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3분 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니 Mar 01. 2022

[이빨]



“아이씨."


눈을 뜨자마자 입에서 튀어나오는 게 이토록 상스러운 소리라니. 누군가는 과격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염치 불구하고 이해를 구해본다.


혀를 입 안에서 빠르게 한 바퀴 굴렸다. 모든 이가 있어야 제 자리에 잘 있다.   


오늘도 이빨이 몽창 다 빠져버리는 꿈을 꿨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미 다 으스러진 이빨 조각들을 괴로울 정도로 입안 가득 물고 있다가 퉤 하고 뱉어내는 꿈이다. 어머나 이게 다 내 이빨인가요. 나 아직 마흔도 안됐는데 이가 죄다 빠져서 임플란트 해야 하는 거야 까지 생각하고 나면 늘 이 대목에서 깬다. 그리고 나면 곧바로 치아의 안위를 확인할 수밖에 없다.


정확히 3주째 같은 꿈이다. 하도 같은 꿈을 꿔서 이제는 꿈속에서도 이게 꿈인 걸 알지만 깨어난 순간에는 진짜로 이가 다 빠진 할머니가 된 건 아닌가 싶어 오싹하다.


이가 빠지는 꿈을 맨 처음 꿨던 날. 옆 팀 미영에게 얘기를 했더니 '그거 주변에 누구 죽는 꿈이야'라고 재수 없는 소리를 했다. 신경 안 쓰는 척하면서도 그 후로 한동안은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마음을 졸였는데 이제는 알겠다. 이건 내가 죽어나가는 꿈이야. 엉엉.



사막에 떨궈놔도 선인장으로 김치를 담가먹을 아이. 엄마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억척스러운 닉네임이 100%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스스로도 부정할 수 없는 맞춤옷 같은 별명이었다. 대학교 막 학기 시절 동기들은 바늘구멍에 낙타를 끼워 넣는 취업난에 엄청 난 스트레스를 받아 모두 각자의 질병을 하나씩 달고 살았다. 변비, 원형 탈모, 위염, 한포진 등등. 그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항상 맑은 안색을 뽐내며 해사한 얼굴을 하고 다닌 게 나였다. 태어나기를 스트레스의 S자도 모르도록 태어난 인간이다 내가.


그런 내게 요즘 편두통을 유발하는 사람이 생겼다. 새로 들어온 신입 팀원이다. 윗사람이라면 차라리 덜 억울할 텐데. 신입 사원 시절에도 특유의 변죽과 적응력으로 사수와 상사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던 사람이 나인데. 직장 생활 10년 차. 강적을 만났다.


“좋은 아침입니다. 팀장님!"


말간 웃음을 띤 그가 내게로 다가와 손가락 두 개를 이마 께에서 경례하듯 붙이며 아침 인사를 건넨다. 혼자만 해사한 내 얼굴을 보던 대학 동기들의 심정이 이랬을까. 내가 근 3주째 자네 때문에 80대에나 할 치아 고민을 40년이나 미리 하고 있는데 좋은 아침 일리가 있겠나 하하.


심란한 감정을 들키지 않도록 최대한 입을 악 다물고 억지 눈웃음으로만 인사를 대신한다.








“야, 골라봐. 뭘 시키면 처음부터 그냥 냅다 할 줄 모른다고 하는 애 VS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물어보는 애."


"뭐야. 밸런스 게임이셔?"


점심은 두툼한 패티가 두장이나 들어간 햄버거 세트다. 어제 과음을 해서 죽이 땡긴다는 미영을 회사 근방에서 가장 멀리 있는 패스트푸드점까지 끌고 왔다. 치즈 버거 해장도 나름 괜찮다는 핑계로. 굳이 사무실에서 걸어서 10분이나 걸리는 이곳을 택한 건 햄버거와 함께 누군가를 씹고 싶어서다. 그래 나는 찌질한 어른이다.


"골라봐 뭐가 나아? 나 지금 진짜 내가 꼰대인가 싶어서 그래."


“둘 다 별로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봐서라도 잘하려는 사람이 낫지 않아?"


“그치? 내가 꼰대는 아닌 거지?”


“근데 넌 직장 생활 10년이나 해 먹었으면서 꼰대가 아니길 바래? 너 그거 욕심이야."


"아니. 모르면 물어봐서라도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야지, 신입이면서! '저 이런 거 할 줄 모르는데요' 대번에 그러더라. 뭐 이런 거? 이. 런. 거. 어?"


하도 이빨이 빠지는 꿈을 꿔대서 턱관절 장애가 왔다. 패티 두 장이 든 햄버거를 먹는 일이 영 버거워 새 모이만큼 베어 물었다. 우라질, 맛있다. 와구 와구 씹어먹고 싶다.  


“뭐 어떡해. 적당히 잘 타이르면서 알려줘라 좀. 꼰대가 되기 싫은 사람도 노력을 해야지 어쩌겠어.”


"젠장. 어릴 때는 수저 바꿔 물고 싶으면 나라 탓하지 말고 노오력을 하라더니, 나이 좀 먹고 편해지려고 하니까 꼰대 소리 듣고 싶지 않으면 노력이라도 하래. 뭐 이렇게 빡빡하냐 진짜. 나 걔 때문에 이빨이 100개도 넘게 빠졌어.”


이빨 100개 이야기에 미영은 햄버거로 얼굴을 가린 채로 한참을 깔깔 거리며 웃더니 비밀 얘기를 해주겠다며 내 쪽으로 상체를 숙여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한다. 홀린 듯 귀를 가져다 붙였다.


“비밀인데, 걔 원래는 우리 팀 배정이었대.”


“…. 야 황미영."


배신감에 치를 떠는 표정을 짓자 미영이 이빨 100 얘기를 했을  보다  꺼이꺼이 웃는다.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그러나 저건 미안한 사람의 표정이 전혀 아니다.








“팀장님 식사는 좀 하셨습니까?"


오후에 잡힌 중요한 미팅 때문에 점심시간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바삐 준비를 하고 있으니 신입이 와서 묻는다. 슬그머니 내 책상으로 다가와 두유를 올려놓는다. 무슨 영문인지 눈으로 물었다.


“엘리베이터에서 2팀 팀장님도 뵀는데 팀장님이 요즘 턱관절 때문에 통 제대로  끼니를 못 드신다고 하셔서... 턱관절 아픈 건 방치하면 더 심해진다고 하더라고요. 꼭 치과 한번 가보세요!"


아 황미영... 쓸데없는 얘기를 해가지고는.


쭈뼛 거리며 돌아서는 신입을 불러 세운다.


“재훈씨, 이메일로 가이드 하나 보내 놨으니 읽어봐요. 앞으로 제가 자료 정리 부탁하면 거기 적힌 항목대로만 정리해주면 돼요. 모르는 게 있으면... 편하게 말해요.”


"아 넵! 감사합니다. 빠르게 익혀 보겠습니다!"


“천천히 익혀도 돼요. 실수만 하지 말아요."


“네 감사합니다!”


잠시 벙찐 표정을 짓던 신입이 급하게 두 손을 모르고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연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책상 위에 상표가 정면으로 보이도록 반듯하게 놓인 두유를 집어 들었다. 실리콘으로 붙여놓은 스트로를 떼 내어 비닐을 벗기고 경쾌한 소리가 나게 두유 팩에 꽂았다.


가만있자 이 근처에서 야간 진료하는 치과가 어디 있더라.

두유를 한 모금 빨며 검색창에 야간 진료 치과를 검색한다.




fin.



매거진의 이전글 [행운의 번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