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히 습관적으로 수행하는 일이 아니라 조금 특별한 의미를 두고 일상에서 반복하는 행동을 '리추얼'이라고 한다. 나는 모 플랫폼에서 명상 리추얼 메이커로서 1년 반 정도 프로그램을 활동하기도 했다. 내 MBTI는 INFJ, 그중에서도 J의 자기주장이 가장 강하다. 계획 세우는 것도 좋아하고 나만의 매뉴얼,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즐긴다. 문제는 성실하게 반복만 잘 하면 될텐데, 그럼 아마 여태까지 하고 싶은 목표를 다 이뤄버린 인간미 없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작업실을 꾸리고 공간의 안정을 찾게 되면서 나는 어김없이 리추얼을 만들고야 말았다. 자잘하게 사부작거리는 다양한 리추얼 중에 자주 반복하는 세 가지에 대해 써 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커피와 차 리추얼이다.
앞서 <작업실의 물건들>에서 기술했듯이 나는 마시는 것을 참 좋아한다. 커피 원두와 찻잎들, 핸드드립 도구 등을 구비해 주방 한 켠 코너에 넣은 민트색 트롤리에 잘 정리해 두었다. 커피 원두는 예전에 분당에 살 때 단골 원두 가게가 있어 늘 마시던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다 떨어지면 이제 어디서 내 입맛에 맞는 원두를 사야할지 조금 걱정이다. 적당한 산미가 있고 로스팅이 강하게 되지 않은 커피를 좋아한다. 커피를 내려 마시는 리추얼은 커피 원두를 전용 스푼으로 크게 한 스쿱 떠서 블렌더에 넣고 잘게 갈면서 시작된다. 10초 정도 큰 소음을 내며 원두가 갈린다. 갈갈갈갈!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다. 그 다음 커피 포트에 물을 올린다. 회사에 다닐때 사수가 생일 선물로 사 주셨던 연분홍색 '드롱기' 커피 포트다. 신주 단지 모시듯 아끼며 쓰고 있다. 갈린 원두를 빨간색 '하리오(HARIO)' 플라스틱 드리퍼에 종이 필터를 받치고 담는다. 그 다음 끓인 물을 핸드드립 포트에 부어 원두 위에 살살 붓는다.
이 시점에서 그 날의 마음 상태가 드러난다.
마음이 급한 날에는 물을 확 부어 버리고,
조금 여유가 있는 날에는 아주 천천히 물이 여과되는 것을 즐길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커피 리추얼이 내 상태를 알아차릴 수 있는 자기 돌봄의 리추얼이라고 생각한다. 물을 부으면 커피 향이 퍼지면서 숨을 깊이 들이쉬게 된다. 날씨에 따라 얼음을 타거나, 아니면 그대로 그냥 마신다.
차를 마시는 리추얼은 과정이 비교적 간결하다. 다이소에서 산 다시백만 있으면 끝이다. 지금 구비해 둔 차 종류는 고소한 맛의 지리산 하동 녹차, 동생이 일본 여행에서 사다 준 달큰한 호지차, 은은한 초콜릿향이 매력적인 가향 홍차까지 총 세가지. 얼마전에 친구들이 놀러오기로 한 날에는 전날 미리 초콜릿 홍차를 우려 2L 짜리 유리병에 담아 두었는데, 다들 너무 향긋하고 매력적이라며 맛있게 잘 마셔 주어서 고마웠다.
두 번째 리추얼은 명상이다. 기업과 기관 등에서 명상 워크샵을 진행해 본 적도 있고, 꾸준히 명상을 안내하고 있지만 명상은 하면 할 수록 끝이 없고 습관으로 만들기 어렵게 느껴진다. 정말 운동, 다이어트와 똑같다. 명상을 할 때는 뇌에서 주의력, 집중력과 관련된 부위인 전측대상회, 섬엽, 전전두엽 부위가 자극되는데 마치 스쿼트와 플랭크를 하면 코어 근육이 길러진다는 운동 상식과 같은 구조다. 다이어트도 우리 모두에게 불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하지 않는 것이라는 상식이 있지만 지키기 어려운 것처럼, 자극적인 콘텐츠와 무의미한 재미 요소를 일상에서 피하기 쉽지 않다. 그럴 때 명상을 하려고 한다. 일을 하겠다고 노트북을 켜 놓고 유튜브를 보고 있는 나를 의식했을 때, 의미없이 자꾸 핸드폰을 확인해보다가 화들짝 정신이 들 때는 2가지 앱의 도움을 받는다. 하나는 포레스트(Forest), 다른 하나는 인사이트 타이머(Insight Timer)이다. 포레스트는 30분 이상 핸드폰을 보지 않고 무언가에 집중하려 할 때 켜는 앱이다. 핸드폰을 잠금해 둔 시간 만큼 앱 내의 정원에서 꽃이나 나무를 키울 수 있다. 포레스트 앱을 자주 사용한 달이면 정원에 식물이 예쁘게 빼곡하게 장식된다. 조금 더 집중적인 명상이 필요할 때는 인사이트 타이머의 타이머 기능을 사용한다. 보통 10분 정도, 눈을 감고 명상음악을 들으며 호흡을 한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피하지 않고 연기처럼 스르륵 흩어질때까지 잠시 바라봐 준다. 몇년 전 차명상 수업을 하는 지인의 추천으로 알게 된 이 앱을 아직까지 애용하는 이유는 명상음악과 시작, 끝 종소리 커스텀 기능이 마음에 꼭 들기 때문이다. 10분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시 내 안을 들여다 보는 것 만으로 막혔던 마음이 조금은 풀린다.
무슨 문제든 결국 해답은 안에 있다는 말을 이 리추얼을 통해 매번 깨닫는다.
작업실에서 하는 마지막 리추얼은 요가다. 명상과 비슷한 듯 하지만 몸을 움직이고 깨운다는 점이 다르다. 할 일이 있는데 도저히 머리가 움직여지지 않을 때, 차라리 몸을 깨워서 에너지의 발산 방향을 안에서 밖으로 바꿔야 할 때 요가를 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서 작업실 서랍장에는 항상 편한 바지나 레깅스를 하나씩 둔다. 수리야 나마스카라(태양경배자세)를 5~6번 반복하며 몸을 깨운다. 컨디션이 안좋으면 일어설 때 머리가 핑 돌기도 한다. 어느정도 몸이 풀린 것 같으면 전굴(몸을 앞으로 굴절하는 동작)이나 후굴(몸을 뒤로 굴절하는 동작) 아사나 중 기억나는 것 몇 가지를 해 본다. 마지막은 꼭 시르사 아사나(머리서기)를 도전하는데, 사실 나는 아직 벽이 없으면 시르사 아사나를 할 수 없는 초보자이다.
그래서 나의 작업실 요가는 결국 근력이 아니라 붙박이장으로 완성된다.
작업실 벽 한 켠에는 머리서기 도움닫기에 최적화된 아주 훌륭하고 거대한 붙박이장이 있어 다행이다. 짧은 요가를 하고 나면 뿌듯하다. 작업실에서 15분 근처 요가원에 등록해 두어서 제대로 요가를 하려면 요가원에 가서 수련하기도 한다. 요가는 이상하고 신기한 운동이다. 하면 할 수록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요가 선생님들은 늘 '잘할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다. 그 말이 위로가 된다. 작업실에서의 리추얼은 잘 할 필요가 없는 일이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