 등을 세게 밀어야 사람들은 때를 잘 밀었다고 생각하거든. 손님이 이미 탕에서 때를 불렸기 때문에 손만 대도 때는 밀리게 되어 있지만 등 가죽이 벌겋게 될 정도로 밀어줘야 시원하다고 생각한다는 게 이상했어.
형은 20분이면 한 사람을 말끔하게 미는데 난 서툴러서 시간이 두 배로 걸렸어. 두 사람을 밀고 나니 땀이 흐르고 팔이 욱신거렸어. 형은 하루에 열 명을 밀고도 멀쩡한데 난 너무 힘든 거야. 때밀이 침대를 가깝게 놓고 형과 내가 나란히 때를 밀다가 내가 잘 못하는 것 같으면 형이 잽싸게 와서 내 등짝을 후려치고는 다시 알려주곤 했어. 새꺄, 겨드랑이는 박박 밀지 말고 앞에서 등 쪽으로 쓰다듬어 내리란 말야. 너 땜에 돈 못 받으면 뒤질 줄 알어. 수증기가 가득해 숨쉬기도 힘든데 형의 지도편달까지 받으려니 힘들었어. 어떤 손님은 일부러 나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어. 내가 손님 하나를 밀면 형은 내게 오백 원을 줬어. 난 제대로 배워 때밀이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
땡삐가 그 목욕탕에 오기 시작한 게 그 무렵이야. 뭐랄까, 첫인상부터 달랐어. 아귀를 닮은 상이라고 해야 하나? 상대를 눈빛만으로도 씹어 먹을 것 같은 눈매였어. 작달막한 키에 다부진 몸이었지만 탈의실을 가득 채우는 뭔가가 있었어. 그와 부하들이 들어오자 탁자에 앉아 노닥거리던 점포 사장들이 똥 마려운 표정으로 허겁지겁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갔어. 그와 일행이 탕으로 들어가면 안에 있던 사람들이 또 비실비실 나왔지. 그들은 그가 누군지 아는 것 같았어.
"땡삐 아냐? 벌써 이 동네까지 쓸었나?"
"그게 아니라 이번에 문희 밑에 들어왔대."
문희. 나에게 욕을 하지 않은 유일한 깡패. 사람의 몸이 다비드 상만큼 멋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 준 그. 큰 키에 고르게 발달된 근육이 왕년에 유도를 했다는 소문을 믿게 만들었지. 저런 사람은 왜 깡패가 되었을까 궁금해질 정도로 부드러운 인상에 예의까지 바르던 문희. 그는 내가 이곳에 오기 전부터 단골이었어. 때밀이 형에 의하면 그가 이 동네 오야붕이래. 사람을 죽여 감옥에도 갔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난 믿지 않았어. 때를 밀어줄 때마다 음료수를 사주고 고향이 어딘지, 몇 살인지를 물어준 그를 난 은근히 좋아했어. 그런데 요즘 주먹계에서 떠오르는 땡삐가 하필 그 사람 밑으로 들어갔다는 거야. 땡삐가 오면서부터는 문희를 더 이상 못 봤어. 일인자와 이인자가 같이 안 다니는 것이 그들 세계의 불문율인가 싶었어. 땡삐는 올 때마다 때를 밀고 부하들과 음료수를 마셨어. 문제는 돈을 안 내는 거야. 내가 돈 얘기를 하면 다음에 준대. 형한테 말했더니 버럭 화를 냈어. 땡삐 앞에 드러누워서라도 받아야지, 새꺄. 못 받으면 니 월급에서 깔 줄 알어. 형에게 욕을 먹고 나니 마음이 급해지는 거야. 그래서 다음부터는 땡삐를 나갈 때 바짝 따라가며 죄송하지만 여기는 외상이 안 됩... 그러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부하가 내 목을 당수로 칠 것처럼 손을 번쩍 들며 이 새끼가! 그러는 거야. 그러면 내가 무서워서 움찔하는 사이에 그냥 가지. 그러면 때밀이 형은 나를 또 야단치는 거야. 내가 병신같이 딱 부러지지 못해 돈을 못 받는다는 거지. 그 말이 서러워서 눈물이 났어. 그렇게 땡삐에게 못 받은 돈이 만 원을 넘어 간 어느 날이었어. 땡삐 일행이 시시덕거리다 옷 입고 나가려 하자 형은 작정을 했는지 탕에서 뛰어나오면서 외쳤어.
