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장 10개월간의 재취업 준비 기간을 보냈다. 도중에 3개월 동안 단 하나의 서류합격조차 되지 않던 나날을 보낼 때는 마음이 조각조각 부스러져서 잘 붙여지지도 않고 손으로 그러모아지지도 않았다. 그 와중에 생활비가 부족해 빵집 아르바이트를 했었고, 감사하게 들어오는 마케팅 외주를 했고, 부모님 댁으로 돌아온 캥거루가 되었고, 작업실을 열었다. 운이 좋게 2025년 3월에 신청했던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의 예술활동준비금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공식적으로 가난한 문학예술인으로 인정받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가장 어렵고 포기하고 싶었던 때 통장에 300만원이 들어오니 글을 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 글에게 고마웠다.
사전에 준비한 계획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성격 탓에 이 에세이를 쓸 때도 목차를 다 정해 두었다. 이 글의 에필로그는 반드시 재취업에 성공한 이야기를 쓰리라 결심했는데 하도 탈락의 쓴 잔을 과음하다 보니 이 글을 마무리를 할 수나 있을지, 에필로그까지 버티기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기적같이 그걸 해낼 수 있게 되었다. 2025년 가을, 나는 을지로에 오피스가 있는 모 회사의 마케팅 팀장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그게 됐다.
그동안 몇 번의 면접을 거치면서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글로벌 요가웨어 브랜드 HR 담당자와의 영어 면접이었다. 담당자는 해당 브랜드의 APAC 거점인 홍콩 오피스에서 근무하는 젊은 여성분이었다. 외국인과의 첫 영어 면접을 앞두고 준비할 기간은 단 5일 뿐이었다. 5일 동안 스크립트를 만들고 광적으로 읽고 말하고 쓰고 녹음본을 들으며 외워댔다. 마이크로소프트 팀즈로 약 30분정도 미팅이 진행됐다. 준비한 내용에서도 질문이 나오고, 준비 안 한 질문도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 막힘이 없었다. 내 영어 실력이 그 정도는 아닌데, 워낙 간절하고 절실하다 보니 진심이 잘 통한 것 같다. 마지막에 긴장이 풀려 스몰토크를 하면서 '사실 제가 글로벌 회사와의 영어 면접이 처음이라 긴장했다' 라고 했더니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며 웃어 주셨다. 결론은 탈락이라 너무너무 아쉬워 후유증이 길었지만 이 브랜드에 대한 선호도만 더 높아지는 놀라운 경험이었다.
불쾌한 압박 면접도 경험했다. 마치 랠리를 이어가듯 1초도 쉬지 않고 질문을 던져대는 두 명의 면접관을 무려 90여분 간 상대해야 했다. 면접을 본 사무실 바로 근처에 보고싶던 대학 동기의 회사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얼마나 진이 빠졌는지 미처 연락도 못 할 정도였다. 얼마나 까다롭고 정교한 기준으로 사람을 채용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마지막에는 나도 날카로워졌다. 그 회사가 요즘 돌리고 있는 광고 소재에 대해 피드백을 솔직하게 던졌다. 고객으로서 나는 제품을 이용한 다른 고객의 생생한 리뷰가 더 궁금한데, 현재 콘텐츠에서는 제품을 만든 팀원들의 학벌, 전문성만 내세우고 계신 것 같다고. 결국 그 면접은 기본적인 합불 통보조차 받지 못하고 끝났다.
화룡점정은 PT 면접이었다. 최종 면접으로 20분간의 PT 면접을 준비하라는 메일을 받았다. 메일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일주일 안에, 20분 짜리 마케팅 전략 PT를 준비하라고? 과제비나 면접비가 있겠거니 했지만 일단은 묻지 않고 준비했다. 20여장의 장표를 만들어 디자인하고, 사전에 전달받은 면접관 수에 맞춘 인쇄물을 들고 면접장소에 도착했다. 사실 발표보다 자신있는 일은 없다. 대학교 4학년 때, 과제 발표를 대충 말로 때우려다가 지도교수님께 딱 걸려서 '말 좀 잘한다고 해서 준비를 미흡하게 해 오면 안 되는거야!'라고 호되게 혼난 이후로는 장표 준비도, 발표 준비도 목숨걸고 준비하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자연스러운 시선 처리와 완벽하게 숙지된 스크립트, 중간 중간 청중의 웃음을 만드는 여유로운 전달력, 꼼꼼하고 치밀하며 참신함도 더한 마케팅 전략까지. 다만 문제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업종이었다는 것이었다. 업계를 잘 모르시는 것 같아 현실 가능성은 부족하지만 일부 내용은 참신해서 바로 도입하고 싶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그리고 면접비와 과제비에 대해 전달받은 바 없이 탈락했다.
그리고 이 회사를 만났다. 면접 경험도, 합격 통보 과정도 모든 것이 나이스했다. 얼떨떨하게 '나 진짜 출근한다고? 3년 반 만에 정규직으로?'하며 출근일을 기다렸다. 출근 첫 주 만나는 모든 임직원들이 하나같이 다 나를 기다려왔다고 했다. 저를요? 나에게 거는 기대도 크고, 내가 없어서 그동안 힘들고 막막했는데 정말 다행이라고, 내가 해 줄 역할이 이 회사에 꼭 필요하다며 이 팀 저 팀에서 고맙게도 환영의 제스처를 보냈다. 10개월간 바닥에 바닥을 쳐 뚫고 내려간 효능감이 강제로 치솟는 경험이었다. 내 자리도, 명함도, 동료도, 곧 들어올 월급도 생겼다.
퇴근 후 처음으로 나의 작고 예쁜 작업실에 갔다. 익숙하게 환기를 시키고 제습기를 켜고 인센스스틱을 피우며 의자에 기대어 쉬었다. 냉장고에서 시원할 물을 한 잔 따라 마시면서 더 이상 여기서 이력서를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해방감을 느꼈다. 회사에서는 회사를 위해 즐겁게 일하고, 이제는 여기서 나를 위한 일과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이 방에서 나는 이제 어떤 것들을 만들어 가면 좋을까? 누구를 초대하고 누구와 나누면 좋을까? 내가 만든 이 대안적인 독립의 공간이 이제 나에게 위로와 치유의 공간이 되기를, 또 다른 창조와 향유의 공간이 되기를 바라 본다.
---
지금까지 이 시리즈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은 미공개 원고를 포함하여 2025년 12월 경 독립출판으로 출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 마음의 바닥을 짚어 가는 여정에서 덕분에 쓰는 데 큰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정말정말로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