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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빨리 나가는게 좋지 않아?

엄마는 아니래요.

by 비잉벨

또 엄마를 울렸다. 엄마와 나는 꽤 사이 좋은 모녀처럼 보인다. 음악이나 공연, 전시를 좋아하는 취미가 같아 자주 데이트도 하고, 집에서 도란도란 이야기도 많이 나누고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이다. 그러나 도대체가 반나절 이상 붙어 있으면 꼭 말다툼이 벌어진다. 애초에 엄마와 나는 정서가 안맞는다. 나는 담담한 다큐같은 인간이고, 엄마는 드라마퀸이니까. 나는 차분하고, 엄마는 매우 산만하다. 내가 설거지를 하면 건식 주방이 되지만, 엄마가 설거지를 하면 거의 아쿠아리움 수준으로 물이 튄다. 게다가 엄마는 초고난이도의 '여자어'를 구상하는 60년대생 한국 여성이다. 절대 원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아니하시며, 상대가 섬세한 배려와 애정으로 자기 마음을 미루어 짐작해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아빠가 가장 못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대접받는 기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신경써서 식사와 커피, 작은 선물을 평소에 챙기고 외출 할 때는 제대로 된 데이트 코스를 짜 와서 엄마가 마치 음악방송 사녹 간 중학생들처럼 꺄르르 웃는 얼굴을 보아야만, 그렇게 우리의 평화를 지켜야만 한다. 집에 들어오고 나서는 엄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농담삼아 친구에게 말했다.



'나...와이프가 생긴 느낌이야...'


그 날은 서천 시골집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던 어느 주말이었다. 집안일 방식 문제로 이게 맞니, 저게 맞니 하며 티격태격하다가 내가 한 마디 쏘아 붙였다. '알겠어! 내가 빨리 나가서 살면 되잖아.'

그 말이 그렇게 서러웠을까? 식사 후 함께 나간 산책 내내 엄마는 눈물바람이었고, 나는 당황했다.


"아니, 이 나이에 집에 들어와서 사는 거, 캥거루인거 별로지 않아? 그냥 빨리 다시 독립하는게 좋지 않아?"

"....(훌쩍)"

"???"


미칠 노릇이었다. 왜? 내가 집에 돌아와서 사는 이 구질구질한 모습이 정말로 좋은 건가? 부끄럽다거나, 꼴보기 싫지 않고? 나는 내 모습이 정말 수치스럽고 싫은데. 다행히 함께 산책을 나간 동생은 엄마 특유의 여자어 1급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몇 발짝 멀찌감치 떨어져 걸으며 동생이 엄마와 소근소근 대화를 나눠 보더니 알려주었다


"그 말 자체가 서운한 거래! 언제든 나가겠다는 말!"


사실 여전히 모르겠다. 집에 다시 돌아온 것, 완전한 독립을 하지 못한 것에 나는 여전히 죄책감을 느낀다. 그런데 엄마는 내가 돌아와서 어찌나 좋은지, 언제든 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한 태도는 또 서운하시단다. 딸이 없어 봐서 모르겠지만 이게 엄마의 사랑이라면 그냥 받아들여야겠다.


엄마는 몇년 전부터 캘리그라피 협회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작품을 만든다. 그 날은 정기 전시 출품을 앞두고 엄마가 조용히 글씨 연습할 공간이 필요해 보이길래 작업실을 내어 드렸다. 2시간 정도 지났을까? 작업실에 와 보니 엄마는 옆에 화선지를 잔뜩 쌓아 두고 붓펜을 든 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똑같은 글씨만 도대체 몇 백번을 쓴 건지, 대단한 집중력이었다. 그런데 작업실 벽에 붓펜으로 스친 자국이 보였다. 어머니...


"벽에다 새 그림은 왜 그린거야?"

"응? 무슨 새 그림? 안 그렸어?"

"저기..."

"어머나!!!"


엄마는 아쉽게도 신사임당의 재능은 없어서 벽에 튄 새 모양의 붓펜 자국을 예술로 승화시켜주진 못했다. 그래서 결국 그 얼룩을 가리려고 내가 가지고 있던 그림 엽서를 핀으로 꽂았다. 여전히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잠시 빌려 쓰는 딸애의 작업실 벽에 실수로 붓펜을 그어버리는 천진난만함을, 다 큰 딸이 창업도 취업도 못 하고 집에서 빌빌대는대도 무사히 돌아와서 그저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랑스러움을 나는 평생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IMG_4905.jpeg 문제의 붓펜자국



https://www.youtube.com/watch?v=UtTc1D5ExOM

너의 기쁨이 나의 행복

이어질 멋진 무대에 끝없는 힘을 보여줄 거야

기댈 수 있는 사랑이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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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류 <일인칭 관찰자 시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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