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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 연길 Nov 15. 2021

보통의 회사원이지만 머리를 기르는 이유

쓰다 보니 도전기


#1

머리가 꽤 길어졌다. 그렇다고 막 장발까지는 아니지만, 딱 보면 흠칫할 정도는 된 것 같다. 만족스럽다. 특히 회사 안에서 아주 그냥 톡톡 튄다. 신기함 반, 걱정 반으로 아저씨들이 내 머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게 그 증거다. 아마 남자사원 중에서 나보다 긴 사람은 없을 것 같다. 정장 입고 다닐 시절에는 상상도 못 할 스타일이다. 그러고보니 작년에도 좀 길렀었던 적이 있다. 하지만 임원분들에게 지적을 당한 후 잘라버렸다. 그때 미용실에서 느꼈던 감정은 꽤 비굴했던 것 같다. 그래서 절치부심하는 마음으로 나만의 레지스탕스를 올해 다시 시작했고 여기까지 왔다.


#2

올해는 작년보다 회사 분위기가 더 자유로워진 느낌이다. 재택근무의 비중이 늘어난 것도 한몫을 할 테지. 뭐랄까 자율과 책임의 문화가 조금은 스며든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작년을 돌아켜 보자. 머리를 기른 나 같은 사원은 재택근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가뜩이나 맘에 들지 않는 임원들의 눈엣 가시였을 것이다. 해이해진 기강의 증표 같은 놈이었겠지. 이제는 무엇이 중허고 안중헌 지 조금은 체득된 것일까. 코로나 2년 차인 우리들은 이제 동료의 옷이나 머리스타일 따위에는 조금 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3

사실 반항심에 머리를 기르는 것도 조금은 맞다. 인정한다. "도대체 나의 머리 길이가 당신에게 어떤 불편함을 주는지요?"라는 생각을 얼굴에 가득 담아 비행을 하는 셈이다. 중고딩때도 그러지 않았었는데.. 왜 사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회사의 내규에는 임직원의 머리 길이를 단속해야 한다는 내용도 없다. 우리는 기성세대가 좋아하지 않는 머리 스타일을 자제함으로써 조금이라도 충성심을 표현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굴복을 이행할 뿐이었다..고 과몰입해서 (속으로) 주장한 적도 있다.


#4

사실 요즘엔 그렇게 오바해서 생각지도 않는다. 그저 머리를 기르고 싶었기 때문에 기른다는 순결한 마음의 알맹이만 남았을 뿐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긴 머리에 동경이 있었는데 아직도 멋져 보인다. 그냥 그 이유다. 다행히도 내가 원하는 걸 스스로 하게 해주고 싶다는 다짐으로 발전이 되었다. 이제는 별 것도 아닌 일을 그동안 왜 못했나 싶다. 심지어 규정 위반도 아니지 않은가. 밥만 먹어도 길어지는 머리카락을 그냥 자르지 않는다는 건 정말 기본적인 내 자유의지이지 않은가. (결국 오바하는 생각들)



#5

벌써 십 년이 넘었지만(하 이런..), 어학연수 시절에 머리를 기른 적이 있다. 대부분의 주변인들은 거렁뱅이 같다고 여겼었지만, 나는 나르시시즘 안에서 나름 행복했었다. 그리고 그때의 나는 나 자신을 많이 좋아했었던 것 같다. 젊었고, 시간도 많았고 감정이 풍부했다. 거기에다가 관종끼도 다분했었기에 남의 시선을 오히려 즐겼었다. 나는 그런 마음을 되찾고 싶다. 머리를 기르는 이유는 사실 이러한 이유가 더 크다. 다시 멋있어지고 싶다. 그냥 이렇게 늙어가고 싶진 않다. 그래서 보통의 회사원이지만 머리를 길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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