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읽기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지만, 그의 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상실의 시대>, 즉 노르웨이의 숲을 읽은 건 아마 대학교 때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난 정말 대학교 때 책을 많이 읽었다. 이건 자랑할 만 함.) 사람이 가득한 지하철 안에 서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던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페이지를 넘기며, '뭐야 이게???'라고 생각했지... <상실의 시대> 외에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어보려고 몇 번 시도는 했는데, 끝까지 읽어본 책은 거의 없는 거 같다.
그래도 양심상(?) 유명한 작가니까 그의 책을 읽어보려고 노력했는데, 나는 그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소설은 어떨지 모르지만 하루키의 에세이는 무척 재밌다. 만약 나처럼 하루키의 소설이 낯선 분들이 있다면 그의 에세이를 읽어보라고 권해보고 싶다.
아무튼 그래서. <루틴의 힘>을 다 읽고 꺼내 든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다. 2015년에 국내에 출간된 책인데, 초판 부수를 얼마나 찍어냈는지는 모르겠지만(하루키니까 만 부쯤 찍지 않았을까?) 초판 1쇄라고 찍혀있으니 나도 출간되자마자 구매했던 거 같다. 분명 그때 읽다 말았거나 다 읽었던 거 같다. 그때 이후로 몇 번을 더 읽으려 했던 거 같은데 여전히 전체적인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난다. 그저, 하루키가 야구를 관람하다가 '앗 소설가로 성공하겠다'라는 확신이 들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정말 성공했다는 영화 같은 일화 밖에는 기억에 나질 않는다.
그래서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다시 읽어보기로 했다. 표지가 맘에 든다. 내가 좋아하는 컬러의 핑크색 띠지에, 달리기로 탄탄하게 단련된 하루키 아저씨의 사진이 표지 정면에 떡하니 있다. 두께는 만만치 않다. <루틴의 힘>은 그래도 판형이 작고 챕터가 많은 책이라서 읽기 수월했는데,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의 1 챕터는 <루틴의 힘>의 2~3 챕터에 달하는 분량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일단 매일 최소 1 챕터씩만 읽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오늘 읽은 부분은 제1회, '소설가는 포용적인 인종인가'라는 챕터였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말하길, 소설은 마음만 먹으면 거의 누구라도 쓸 수 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나 발레리나로 데뷔하려면 어릴 때부터 훈련해야 하는데, 소설은 문장을 쓸 수 있는 능력과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 볼펜과 노트만 있으면 된다고. 그는 소설가가 되는 허들이 매우 낮다고 이야기한다.
하긴 국내만 해도 소설가들이 정말 넘쳐난다. 굳이 순수문학이 아니더라도 국내의 웹소설 시장을 살펴보면, 작가의 허들이라는 것이 그리 높지는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허들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무척 낮을 수 있지만 그 능력이 부족하거나 아예 없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높은 장벽일 것이다. 솔직히 무라카미 하루키는 처음 쓴 소설로 문예지의 신인상을 타서 '이렇게 간단해도 되는 거야?'라고 스스로 생각했을 정도로 재능이 있는 능력자이기에, 나처럼 평범하거나 이야기를 만드는데 소질이 없는 사람들이 애쓰는 기분을 잘 몰라서 소설가는 허들이 낮은 직업이라고 말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매년 노벨 문학상의 기대를 받는 위대한 소설가가 말하는 '허들이 낮음'과 나의 '허들이 낮음'이 똑같은 것도 이상한 일일 테다.
어쨌든 그는 소설가가 되는 일은 허들이 낮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소설가가 된 이후에 계속 전업 소설가로 사는 일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혜성 같은 신인 소설가가 등단해도 견제하지 않고, '올 테면 얼마든지 오시죠'라는 태도를 취하는 거라고 한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많은 '신인 작가'들이 조용히 어딘가로 사라져 갔습니다. 혹은 -오히려 이런 분이 사례로서는 더 많을지도 모르겠는데-소설 쓰기에 싫증이 나서, 혹은 소설을 계속 써내기가 귀찮아서, 다른 분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써낸 작품 대부분은-당시에는 나름대로 화제가 되고 각광을 받았지만-이제 아마도 일반 서점에서 입수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소설가의 정원은 한정이 없지만 서점의 공간은 한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p.19-
음, 아마 번역가도 비슷하지 않을까? 일단 산업 번역 먼저 이야기해보겠다. 번역가가 되는 건 의외로 어렵지 않다. 물론 처음에는 경력이 없어서 일을 얻지 못해 힘들 테지만, 내가 본 산업 번역가 지망생들 중 90% 정도는 1년 이내로 어떻게든 첫 번째 일감을 완수했다. 3시간 이내로 끝나는 짧은 일이든, 몇 달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든 첫 번째 일감을 잡긴 하더라. 하지만 일감이 보장되어 있는 고용 계약이 아니다 보니, 2, 3번째 일감을 수행하고 다음 일감으로 넘어가는 게 생각만큼 수월하지는 않다. 첫 번째 일감을 얻은 노력을 똑같이 리플레이해야 할 때도 있다.
나는 출판 번역에서 이런 부분을 더 강하게 느꼈다. 출판 번역의 새내기라 조심스럽게 이야기해보는데, 처음 시작할 때는 첫 번째 역서를 내면 두 번째, 세 번째 역서도 이어서 계속 의뢰가 올 거라는 막연한 느낌과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첫 번째 역서를 계약했을 때 꽤 기뻤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역서를 내는 건 의외로 첫 번째 역서를 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더라. 나의 두 번째 역서는 첫 번째 역서와는 전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루트로 일감을 얻었고, 두 번째 역서 일감을 받을 때는 첫 번째 번역서가 출간되지도 않은 상태여서 경력을 내세울 수도 없었으니 결국 첫 번째 역서를 내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을 반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웃기게도 세 번째 역서도 그러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역서와는 아무런 접점이 없는 곳에서 의뢰를 받아 세 번째 역서를 작업했다. 물론 이때는 첫 번째, 두 번째 역서가 출간된 상태였기에 그나마 경력으로 두 권을 내밀 수 있긴 했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번역가도 첫 번째 일은 어떻게든 해낼 수 있지만 계속 일감을 수주하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라는 부분에서 소설가의 약간 닮은 점이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했다. 초보 번역가 때, 번역일은 인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소문을 듣고는 '갖고 싶다, 일 들어오는 인맥...'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아, 지금도 갖고 싶다. 일이 꾸준히 들어오는 인맥... 그래도 최근 몇 년 간은 인맥으로 일감을 소개받은 적도 아주 간혹 있었는데, 그땐 정말 짜릿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렇더라.
어쨌든 하루키 아저씨는 40년 넘게 소설가라는 링 위에서 활발하게 주인공이 되고 있으니 멋있고 부럽기만 하다. 계속 버틸 수 있고 소설가로서 살 수 있는 그의 능력이 부러우니, 내일도 2챕터를 읽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