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장을 멈춘 겨울 식물을 보고 오는 길이다. 가장 싱그러웠던 날의 색을 내려놓고 수분이 다 빠진 식물들은온통 노르스름하다. 사람들은 이곳을 두고 봄이나 여름에 와야 볼 만하다고 말한다. 색을 잃고 잎을 떨군 가지는 볼품이 없다는 속내를 감춰두고 가을에는 참 근사했다고 말한다. 이곳을 늦가을 해 질 녘에 처음 찾았던 2년 전의 나도 너무 앙상하고 황량한 풍경이었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이듬해에 싹이 나고 잎이 무성해지니 이곳 수목원이 그렇게 근사할 수가 없었다. 한창 뻗어나가다가 울긋불긋해지고, 가지에 걸친 모든 것을 떨군 뒤에 다시 소생하는 수목원 식물들의 생장을 한 바퀴 지켜보고 나니 초겨울에 들어선 이 앙상한 숲이 멋져 보이기만 하다. 사계절 동안 자람과 시듦을 매일같이 지켜보고 나면 겨울 숲을 쉽게 볼품없다고 말할 수 없다. 겨울 숲을 관찰하다 보면 ‘볼품없다’라는 납작한 표현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식물을 관찰하는 눈이 깊지 않은 나는 고작 풍경의 단면만을 볼뿐이지만, 쉬어가는 계절을 식물 나름의 방식으로 견뎌내는 모습에서 지혜를 찾아낸다. 식물의 겨울나기를 지혜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지나온 영광과 예고된 계절의 희망을 덧칠한 해석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거의 영광과 미래의 희망을 소거하더라도 추운 겨울을 나는 것 자체도 살아 있음이며, 삶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요즘 내 시선은 정점 이후 시들어가는 모습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 생각해보면 내 숨에 이런 하얀 온기가 있음을 알아채던 때도 추운 겨울이었다. 폐까지 깨끗하게 훑어내는 듯한 차가운 공기를 짧아진 낮과 바꾼 교환 가치라 생각하고 깊게 들이마시며 좋아해 왔다. 아무리 추운 계절에도 우리는 살아 있다. 한꺼번에 살아나고 한꺼번에 시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마다 고유의 생장 주기를 가진 식물들이 변화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생장 주기를 따르고 겸허히 받아들이는지, 올겨울에는 사람 없는 마른 숲을 걸으며 종종 힌트를 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