“땡삐 형! 아, 거 진짜... 오늘은 외상 좀 까 줘요. 진짜.”
"너 지금 나 불렀냐? 햐, 요 새끼가..."
때를 밀어줘서 그런지 형은 땡삐에게 나름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어. 심지어 땡삐가 든든한 배경이라도 되는 것처럼 허세를 떨기도 했지. 하지만 직접 ‘땡삐’라고 부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 땡삐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 같았어. 부하 하나가 형을 때리려고 하자 땡삐는 직접 손을 들어 멈추게 했어. 그러더니 직접 형 앞으로 갔어. 그리고 갑자기 빡! 소리가 났어. 형의 몸이 감전이라도 당한 듯 차려 자세 그대로 넘어갔어. 땡삐의 동작이 너무 빨라서였는지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서였는지 몰라도 순식간이었어. 땡삐는 쓰러진 형의 얼굴을 밟으려는 듯 다리를 살짝 들었다가 새로 신은 양말이 아깝다는 듯 그냥 나갔어. 손님들은 그 광경을 일부러 외면하며 나가 버리고 탕에 있던 손님들도 나올 생각을 못했어. 탈의실엔 쓰러져 있는 형과 나, 그리고 땡삐의 부하 한 명만 있었어. 그가 양말 춤에서 칼을 꺼내 형 눈에 바짝 들이대며 말했어.
"새꺄. 아프냐? 신고해라. 와서 눈깔을 파 씹어먹을 테니."
형은 일어나더니 창가로 가서 등을 보인 자세로 담배 여러 개비를 연거푸 피웠어. 가끔 눈물도 훔치는 것 같았어. 난 가만있기도 뭣해서 탕 안에 들어가 바가지를 정리했어. 사람들이 땡삐의 주먹에 대해 겁먹은 목소리로 수군거렸어. 땡삐는 형을 때려놓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계속 왔어. 난 더 이상 돈 얘기를 하지 않았어. 아니, 못 했어. 땡삐도 형에게 때를 밀지 않았어. 형에게 미안해서였을까, 그럴 인간은 아닌 것 같았어. 혹시 모르지. 때를 밀다가 형에게 찔릴지도 몰라서 그런 건지도. 그에게 맞은 날, 형이 이를 갈면서 그랬거든.
“땡삐 이 씹쉐애끼, 때밀이 다이 밑에 사시미 하나 짱 박아 놨다가 콱 쑤셔 버릴라.”
하지만 땡삐의 서늘한 눈길을 대하면 형도 오금이 저려서 칼은커녕 주먹으로도 못 때렸을 거야. 같은 깡패라도 땡삐는 달랐어. 몇을 제외하면 깡패들이라 해도 대체로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는데 땡삐는 좀 요란 벅적했어. 글쎄, 목욕탕으로 커피를 시키는 거야. 땡삐 부하가 지하 다방으로 뛰어 내려가서 다방에 주문을 하면 레지 누나가 목욕탕 문 앞에 와서 커피를 타지. 그걸 부하가 받아 왔어. 다 마시고 가면 내가 지하 다방에 커피 잔을 가져다줬어. 안 그래도 탈의실 지키랴, 때 밀랴 바쁜데 커피 잔 심부름까지 하느라 그가 오는 날은 모두가 피곤했지만 아무도 말할 생각을 못했어. 난 나름 좋았어. 심부름 덕분에 난 지하 다방 그녀를 볼 수 있어서. 근데 거기까지였어.
