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안적인 노동이야기
겨울은 프리랜서에게 비수기다. 특히 강연 노동이 시간당 가장 큰 수익원인 나로서는 제대로 비수기를 맞이하여 말 그대로 월세를 낼 돈조차 부족했다. 재취업을 하고자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었고, 모 스타트업은 3차면접까지 나를 탈탈 털고 나서 결국 탈락시켰다. 진이 빠졌다. 어떡하지? 알바라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십 몇 년만에 아르바이트 구인구직플랫폼에 로그인했다. 무려 13년 전 대학생 때 파리바게뜨 알바를 1년간 해 본경험이 있었다. 마침 집 근처 가까운 거리에 오픈 알바 자리가 났고, 면접을 보러 갔다.
이 가게는 젊은 남성 사장님이 빵을 만들고, 그의 어머니가 일손을 돕는 가족 경영 매장이었다. 13년 전 일했던 매장도 남매가 운영하는 매장이긴 했다. 어머니가 면접을 봤고, 내 나이를 듣더니 당연히 기혼 여성일거라 생각했는지 아이가 몇살이냐 물었다.
"저 결혼 안했어요. 싱글이예요."
"그래요???"
갑자기 눈과 목소리가 커지신 어머니는 단박에 내가 마음에 든다는 눈치셨다. 일머리 있는 30대인데, 애도 없어서 돌발상황도 안 생길 것 같으니 그랬나 보다. 그러면서 유자녀 알바들에 대한 약간의 험담을 하기도 했다. 영업용 미소를 지었지만 조금 씁쓸했다. 어디서는 저출생이 문제라던데, 여기는 자녀가 있는 여성을 선호하지 않는다.
알바는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다. 매일 새벽 늦게 잠들어 동생이 출근한 다음에 일어나던 나는 주 3일 6시에 일어나 6시 반에 출근을 했다. 패턴이 고정되어 매일 6시면 깨는사람으로 바뀌었다. 7시에 출근하면 오후 1시까지 6시간동안 매장에서는 단 한 번도 앉지 못했다. 아예 의자가 없었다. 다리 부종이 너무 심해 압박 보호대를 하고, 알바가 끝나고 집에 오는 15분이 견디기 힘들어 도중에 공원에서 잠깐 쉬기도 했다. 그 무렵, 어디든 기댈 데가 필요해 즐겨 듣는 팟캐스트에 이렇게 사연을 보냈다.
지난주부터 대학생때 6개월정도 해본 베이커리 프랜차이즈 알바를 다시 시작했어요.
일감이 없으니 수입이 줄어 경제적으로 힘들어졌기 때문이에요.
주 3일 아침 7시부터 오후 한시까지, 빵을 포장하고 커피를 내리고 그것들을 열심히 팔았습니다.
강의를 할때는 시간당 30만원 정도를 벌었지만, 프랜차이즈 알바는 당연히 최저 시급, 만 삼십원을 법니다.
무엇보다 하루 6시간 서 있어야 하는 육체노동, 감정노동이 생각보다 더 고되더라고요.
다리와 허리가 아프고, 까다로운 손님이 오면 당황스러워 힘이 들고요.
다행인 것은 사장님은 친절하시고, 열살 어린 알바 선배들도 일을 차근히 잘 가르쳐 주었습니다.
만 삼십원과 삼십만원. 무려 30배나 차이가 나는 돈입니다.
그러나 내가 30배 적은 돈을 받는 일이 그만큼 가치 없는가? 라고 묻는다면, 절대 아니었어요.
집에서 15분 거리인 매장에 7시까지 출근하기 위해
아침으로 바나나 한개와 액상 아르기닌을 챙겨먹고 어둑한 시간에 집에서 나서요.
그런데 생각보다 상쾌하고, 마냥 힘들지 않더라고요. 오랜만에 루틴이 생겼다는 감각이요.
(알바 전에는 새벽 3시에 잠들어 낮에 깨는 방탕한 생활을 했었습니다)
어제는 혼자 유아차를 끌고 온 젊은 엄마 손님이 나가실때 얼른 뛰어가서 문을 열어 드렸어요.
너무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제가 필요한 존재라는 감각이 들어 좋았습니다.
또 퇴근을 할 때 '고생하셨어요. 다음주에 봐요.' 하는 사장님과 동료들의 인삿말도 괜히 뭉클했어요.
용기를 내어 알바를 시작한 것이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족과 친한 친구들에게는 알바 시작 소식을 알리긴 했지만, 사실 부끄러워요.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 이 시기를 잘 버티기 위해 하고 있는 노력이지만 사회적으로 봤을 때 분명 누군가는 제가 뒤쳐졌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지금 저는 오히려 제가 저를 얼마나 아끼고 귀하게 생각하는지 깨닫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스스로가 기특하다고 여겨졌던 한 주였어요.
다음주에 또 무한대로 빵을 포장하고, 팔고 있겠죠?
이제 더 이상 빵이 맛있어 보이지 않아요.. 그냥 예쁜 소품 처럼 느껴집니다.
지금 제 목표는 두 달 안에 새로운 풀타임 일자리를 구해서 알바를 그만두는 것이랍니다.
그 날이 오면 또 소식 전해 드릴게요.
알바는 그 때의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적인 노동이었다. 양질의 정규직 일자리가 빨리 구해지지 않으니 일하는 시간을 늘리고 몸을 써 어떻게든 월세를 벌었다. 그렇게 번 100여만원의 월급이 정말 귀해서 입금 내역을 보고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만원이 새삼 귀하게 느껴져, 친구와 농담으로 5만원 짜리 물건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이거 5 파리바게뜨네'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월셋집을 내놓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집이 나갔고,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게 되어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되었다. 생각보다 오래 근무하지 않아 실망이라며 사장님은 퉁명스럽게 대했지만, 마지막 날에는 자상하게 배웅해주셨다. 그새 정이 든 사장님 어머니는 마지막 근무 날 살짝 눈물을 글썽거리시는 것 같아 놀랐다. 어디서든 잘 살아, 놀러 와. 앞으로 여기 다시 오면 일하러 오는 것이 아니라 놀러 오는 거라니, 그건 좀 괜찮은 마무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