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을 알면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
1. 본질을 정확히 이해할수록 사고는 자유로워진다.
1.1. “강아지는 공원에 출입할 수 없습니다”라는 규정. 누군가가 늑대를 가지고 공원에 들어오고자 한다. “이건 강아지가 아니라 늑대입니다” “그렇군요, 늑대가 공원에 출입할 수 없다는 말은 없습니다. 들어가세요” “감사합니다”.
1.1.1. 이것은 잘못된 규정의 해석일 것이다(물론 금지되지 않은 것은 허용된 것이며, 국가의 공권력 행사로서의 금지의 근거가 되는 규정은 엄격하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이 논의의 맥락에서 벗어난 지적이다). 우리는 규정을 해석함에 있어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강아지는 공원에 출입할 수 없는가? 강아지가 공원에 출입할 수 없다면 늑대는 공원에 출입할 수 있을까?
1.1.1.1.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반복적으로 던져야 한다.
1.2. 본질이란 무엇인가?
1.2.1. 무엇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무엇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예시: 의자란 무엇인가? 의자는 개체가 앉을 수 있는 물체이다. 다시 말해 의자의 본질은 ‘앉을 수 있음’이다.
1.2.2. 본질의 본질은 무엇인가?
1.2.2.1. 어떤 결과 x(0)의 원인으로서의 x(1)을 생각할 수 있다, x(1)을 결과로 하여 그 원인으로서의 x(2)를 생각할 수 있다, ... x(n)의 원인으로서의 x(n+1)을 생각할 수 있다, ...
1.2.2.2. 위의 과정은 무한히 반복될 수 있으나, 어느 수준에 이르면 - 이론적인 의미는 있을지 모르나 - 더이상 현실적인 의미가 없어진다.
1.2.2.2.1. 관련하여 다음의 영상을 살펴볼 수 있다(파인만의 인터뷰 영상): https://youtu.be/3smc7jbUPiE
(사실 이와 관련되어서든 아니어서든 해당 영상은 볼 가치가 충분하다; 파인만의 행복해하는 웃음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가 있다)
1.2.2.2.2. 더이상 원인을 묻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x(i)를 x(0)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본질은 {결과, 원인}쌍을 규정하는 인과 분석을 충분히 재귀적으로 반복했을 때의 원인이라고 설명될 수 있다.
1.2.2.3. 본질의 본질은 인과이다.
2. 본질을 이해하면 왜 사고가 자유로워지는가?
2.1. 무엇의 본질이 무엇이라면, x의 본질이 y라면, 무엇은 무엇 때문에 무엇인 것이며, x는 y 때문에 x인 것이다: y는 x의 원인의 원인의 ... 원인이다.
2.2. 무엇은 무엇인가? 무엇은 무엇을 가지는 것이다. x는 무엇인가? x는 y를 가지는 것이다.
2.2.1. 그렇다면 무엇에서 무엇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제거하거나 변형하거나 추가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무엇은 무엇이다. x에서 y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제거하거나 변형하거나 추가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x는 x이다.
2.2.1.1. 이것이 본질의 본질에서부터 파생되는 본질의 특성이다.
2.2.2. 그러므로 본질은 대상의 축으로서 기능한다: 본질을 축으로 하여 회전시키더라도 대상은 동일성을 유지한다. 축이 흔들리지 않는다면 나머지 것들을 자유롭게 변형될 수 있다.
2.3. “강아지는 공원에 출입할 수 없습니다”라는 것은 타인의 공원에서의 평온을 해칠 수 있는 동물을 반입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쩌면 소음 때문에, 어쩌면 위협 때문에, 어쩌면 배설물 때문에. 그러므로 강아지가 공원에 출입할 수 없다면 늑대 역시 공원에 출입할 수 없다.
2.3.1. 반대로 시민의식이 충분히 성숙하여 공원에 강아지가 출입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강아지는 공원에 출입할 수 없다”라는 것은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다, 그것은 수정될 수 있다.
3.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형식적인 것과 표상에 집착한다, 그들은 유연하지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