그날도 땡삐가 커피를 시키던 날이야. 마침 레지 누나가 배달을 나가고 없는 거야. 마담이 그녀를 대신 올려 보냈지. 그녀는 레지가 아니라서 배달은 안 하는데 마담 등쌀에 이제는 배달도 곧잘 다녔거든. 마침 목욕탕엔 손님이 없었어. 땡삐가 그녀를 탈의실 안으로 불렀어. 여전히 예쁜 그녀를 보니 반갑기도 하고 안쓰러웠어. 그녀는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재빨리 보온병과 커피 잔을 꺼내 설탕과 프림을 섞어 커피를 타 주고는 바로 내려갔어. 근데 땡삐가 그녀를 빤히 보는 거야. 그날은 너무 바빠서 내가 커피 잔을 못 갖다 줬어. 목욕탕 문을 닫을 때쯤, 그녀가 인터폰을 했더라. 커피 잔 찾으러 올라온다고. 아까 낮에 우리가 얼굴만 보고 말 한마디 못했으니 얘기를 하고 싶은가?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어. 중랑천 뚝방길을 함께 걷던 그녀. 편지를 쓸 때마다 그녀는 나에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로테가 되었다가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도 되었지. 그녀를 생각하면 일도 힘들지 않고 책도 더 재미있게 느껴졌는데. 그동안 보고 싶었다고 말해볼까? 하지만 막상 그녀를 보자 그 말을 할 수가 없었어. 뭐랄까, 그녀 표정이 조금 생경해 보였거든. 마치 나와 중랑천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의 표정? 내 편지를 받아 본 적도 없는 듯 낯선 느낌. 그날의 데이트를 너무 일찍 끝내서 아직 화가 안 풀렸나? 그럼 먼저 사과를 한 뒤 이번 쉬는 날엔 어린이 대공원에 가자고 해 볼까, 생각하던 찰나에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어.
"아까... 땡삐 그 아저씨 있잖아. 여기 자주 오니?"
땡삐? 그걸 왜 묻지?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따지기도 그렇고 해서 나도 물었어.
"근데 땡삐가 커피 값 줬어? 안 줬지? 그 사람 때 민 값도 하나도 안 줬어. 형도 때리고..."
그녀의 입꼬리가 비웃듯 한쪽으로 조금 실룩거렸어.
“야, 넌 뭐 그런 것까지 신경 쓰냐? 됐고 그 아저씨 말야. 보통 몇 시쯤 오니?”
왜 땡삐에게 관심을 갖지? 그런 나쁜 놈을. 묻기도 뭣해서 늘 비슷한 시간에 온다고 하자 바로 돌아서 내려 가버렸어. 땡삐 얘기만 묻다가 휙 가버린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할 수 있나? 나중에 장깨에게 들으니 그녀가 장깨에게도 땡삐에 대해 물어보더래. 관심이 있었나 봐. 그것도 모르고 꽃 편지지를 샀으니 나도 참. 주제 파악하라는 말 들어도 싸지.
그녀는 땡삐의 연인이 되었고 며칠 후 지하 다방을 떠났어. 그녀가 떠나던 날, 땡삐 부하들이 지하 다방에 난입해 집기들을 부쉈어. 다방 마담이 땡삐에게 그녀 몸값을 요구한 거야. 없는 집안에 태어나 오갈 데 없는 년을 거둬 착실히 데리고 있다가 좋은 곳에 시집보내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데려가는 법이 어디 있냐고, 정 데려가려면 그동안 먹여주고 입혀주느라 들어간 돈이라도 물어주고 데려가라고 한 거야. 얼마면 되겠느냐고 땡삐가 물었고 마담은 천만 원이라고 했대. 땡삐가 부하에게 말했대. 천만 원어치만 골라서 부셔라. 놀란 마담이 목욕탕 사장에게 급히 전화를 했어. 사장은 급히 왔지만 땡삐라는 말에 도망치 듯 다시 가 버렸어. 그런데 땡삐를 미워하던 때밀이 형도 그 일에서만큼은 땡삐 편을 들었어. 그동안 마담이 그녀를 식모 부리듯 부려먹었거든. 그것도 모자라 최근엔 티켓 접대까지 시켰다는 거야. 돈은 마담이 다 챙기고. 그런데도 마담은 다음날까지 사장에게 하소연을 했어. 하지만 사장은 성의 없이 땡삐 욕을 조금 할 뿐 나서서 뭔가 할 생각은 없어 보였어. 마담이 분이 안 풀렸는지 경찰에 신고를 했어. 근데 먼저 달려온 건 경찰이 아니라 땡삐의 부하들이었어. 부하들은 어제 부수다 만 걸 다 부쉈어. 소파는 칼로 긁어 못쓰게 해 놓고 오디오와 스피커도 박살을 냈지. 결국 마담이 싹싹 빌면서 돈까지 쥐여주고 나서야 난동이 그쳤어. 그리고 경찰이 왔어. 마담은 그제야 임자 만난 듯 울며 하소연을 시작했지만 다 하지도 못한 채 수갑을 차야 했어. 땡삐가 먼저 마담을 포주라고 신고 한 거야. 마담은 권리금도 못 건지고 감옥에 갔어. 며칠 후 지하엔 다른 마담이 새로 다방을 차렸어.
