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퓨쳐> <가타카> <레디 플레이어 원>
요즘 방영 중인 웹소설 원작 드라마 <내 남편과 결혼해 줘>를 아시는지. 믿었던 친구와 남편에게 배신당하고 결국 살해까지 당한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복수하는 회귀물이다. ‘회귀’는 웹소설과 웹툰의 대표적 장르인 로판(로맨스 판타지)과 현판(현대 판타지)의 플롯에 흔히 쓰이는 서사적 장치로, 회귀물은 주인공이 과거의 한 시점으로 돌아가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과거로 돌아간 주인공은 미래를 알기 때문에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운명을 바꾸고자 한다.
현재는 늘 그렇듯이 암담하고, 우리는 소망한다. 무엇이 되었건 지금보다는 나아지기를. 회귀라는 장치가 유행처럼 흔해진 것은 시대 현실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처럼 타고난 능력과 정해진(것만 같은) 운명 따위를 ‘가장 좋은’ 것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기꺼이 바꾸기를 선택할 것인가? 세 편의 영화는 각각의 방식대로 본디 거스를 수 없는 것을 거슬러 봄으로써 우리가 꾸려나가야 할 ‘현재’를 고민하게 한다.
회귀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뿐, ‘과거로 돌아간다면’의 상상은 예로부터 있어 왔다. 시간 여행이나 타임머신에 대한 상상이 이러한 아이디어를 실현하고자 하는 대표적인 장치가 되었고, <백 투더 퓨쳐>는 이를 성실히 해낸다. 1985년 작의 이 영화는 40년이란 세월이 무색하게 여전히 빛난다. 자고로 고전이란 그것이 전하는 가치가 시간의 흐름에 영향받지 않는 것이라 했던가. <백 투 더 퓨쳐>는 SF 영화의 고전이라 할만하다.
주인공 마티는 브라운 박사의 발명품인 스포츠카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가게 된다. 젊은 브라운 박사를 찾아가 부족한 연료를 채우고 돌아갈 생각이었건만, 부모님이 사랑에 빠지는 계기가 되는 사건에 마틴이 개입하게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아빠가 아니라 마틴을 좋아하게 되는 엄마. 엄마가 아빠 대신 아들을 좋아한다니? 마틴은 자신이 갖고 있던 가족사진이 점점 지워지는 것을 보고, 이 막장 드라마 같은 전개를 막고 바뀔지도 모르는 미래(=현재)를 바로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백 투 더 퓨쳐>는 과거를 바꾸고 다시 미래로 돌아오는(back to the future) 마티를 통해 우리를 운명과 미래에 대한 성찰로 이끈다. 마티는 아빠와 엄마의 큐피드가 되기를 자처한다. 그것은 ‘나’라는 인간의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가 과거로 돌아가기 전 그의 가족이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아빠는 소심하고, 아빠 친구라는 사람은 친구라는 이름으로 아빠를 괴롭히고, 엄마는 술에 의존하고, 삼촌은 감옥에 있다. 그럼에도 그는 ‘존재’해야만 했던 것이다.
다행히 마티로 인해 꼬여버린 실타래가 마티로 인해 새롭게 풀리면서, 영화는 마음이 편안해지는 방향으로 흐른다. “Roads? Where we’re going, we don’t need roads(길? 우리가 가는 길엔 도로는 필요 없어).” <장자> 내편 제물론에는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길은 걷는 데로 생긴다는 뜻이다. 이렇듯 불변의 진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궤를 같이한다. 우리는 걸음대로 가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맞는 길을 찾는 것보다 가야 할 곳을 분명히 아는 것이다.
<가타카>는 유전자를 조작해 ‘우수한’ 인간을 낳을 수 있는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탄생의 시점부터 우성과 열성이 결정되고, 유전자로 모든 걸 식별하는 사회다. 이러한 사회에서 우성으로 태어난 사람은 주어진 가능성 앞에 더 우수하게 살아간다. 반면 열성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열성이기에 기회랄 것을 가져보지도 못한 채로 배제당한다.
주인공 빈센트는 유전자 조작 없이 태어난 열성인자. 즉, 섭리대로 태어난 인간이다. 동생인 안톤은 열성의 것을 모두 제거한 우성인자다. 크는 동안 둘은 종종 바다에서 수영 시합을 한다. 당연하게도 매번 지는 빈센트와 매번 이기는 안톤. 그리고 평소보다 조금 더 멀리 가던 어느 날, 빈센트는 안톤을 이긴다. 어른이 되어 다시 한 ‘겁쟁이 게임’에서 안톤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듯 빈센트는 멀리멀리 나아간다. “That’s how I did it, Anton. I never saved anything for the swim back(난 되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아서 널 이긴 거야, 안톤). 그렇게 말하는 빈센트의 모습은 영화의 많은 부분을 설명한다.
