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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박완서의 소설과 김수현의 드라마

너의 세상은 어떠니

by 디카페인라떼

엄마는 박완서 작가의 소설과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를 좋아했다. 엄마는 박완서 작가의 신간을 기다려 책을 샀고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를 챙겨봤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제목을 보고) 엄마 싱아가 뭐야?”라고 물었던 기억, 주말이면 저녁을 먹고 엄마 언니와 모여 앉아 <사랑이 뭐길래>나 <목욕탕집 남자들>을 봤던 기억이 난다.


드라마 속에서 이순재 할아버지는 대가족을 거느리는 집안의 실세였고 고두심 아주머니나 김해숙 아주머니가 주로 맏며느리로 나왔다. 엄마는 전남 곡성에서 태어나 곡성에서 자란 남자와 결혼했지만 젊은 아빠와 엄마는 인천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아이는 서울에서 낳았다. 소설과 드라마는 이제 막 도시에서 살기 시작한 주부 혹은 가족의 이야기였고 당시의 엄마에게는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오햐아아앙역~’을 눈물겹게 그리워하는 마음과, 막 지어진 아파트와 백화점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전벽해를 보며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두근거림 같은 게 동시에 있었던 것 같다.


엄마 나이 서른다섯에 우리 가족은 한 아파트에 살게 됐는데 당시 여덟 살이던 내 기억에 현관을 열었는데 집이 끝없이 넓어 보였다. 아마 그 전의 집을 기준으로 생각했던 착시였을 것이다. 엄마는 그 집을 비둘기색으로 칠하고 비둘기색 붙박이 책장을 짜 넣었고 거기에 세계문학전집 동아 백과사전 같은 걸 시리즈로 사서 꽂아주었다. 아마도 아빠의 사업이 가장 잘 되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젊은 아빠와 엄마가 누렸던 길지 않던 호시절.

그 아파트에서 우리는 내가 서른다섯이 될 때까지 살았다. 그 후 부모님의 세월은 서울에서 내 집한칸을 지키는데 쓰였대도 과장이나 비약은 아니다.


가끔 케이블 채널을 아주 많이 돌리다 보면 옛날 드라마를 틀어주는데 엄마는 어떻게 용케 그 채널을 찾아내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를 본다. <무자식이 상팔자> <부모님 전상서> <불꽃> 등의 작품이다. 그 옆에 앉아서 같이 드라마를 보노라면 여전히 재밌다는데 놀라고, 당시 왕성하게 활동하던 배우들 중 아주 일부만 현재 볼 수 있다는 데 놀란다. 그리고 내가 엄마가 그 드라마들을 즐겨 보던 나이에 가까워 왔음에, 내 무릎아래에서 둥근 등을 보이며 블록을 쌓는 아이가 있음에 놀란다.


아이에게 나는 어떤 엄마로 기억될까. 식탁에 컴퓨터를 켜 두고 뭔가를 계속 치던 엄마..? 화장실 간다면서 화장실에 앉아 책을 읽던 엄마..? 드라마를 볼때면 티슈 한곽을 옆에 두고 뽑아 울던 엄마..? 매일 트레이닝복을 입고 함께 뒹굴다가 한 달에 일주일은 차려입고 나가 집에 들어올 때면 빵을 한가득 사 오던 엄마..?


나는 여전히 박완서의 소설과 김수현의 드라마를 보며 젊었던, 엄마를 떠올린다. 한 시대가 저물면 다른 시대가 온다. 엄마는 가끔 ‘우리 때 남진 나훈아 인기는 HOT나 god 못지않았어’ 하셨는데, 아이에겐 그들이 남진 나훈아 선생님처럼 느껴지겠지.


얼마 전만 해도 나는 인생이 아직 전반도 얼마 지나지 않았다 생각했는데 2세가 생기니 나의 생은 이제 한 변곡점을 지났다는 생각이 든다. 모녀라는 2차원이던 세계가 3차원이 된 기분. 이제 곧 내 일상이 누군가에 의해 기억될 삶일지도 모른다는 기시감이다.


아이야, 나는 김연수의 에세이와 김애란의 소설과 김은희 작가의 드라마를 좋아했어. 우리 땐 아이유의 노래를 듣고 토이의 노래를 불렀단다.


너의 세상은 어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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