땡삐와 떠난 그녀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땡삐는 밤거리의 황제였어. 경찰과도 끈이 있었는지 언제나 당당히 목욕탕을 드나들었어. 구두 공장 친구 하나도 땡삐 조직원으로 들어갔어. 형님들 말만 잘 들으면 술도 맘대로 먹고 용돈도 월급보다 더 받는다며 좋아했어. 갈 수 있다면 나도 가고 싶었어. 하지만 싸움도 못하고 강단도 없는 나 같은 아이는 받아줄 것 같지 않았어. 땡삐 조직은 점점 커갔어. 그러다 그해 겨울이 오기 전, 땡삐와 부하들이 갑자기 발길을 끊었어. 그의 소식을 다시 들은 건 몇 해 뒤였어. 강남의 어느 술집 살인사건. 그녀가 다시 떠올랐어.
14. 소년의 정욕은 어떤 색일까?
그녀가 떠난 뒤 한동안 얼빠진 채 지내야 했어. 힘들게 번 등록금을 쓰리꾼에게 잃어버린 고학생처럼 회복되지 않는 수렁에 갇힌듯 멍하게 지냈어. 때밀이 손님이 많아 돈을 벌어도 즐거운 걸 몰랐어. 형에게 정신 어따 놓고 일하느냐 야단도 맞았지만 도무지 기운이 나야 말이지. 사방에 그녀에 대한 환청, 환시뿐이었어. 어떻게 나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지? 그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땡삐한테.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알면서. 매일 밤 쓴 연서들은 그녀에게 아무런 감흥도 없었나? 그러다 정신이 겨우 돌아온 건 쓰레기통을 비우다 장깨가 구겨 던진 꽃 편지지를 보고서야. 짝사랑이었음을 깨달은 거지. 그래도 마음에 살얼음처럼 퍼져나가는 아픔은 어쩔 수 없었어. 그녀를 꽤 좋아했었나 봐. 하지만 현실을 냉정하게 보면 나의 실연 감정은 근거가 없는 거야. 그녀는 한 번도 호감을 보인 적이 없었거든. 내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거야.
현실이 보이자 이번엔 나 자신에게 묻고 싶어 졌어. 어떻게 그녀를 상대로 그리 강렬한 연애감정을 유지했을까. 그것도 혼자 일방적으로. 내 속의 무엇이 그렇게 이끌었을까. 그녀의 초승달 같은 얼굴이 떠올랐어. 아하, 외모. 그녀의 예쁜 외모였어. 햇살을 보지 못해 창백하게 야윈 얼굴. 지하계단을 내려갈 때 팔랑거리던 치마 끝으로 보이던 희고 가느다랗던 발목. 양손으로 머리를 묶을 때 핀을 야무지게 물고 있던 입술. 뭔가 재미있는 일이 있어 뒤로 넘어갈 듯 웃을 때 하얗게 드러나던 목덜미. 마주치면 직접 봐서 좋았고 볼 수 없을 때에는 상상할 수 있어서 좋았어.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그녀에 대해 남아 있는 기억도 주로 몸에 대한 인상이네?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그때 내가 경험한 그 일 때문이야. 살아가면서 다들 은밀하고 특별하게 경험한다지만 서로 다른 크기의 놀람과 충격의 무늬로 몸에 새기고 살아가는, 평생 잊히지 않는 첫 경험.
그 시작은 때밀이 형에게서 왔어. 변명이 아니야. 형이 아니었다면 그 경험은 그 뒤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가능했을지 몰라. 목욕탕에는 남, 녀 탕 모두에 때밀이가 있었어. 하지만 남탕과 달리 여탕에는 탈의실 뽀이가 없었어. 여자들은 남자들만큼 때를 밀지 않으니까 수입이 나지도 않았겠지. 나를 비롯한 목욕탕 식구들은 때밀이 형을 실장님이라고 불렀어. 탈의실 운영권을 가져서일 거야. 그런데 손님들은 '나가시'라고 부르더라. 형은 그 표현을 싫어했어. 나가시라는 말이 때밀이를 라는 건 분명한 것 같은데 비하하는 말 같았어. 장깨라는 말처럼. 형이 사장을 미워하는 것도 사장이 형을 부를 때 굳이 '나가시'라고 해서야.
"아, 시발. 내가 사장 전담 나가신 줄 아나, 재수 없게."
