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지리인데.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내 눈에 비친 모습은 딱 그랬다.
새내기로 입학하자마자 선배들 사이에 이름이 회자될 정도로 잘생긴 얼굴에, 세상 가벼운 깃털 마냥 촐랑대기만 하는 또래 남자 동기들과는 달리 적당히 점잖아 보이는 태도. 그는 흔한 스무 살짜리 남자들 가운데 유달리 저 혼자만 원석처럼 튀어 보일 법한 조건들을 다 갖추고 있었다.
외모만 독보적이거나, 분위기만 독보적이거나 둘 중 하나만 해도 사람들의 시선은 꽂히기 마련인데 저 놈은 둘 다 가졌다. 언뜻 보면 완벽해 보인다. 언뜻 보면.
그러나 안타깝게도 눈치 빼면 시체인 내 눈에 덜미가 잡혀버렸다. 그의 주변을 얇게 감싸고 있는, 일종의 보호막 같은 게 보인다. 말랑한 젤리 같이 생긴 빙구 보호막 같은 게.
“쟤... 어디 좀 모지란 구석이 있어. 내 눈에만 보여?"
"어. 네 눈에만 그래 보이시는 거예요. 야, 쟤 요즘 우리 동기 여자애들이 말 한번 섞어보고 싶다고 난리야.”
희진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듯 내 팔뚝을 찰싹 때리며 격렬하게 반박했다. 그러다가 급기야 양손으로 턱까지 괴고 강의실 맨 앞 줄 그놈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한다.
아닌데. 저거 분명히 모지리인데... 강의실 앞문을 벌컥 열어재낀 교수님의 등장에 갸우뚱거리던 고개를 바로 잡고 못내 전공 책을 펼쳤다.
"안녕하세요, 누나! 저희 전공 수업도 같이 듣죠?”
“어. 그래. 안녕."
싱긋 웃어 보이는 모지리. 아니 아직까지는 모지리로 추정되는 이 놈과 하필 같은 조가 됐다. 여기서 말하는 같은 조란 그냥 평범한 조별 과제를 하기 위한 조가 아니다. 남학생 한 명, 여학생 한 명이 한 조가 되어 같이 영화를 보고 영화 속 인물들의 심리를 분석해 발표하는 심리학 교양 수업.
아 제길. 아무리 학점이 모자라도 이런 교양은 안 듣는 건데. 딱 2학점이 모자라 만만한 교양으로 하나만 듣겠다고 아무 생각 없이 신청한 게 바로 이 강의. 봄마다 겹겹이 만개하는 벚꽃 마냥 CC의 꽃이 피어나는 곳이라 불리는 이 교양 수업이었다.
“누나는 언제 시간 괜찮으세요? 저는 다 좋은데."
개강 첫날 오가다 마주친 동기가 소개를 시켜줘서 잠깐 통성명 정도만 했을 뿐인데 녀석은 나를 누나라고 잘도 부른다.
"나도 아무 때나.. 괜찮긴 한데. 근데 무슨 영화 볼지부터 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번에 개봉한 스파이더맨 보셨어요? 아직 안 보셨으면 그거 어떨까요?"
“그래. 뭐.. 원래 그런 히어로 무비 좋아해?"
“딱히 히어로물을 좋아한다기 보단 주로 제작비 많이 들어간 대작 영화 좋아해요."
"어?"
“500억 들여서 만든 영화를 만원 내고 보는 거잖아요.”
난다. 강렬한 모지리의 향기가. 그것도 물씬.
"어? 어.. 그래, 그럼 그거 보자."
이상한 논리에 납득당해버려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 거리며 대답했더니 녀석이 재밌겠다며 해사하게 웃는다. 넓은 어깨를 들썩 거리면서. 어쩌면 모지리 중에서도 깨나 순수한 축에 속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연강이라 10분만 쉬었다가 다시 시작한다는데 교안은 있어?"
“네! 있어요! 아까 앞에 프린트 카페에서 뽑아 왔어요.”
어린이집을 다니는 아들램이 오늘 선생님께 칭찬받은 일을 엄마한테 자랑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백팩에서 꼬깃한 종이 뭉치를 꺼내 든다. 잘생긴 얼굴, 아니 잘생긴 가방에서 쓰레기 같이 구겨진 교안이 나왔다. 마술사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갑자기 비둘기를 꺼내는 것만큼이나 이질적인 광경이다.
"어, 이거 왜 이렇게 구겨졌지."
그래도 당황스럽긴 한 건지 크기도 큰 손바닥으로 열심히 펴보지만 종이는 주름을 펴줄 생각이 없다. 언뜻 본 녀석의 귓가가 빨개져 있다.
“…. 이거 너 써."
새 학기마다 늘 여분으로 들고 다니는 클리어 파일을 꺼내 하나 건넸다.
"그리고 이거 같이 봐 오늘은."
"우와, 누나 최고예요! 감사합니다!"
내 교안을 슬쩍 밀었더니 기다렸던 사람처럼 넙죽 받아 본인과 내 사이의 책상 정확히 한가운데에 반듯하게 펼쳐 놓는다. 모지리인 건 맞는데, 구김살이 없는 깨끗한 모지리구나... 정말 새하얘.
강의가 시작한 지 한참인데도 자꾸 입꼬리가 나도 모르게 비실거렸다.
어쩐지 이 귀찮은 치다꺼리를 오래도록 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