빈센트는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 하지만 유전자라는 태생적 벽 앞에서 우주비행사는커녕 우주 항공사에서 취직조차 할 수 없는 ‘부적격자’다. 빈센트는 그 항공사의 청소부로 일하다가 전직 수영선수인 우성인자 제롬의 DNA를 이용해 신분을 세탁하고 일등항법사가 된다. 일등항법사로서 살아가기 위해 빈센트는 부단히 노력해야만 한다. 그는 ‘우성인자’여야만 하니까 말이다.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만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체력적인 것이든, 지능적인 것이든, 그게 무엇이든.
영화는 우성인자로 태어나 유망한 수영선수였지만 사고 때문에 하반신 마비로 살아가는 제롬의 모습을 대조시킨다. 날 때부터 유망하게 태어나서일까. 제롬은 자기에게 벌어진 이 우연 같은 사고를 헤쳐 나갈 면역이 없다. 제롬은 빈센트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빌려준다. “I only lent you my body. You lent me your dream(나는 너에게 몸만 빌려줬지만 너는 나에게 꿈을 빌려줬어).” 제롬의 최고 성적은 은메달. 그는 영원히 금메달을 그리워한다. 그는 빈센트로 인해 꿈을 꾼다.
인간은 삶을 꾸려가며 살아가고 있는데도 운명의 불변함이나 고정된 확신을 더 믿고 싶어 한다. 만들고 해내는 것의 힘은 믿지 못하고 주어진 것의 힘을 믿는 경향 속에서 <가타카> 속 유전자는 아이러니하게도 극도의 통제 시스템으로 작용한다. 탄생과 함께 갖게 되는 불변하고, 고정적이고, 확정적인 유전자가 낙인이자 징표가 된다. 그리고 한계와 가능성을 재단하는 유일무이한 지표가 된다. 유전자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할 수 있건 없건 상관없이 가능성은 사라지고 한계만 남아 버리게 된 것이다.
운명을 알고 태어난다는 것은 좋은 일일까? 태어날 때부터 ‘최상의 조건’을 갖출 수 있다면 그것이 ‘최고’일까? <가타카>의 사회는, 알기 때문에 틀에 갇혀 버렸다. 그러나 영화에서 빈센트는 일생에 걸쳐 증명한다. 하기만 한다면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이다.
식량난과 기후 위기를 겪는 근미래, <레디 플레이어 원> 속 사람들은 ‘오아시스’를 일상처럼 즐긴다. 주인공 웨이드는 말하자면 ‘현실은 시궁창’ 처지이지만 오아시스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오아시스 안에서 사람들은 현실의 부족한 점들을 잊고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다. 사람들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이, 현실에서도 오아시스를 찾는다.
근본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은 이 변화에 개입해야 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행해지지 않는다. 변화의 차원이 개인에서 조직으로 조직에서 사회로 사회에서 국가로 국가에서 세계로 단위가 커질수록, 당장의 결과 없이 시간과 자원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좀처럼 지켜지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레디 플레이어 원>은 문제적 현실을 배경으로 설정하고 이러한 상황에 대한 돌파구로 가상 현실이 유행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후회의 방향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현실이라면, 그래서 변화를 만들어갈 에너지마저 고갈된 상태라면, 외면과 도피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한 방법일 것이다.
오아시스에 숨겨진 세 가지 수수께끼를 풀면 창립자의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웨이드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에 참여해 첫 번째 수수께끼를 푸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거대 기업과 대립하고 두 번째, 세 번째 수수께끼의 정답에 가까워질수록 웨이드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가상 세계가 아니라 현실 세계에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해결해야 할 진짜 문제가 다름 아닌 현실에 있음을, 물리적 인간 존재의 협력과 신뢰 없이는 어떠한 것도 변하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꽉 찬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거대 기업의 횡포를 막고 현실을 살아갈 희망을 얻는다.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관계를 회복한다. 다소 이상적으로 느껴지는 영화의 엔딩이 나는 실재할 수 있기를 바란다. 현실의 불안, 후회, 실망, 위험, 고난과 역경… 현실을 구성하는 부정적인 단어들은 어쩌면 영속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이를 한탄하는 우리의 한숨마저 무력하게 느껴질 정도로 계속 반복될지도 모른다. 눈앞에 놓인 현실을 어떻게 해서든지 바꾸고 싶다는 마음은 앞으로도 불쑥불쑥 생겨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헛발질하는 것처럼 느껴졌던 작은 외침이 모여 오늘이 만들어졌다는 걸 역사로 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것은 과거도 가상 현실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의 현재, 그렇다면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Reality is real(현실이 진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