사장이 형을 부를 때마다 형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입술을 씹곤 했어. 그런데 사장은 형뿐 아니라 새로 온 지 얼마 안 되는 여탕 때밀이 누나에게도 똑같이 불렀어. 형이 참다못해 나가시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했지만 소용없었어.
"어이! 주접을 떠세요, 아주. 야, 그럼 니들이 나가신데 뭐라고 부를까?"
저런 사람이 어떻게 목욕탕 주인이 되었겠냐고, 그 깐죽거리는 주둥이를 때수건으로 밀어 소금에 문대버리고 싶다며 날뛰는 형에게 어떤 연대감을 느꼈을까, 여탕 누나는 형을 마음에 들어했어. 어쩌다 일이 일찍 끝나면 목욕탕 앞 포장마차에서 술도 마시는 사이가 되었지. 시간이 좀 더 지나자 포장마차 술값도 아까웠는지 아예 탈의실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어. 내가 목욕탕 청소를 다 마치고 나오면 형이 술 심부름을 시키는 거야. 그럼 난 재빨리 슈퍼에 가서 소주랑, 오징어를 사 오지. 그리고 지하 보일러실에 가서 오징어를 노릇하게 구워 와. 형 기분을 맞춰드리면 나도 나가서 장깨랑 놀다 오라고 허락을 하거든. 그때가 대략 밤 10시쯤일 거야. 내가 두어 시간 나갔다 오면 형과 누나는 이미 가고 없어. 나는 두 사람의 술자리를 치우고 잤지. 그런데 그런 일이 잦아지니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나는 잠이 모자라 낮에 하품을 하는 거야. 형이 나더러 그럼 탈의실 맨 구석에서 알아서 자래. 맨 구석? 할 수 없이 테이블과 가장 먼 탈의실 맨 구석 창가 아래에 자리를 깔고 누워 잤어.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여탕 정리를 끝낸 누나가 들어오자 형은 남탕 불을 켜더니 재빨리 탈의실 불을 껐어. 불 꺼진 탈의실에는 탕 안에서 나오는 간접조명 덕분에 보일 건 대충 보이지만 어둑한 분위기가 되었어. 내가 누운 자리는 테이블과 가장 먼 곳이었기 때문에 더 어둑했어. 잔이 부딪히는 소리, 꼴꼴 술 따르는 소리, 형과 누나가 얘기하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피우는 담배연기가 탈의실에 퍼지는 동안 밖으로는 근처 가게에서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무지갯빛 네온 그림자들이 일렁여서 잠을 방해했어. 난 일부러 벽 쪽으로 돌아누웠어. 내가 자는 곳이 구석이어서 어차피 형에게 보이지도 않을 테지만 네온 불빛을 피하고 싶었거든. 형이 탈의실에서 한 잔 하고 가는 날은 책을 읽을 수 없어 아쉬웠지만 대신 평소 못 잔 잠을 일찍 자는 셈이니 나쁘다고 할 수는 없었어. 문제는 형과 누나가 갈수록 더 친해지는지 술자리가 잦아지는 거였어. 일주일에 한 번쯤 하던 술자리가 어떤 날은 연이어 마실 때도 있었거든. 내가 먼저 형에게 술 사 올까요? 하고 묻는 날이 있을 정도로.
그렇게 여러 날이 지난 어느 날이었어. 그날도 형과 누나는 한잔 했고 난 일찍 잠자리에 누워 바로 잠이 들었지. 그러다 잠결에 무슨 소리가 나서 살짝 깼어. 밖에서는 흥청거리는 술집 소음들 뿐 별소리는 없는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자려는데 그때였어. 어디서 음산한 소리가 들리는 거야. 어떤 짐승이 짐승을 잡아먹는 소리 같기도 하고 누가 목이 졸리는지 가늘었다가 또 갑자기 굵어지는 신음 소리가. 그 소리는 나는 듯하다가도 안 나고 또 잠잠한 듯하다가도 돌연 헉, 하고 토해졌어. 잠은 안 깨고 소리는 들리고 뭔가 일이 생긴 것 같은데 꿈인지 아닌지, 여기가 탈의실 맞나? 하며 가늘게 눈을 떴을 때 난 깜짝 놀라고 말았어. 어둑한 테이블 위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실루엣이 보이는 거야. 물을 잔뜩 머금은 수제비 반죽 덩이 같은 게 느리게, 하지만 부드럽게 꿈틀거렸어. 형과 누나였어. 잠시 뒤 내 눈이 어둠에 적응되어 자세히 보니 테이블 위에 던져진 듯 널브러져 있는 누나의 아랫도리에 머리를 파묻은 형이 물어뜯을 기세로 고개를 휘저어대고 있었어. 형의 고개가 거칠게 움직일수록 누나의 등은 신음과 함께 튕겨져 올라 활처럼 굽어졌다 풀리기를 반복했어. 점점 끊어질 듯 말 듯 당김과 풀림을 반복하더니 칼에 찔리는 듯 깊고 짧은 신음을 연이어 토해내다가 누나의 몸이 털썩, 가라앉았어.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둘은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나갔어. 몸은 천근만근이어서 자고 싶은데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았어. 대신 방금 내가 본 장면이 의식 한가운데로 떠올랐어. 바깥에서 들려오던 소음과 네온 불빛은 어디론가 사라졌어. 테이블 위의 실루엣들과 그들이 토해낸 신음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어. 난 처음으로 몽정을 했어.
