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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룰루 Oct 17. 2024

런던에서 2년 동안 뭘 할 건데

하도 많이 물어보셔서 그냥 글로 답합니다

런던이 지겹다면 인생이 지겨운 것이다. 런던에는 인생에 향유할 만한 모든 것들이 있다.
When a man is tired of London, he is tired of life; for there is in London all that life can afford. - Samuel Johnson

런던을 본 것으로 나는 세상이 보여줄 수 있는 삶의 대부분을 본 셈이다.
By seeing London, I have seen as much of life as the world can shew. - James Boswell, Journal of a Tour to the Hebrides     

 런던으로 떠날 짐 정리를 마치고 2년 동안 무엇을 해야 할지에 대한 숙제가 남았다. 남편과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면 되다지만, 나는 그들이 학교 간 사이에 무엇을 해야 할까?


 아이를 낳고 난 후 나는 매일 ‘회사에 다니는 나’와 ‘아이들의 엄마인 나’와 ‘그냥 내 자신이고 싶은 내’가 매일 투닥거리는 삶을 살았다. 회사에서 일하는 중에 어린이집에서 아이가 열이 난다고 연락이 오면 사무실에 찝찝함을 남겨 둔 채 내 이름 석 자를 던지고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 달렸다. 퇴근 후 저녁 늦은 시간이나 주말 낮에 아이들과 노는 중 갑자기 사무실에서 급한 연락이 (빈번하게) 오면 놀아 달라고 우는 아이들 곁에 미련 많은 엄마를 남겨 둔 채 방문을 닫고 일하곤 했다. 회사는 지독할 정도로 신속한 답변을 요구했고, 우는 아이들을 제쳐 둔 채 베란다 문을 닫고 통화하는 일도 많았다. 매일매일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이제는 뭐가 되었든 둘 중 하나에 집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런던으로 떠났다. 나의 목표는 명확했다. 아이를 낳고 뒤죽박죽으로 섞인 내 생활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단순한 삶 속에 내가 좋아하는 일들로만 시간을 꽉 채우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내 일상에 군더더기 시간을 잘라내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 비워낸 시간을 채워야 했다.


 우선 2년 동안의 일정을 크게 나누었다. 남편과 아이의 학사일정(Term Date)을 엑셀로 정리해서 휴가철과 학기를 구분했고, 큼직한 휴가는 대략적인 일정을 추려 놓았다. 영국의 학교는 3학기제로 구성되어 긴 방학보다는 학기 중 짧은 방학이 많았는데, 대학교 일정과 초등학교 일정이 묘하게 어긋났다. 심지어 초등학교 일정이 더 빠듯하여 학기도 더 길고 방학은 찔끔찔끔 있을 뿐이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학교를 빠지면서 비수기의 유럽 여행을 즐길 것이냐, 성수기에 돈을 왕창 쓰면서 학교를 나갈 것이냐. 학창 시절 12년 개근한 엄마와 아빠가 꾸린 가정에서 사실 답은 너무나도 정해져 있었다. 성수기에 (경제적 압박으로) 길지 않은 휴가를 가더라도 남편과 아이들의 학교는 성실하게 나간다는 가족 방침을 정했다. 사실 한국에서는 4년 동안 제대로 된 휴가도 가본 적이 없었으니 예측 가능한 시기에 휴가를 갈 수만 있어도 감지덕지였다. 런던까지 가서 너무 미련한 것 아닌가, 여러 번 생각했지만 아이 학교 교장 선생님이 면담에서 ‘아이가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단계에서 올바른 루틴을 잡아주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출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모습에서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아이에게는 첫 학교생활이니 어른들이 하고 싶은 일때문에 아이들의 일상을 침범하지 말자고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런던 생활의 단순한 틀이 잡혔다.

광기어린 엑셀을 보고 남편은 뒷걸음질을 쳤다...

 이제는 세부적인 일상의 루틴을 마련할 차례였다. 반복적으로 해야 하는 장보기, 밥하기, 운동하기 일정을 매주 일정한 시간에 배정하고, 그 외 시간을 내 개인 시간으로 채우는 작업을 진행했다. 시간 관리와 관련한 여러 가지 책에서 제안한 방법을 조합해서 구글 캘린더에 분 단위로 매일 일과를 설정하되, 나만의 시간 배분 원칙을 세웠다. 반복적인 집안일은 회색,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노란색, 무언가를 생산하는 시간은 빨간색, 무언가를 습득하는 시간은 초록색으로 구분했다. 한국에서부터 연습하면서 매주 일요일 저녁 다음 주 일정을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려고 노력했다. 런던에 온 1달 반 동안 거의 매일 일정을 세웠다. 꼭 맞게 지키는 날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일정표를 미리 고민하고 살다 보니 상황에 따라 일정을 조정하더라도 큰 틀에서는 비슷비슷한 하루를 살고 있다. 반복적이고 단순한 일상에 조금씩 적응하는 중이다.

     

 남은 과제는 아이들을 보고, 집안일을 하는 시간 외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였다. 내 옷 하나 내 취향을 모르는 30대 후반의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무엇을 2년 동안 계속하면 후회하지 않고 런던을 떠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우선 그냥 하고 싶은 일을 적었다.

 - 고전 영문학책 읽고, 런던 문학기행
 - 매일 런던에 있는 박물관, 미술관 가기
 - 꾸준히 글쓰기
 - 영어로 스몰토크 자유롭게 하기
 - 운동하는 습관 들이기

적고 보니 여태 이걸 왜 못했을까 싶은 것들이었다. 한국에서도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왜 지금까지 못 하고 있었을까. 하지만, 후회하기보다 앞으로 나아갈 때 아닌가. 읽고 싶은 독서 목록을 만들고, 박물관과 미술관을 주제로 나름 공부도 했다. 그렇게 하고 싶은 일들을 미리 머릿속에 담아두었다.

집 앞 산책을 하다 영국 박물관에 들르면 꼭 보고 나오는 '사자 사냥'

 회사에서 일하던 사람이 2년 동안 집안일만 하면 지겹고 지친다며, 가서 어떻게 하냐는 걱정 어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회사 경력 단절에 대한 나 자신의 걱정도 많았고, 주변의 우려도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런던에서 내가 해야 하는 것들과 하고 싶은 일들이 나의 회사 경력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런던에서 월요일에는 장을 봐서 네 가족 일주일 치 반찬을 만들고, 화요일에는 박물관에 가고, 수요일에는 집에서 책을 읽고, 목요일에는 미술관에 가고 금요일에 다시 장을 보고 반찬을 만드는 삶을 살기로 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아이들을 등하교시키고, 아이들이 잠들면 글을 쓰면서. 나만의 시간을 찾아가는 중이다. 하고 싶은 일들로만 가득 채운 2년을 보내고 나면 나는 어떻게든 달라져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다. 마침 나는 지금 아침 산책길에 길을 잃어도 빅벤이 보이고, 매일 오가는 길에 박물관이 즐비한 런던 아닌가. 이곳이라면 길을 잃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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