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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린결말 Oct 13. 2022

소유적 인간에서 존재적 인간으로

살고 싶은 질문들


아침 설거지를 마치고 커피 한 잔을 들고 작은방 책상에 앉는 걸로 하루를 시작한다. 창문으로 선선한 가을바람과 짹짹거리는 새들의 아침 조회 소리가 한 움큼 들어오고 책상 위로 아늑한 아침햇살이 한 조각 내려앉으면 그 순간만은 누구도 부럽지 않다. 세상에 나보다 더 부자는 없다. 책을 읽든 글을 쓰든 아르바이트를 하든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과거의 내 사무실 책상에도 햇살이 있고 커피도 있고 새소리도 들렸겠지만 사무실 책상에 자유는 없었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내어 그 일에 즐겁게 매진하며 생활하는 모습은 단지 내가 상정한 이데아일 뿐일까. 머릿속에서만 가능하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 말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삶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데아를 이데아로 남겨두고 있다. 이데아와 현실의 차이를 인식하면서도 괴롭지 않다. 그 간극을 좁히려고 노력해야 할 텐데 억지 노력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나는 왜 괴롭지 않을까. 내가 누구보다 체념과 포기가 빠른 사람이라서? 아니면 이데아라고 설정한 모습이 혹시 나의 의식이 만들어낸 게 아니라 시대가 만들어둔 걸 내가 만든 거라고 착각했던 것일까. 실은 내가 정말 원하는 모습은 현실의 지금 모습인 건 아닐까.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 또는 그 활동의 대상'으로 정의되는 일. 반드시 명함에 단순 명료하게 적어 넣을 수 있는 일만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활’ 자체를 ‘일’로 치환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게 맞을 테다. 


여름 뙤약볕에서 빨갛게 익은 고추를 따며 땀을 뻘뻘 흘리는 노동의 고통과 기쁨을 만끽하고, 수확한 농산물을 가족들과 나누어 먹고, 세 마리의 고양이들에게 밥도 주고 물도 주고 쓰담쓰담도 하며 하루 종일 부대끼고, 읽고 싶은 만큼 원 없이 책을 읽고, 책상에 앉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 좀 써보겠다고 까불거리다가 수시로 낙담하다가, 백만 원 남짓의 돈을 위해 일주일에 하루 이틀 아르바이트를 하는, 지금의 생활 말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좋아하는 ‘일’은 한 줄로 명료하게 설명 가능해야 한다고, 이렇게 몇 줄로 줄줄줄 말할 필요가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서 치솟는다. 남들에게 바로 이것이오 하고 설명하면 턱 하니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일이어야 한다고 말이다. 


에리히 프롬은 말한다. ‘소유적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 기탄없이 응답할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고. 


나는 ‘일’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단지 '일'을 소유하는 건 평범하니 그 앞에 ‘좋아하는’을 붙이면 한층 깊이 있어 보였겠지. 좋아하는 일을 하는 나. 그런 나를 소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하고. 그게 아니라면 지금 여기서 내가 존재하고 생활하는 이 삶 자체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테다. 도시에서 소유했던 많은 것들을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한 줄로 똑 떨어지게 설명할 수 있는, 있어 보이는 일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은 여기서도 끝내 버리지 못했다. 


지금 여기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다 보면 소유적 인간에서 존재적 인간으로 조금이라도 나아갈 수 있겠지. 내 생각의 근원적인 부분을 인식해 낸 것까지가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오늘의 숙제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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