말로만 듣던, 그러나 아직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는데도 다음날 아침은 아무렇지도 않게 오고 형은 출근을 했어. 형을 보자 내가 오히려 뭐라도 들킨 양 부끄러워졌어. 그런데도 형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어. 여느 날처럼 일을 하고 내게 신경질을 내고 그러다 며칠 뒤 또 내게 술 심부름을 시켰어. 형과 누나가 술을 마시는 날은 나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어. 몸이 피곤하고 눈이 감겨도 내 의식은 귀로 몰리는지 형과 누나가 또 낼 지 모르는 소리가 자꾸 기대되는 거야. 인간사회에서 섹스에 대한 건 당자사들 외엔 아무도 모르거나 모를 것을 전제로 주변과의 관계가 이어지잖아. 그런데 탈의실 구석에서 자야 하는 나는 그게 안 되는 거야. 형과 누나는 술을 마실 테고 흥이 오르면 또 뭘 할지 모르니까. 일부러 벽 쪽으로 돌아누워 이불을 머리 위로 올리고 눈을 감아도 소용없었어. 두 사람이 잠 시 뒤 낼 소리들이 벌써부터 내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는 걸. 몸은 잠에 취해 늘어지는데 의식은 또렷해지는 상황. 하지만 일상의 피로 때문일까,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 보면 그들은 아직 술을 마시고 있었어. 그렇게 몇 번을 자다 깨다 했을까, 그들의 정사가 또 시작되었어. 스물대여섯쯤 되었을까, 한껏 젊은 그들은 격렬했고 분방했어. 막힘과 뚫림, 머금음과 토함, 고통과 해방의 신음이 탈의실을 채웠어.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저절로 지하다방의 그녀가 떠올랐어. 훗날 나도 그녀와 저렇게 뜨거워질 수 있을까. 그녀도 저 누나처럼 저렇게 허리를 꺾으며 신음을 토할까. 그 생각이 미치자 까닭 모를 죄의식이 몰아쳤어. 그녀를 그렇게 상상하다니.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느낌이었어. 애써 그녀를 신음소리 가득한 의식에서 밀어냈어. 하지만 어느새 그녀는 다시 의식 한가운데로 떠 올라 허리를 활처럼 꺾었어. 내 몸이 제멋대로 달떴어. 안 그런 척하려 해도 안됐어. 난 그날 또 몽정을 했어.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만든 건 열일곱 살의 정욕이 아니었을까. 형과 누나의 정사로 시작은 되었지만 내 속에서 꿈틀거리던 욕정이 갈 곳을 몰라 소용돌이치다가 나와 그녀의 정사를 떠올리는 걸로 해소되곤 했어. 그녀를 욕정의 상대로 떠올렸기 때문에, 그녀가 허리를 꺾는 상상을 했기 때문에 그녀도 나를 좋아할 거라고 믿었다니.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창피해 숨고 싶었어. 그건 아마도 내가 그 답을 알아가는 과정이 비참해서였는지도 몰라. 그녀도 나를 좋아할 거라고 상정해놓고 내 마음대로 그녀를 이상화했잖아. 정작 그녀에 대해 아는 것도 없는 상태에서 내가 그녀를 좋아하면 그녀 또한 나를 좋아할 거라고 아니, 좋아해야 한다고 정해 놓은 거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처럼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구도를 미리 정해놓은 건 나 자신이었어. 스토커. 그것도 유치하고 저열하며 비겁한 스토커였던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