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 아이> <애프터 양> <블레이드 러너>
장강명 작가의 <그믐> 말미에 실린 수상작 인터뷰에는 권희철 평론가가 그의 눈으로 본 장강명 작가와 책을 말하면서, 추리소설과 SF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추리소설과 SF. 헝클어져 있는 사건들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고 수수께끼를 풀어내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 혼돈스러워 보이는 현실 세계를 자신만의 규칙으로 재구성해서 사고의 실험실을 만들어 우리 삶을 거기에 집어넣고 그 결과값을 기다려보는 것, 이 사고실험이 결국 세계를 좀더 괜찮은 방향으로 만들 것이라는 믿음, 그게 안 된다면 적어도 이 세계가 처한 문제를 좀더 뚜렷하게 드러내게 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믿음을 확인하는 것. 장강명 어린이는 그런 것들을 훈련하면서 커왔으니까 공대생이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 같다.
p. 181
이번에 엮은 세 편의 영화는 SF 영화로 분류되는 것들이다. SF를 정확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이 장르가 일종의 ‘사고실험’을 수행하는 장(場)이라는 점에서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기술의 발전과 함께 우리는 복제 인간, 사이보그, 휴머노이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명명되는 인공 지능 기계 인간들과의 공존을 상상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상상은 당연하다는 듯 인간으로서의 정체성과 인간적 존재의 문제로 확장되었다.
세 편의 영화는 묻는다. 인간은 아니지만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갖춘 인간과 비슷한 존재에게 인간에 가까운 감정과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그 인간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가즈오 이시구로 소설 <클라라와 태양>의 화자는 ‘기계’인 클라라다. AF(Artificial Friend)인 클라라의 눈으로 조시의 가족과 인간 세상을 본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클라라의 시선으로 상황과 사건과 말과 행동을 훑어가며, 인간으로서 자연스럽지만 기계로서 자연스럽지 않은 무언가들을 만났다. 무언가들은 클라라의 시점이라는 장치를 통해 이미 기계와 인간의 경계가 흐릿해진 채로, 독자에게 해석된다. 읽는 사람은 생경한 기분이 들게 된다. "이 사람들 왜 이래?" 또는 "인간들은 너무 이상해". 책을 덮고 그런 이상한 인간이 바로 나였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누구든 인간이라면 ‘이상한’ 행동을 할 수 있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얼마나 기분이 이상했는지 모른다. 우리가 숭고하게 여기는 '인간'의 '인간성'과 '인간다움'을 가장 잘 갖추고 있던 것은 그 누구도 아닌 클라라였다.
영화 <에이 아이>도 <클라라와 태양>과 비슷한 설정을 갖고 있다. 소설에서 클라라는 어쩌면 인간의 감정과 마음까지 배울 수도 있는 초고도 인지 능력의 로봇이다. 영화에서 데이빗도 감정을 표현함은 물론 마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표현된다. 특히 그에겐 사랑이라는 감정, 엄마를 향한 아이의 무한한 사랑이 시스템화되어 있다. 영화 초반부에서 엄마를 사랑하는 아이 메카(로봇)를 만드는 것이 획기적인 시도가 될 거라고 말하는 교수에게 한 학생이 "로봇이 인간을 사랑하느냐보다 인간이 로봇을 사랑할 수 있느냐가 근원적인 문제 아닌가요?"라고 말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일 것이다.
로봇인 데이빗의 사랑은 그 어떤 인간의 그것보다도 절절했고 숭고했다. 영화는 이 부분을 지속적으로 짚어냄으로써, 오히려 인간은 절대 데이빗이 가진 사랑의 형태를 닮을 수 없을 것이라는 모순을 자각하도록 이끈다. 데이빗의 '사랑'은 할 말을 잃을 정도다. 이런 맹목적 사랑을 원할 순 있지만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 어느 면에선 소망하는 사랑의 형태일 수 있으나 이렇게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은 아마 없으리라.
"His love is real. But he is not. (그의 사랑은 진짜다. 하지만 그는 진짜가 아니다.)"
우리는 정말 영화 속 '메카'에게 또는 소설 속 'AF'에게 인간의 감정을 원하는 걸까? 인간만큼의 감정, 인간이 느끼는 감정, 인간의 사고방식과 유사한 생각, 인간의 마음. 정말 그런 걸 원하는 걸까. 만약 실제로 구현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클라라와 태양>의 가족들과 매니저, <에이 아이>의 가족들과 연구원, 또는 로봇 축제 사람들…. 영화와 소설이 보여주는 ‘인간’ 인물들의 행동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안드로이드’인 양은 입양아 미카의 오빠가 되어 미카의 정체성과 문화를 가르쳐주기 위해 구입되었다. 그리고 양이 갑자기 모든 기능을 멈춘다. 양이 멈추고 난 후 가족들은 그의 기억을 좇는다. 양은 몇십 년의 기억을 축적하고 있다. 간직하고 있다. 남아있는 인간은 그 기억을 보면서 양을 그리워하고 동시에 그 시간 속 자신들을 그리워한다.
양은 돌아오고 싶었을까? 양의 가족들은, 적어도 양의 아버지였던 제이크는, 양의 동생이었던 미카는 양을 살려내고자 한다. 문득 이 서사를 보고 있는 인간인 나는 그런 의문이 드는 것이다. ‘양은 정말 돌아오고 싶었을까?’
그의 기억을 보는 '우리'가, 그러니까 '인간'이 은연중에 양도 돌아오고 싶을 거라고 믿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정작 양에게는 그 모든 것들이 그저 기억의 편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때가 되어 멈췄을 뿐일지도 모른다. 마치 기계가 수명을 다하듯이. 실은 자기를 어떻게 해달라는 어떤 소망도 소원도 없을지도 모른다.
양은 그저 알고리즘을 따라가듯이 기억에 남아있는 길들을 따라 에이다를 만났고, 동생을 사랑하고, 가족과 이야기를 나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억되고 축적되고 실천된 모든 양의 행위를 보고 있노라면, 그의 행위를 고작 "양은 인간이 되고 싶었나"라는 물음 하나로 요약하는 인간의 것보다 더없이 이상적인 인간의 것이라 느껴진다. 우리는 양의 메모리 속 양의 행적을 함께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양이 살아 돌아오기를 소망한다. 그의 기억은 더할 나위 없이 인간이 간직할 법한 추억이었기 때문에, 어느 순간 우리는 양이 기계임을 잊고 존재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기대하게 된다.
가장 소멸하는 존재인 인간이 가장 소멸과 거리가 먼 테크노를 추억하며 위로한다. 시간이 흐름이 저장되어 비친다면 의미 없는 서사란 없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삶을 저장하고 타인이 그걸 본다는 건 (아직은?) 인간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복제 인간을 만들어 위험하고 힘든 업무를 맡기는 세상이 영화의 배경이 된다. <블레이드 러너> 속 복제 인간은 경험하고 겪으면서 감정이 생기고 의지가 생긴다. 무엇보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생긴다.
그러니, 영화에 말하고자 하는 인간성은 살고자 하는 의지로 대표된다. 이 살고자 하는 의지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삶을 체험한 사람들이 가진 삶의 의지에 가깝다. 자기가 경험해 오고 버텨내 오고 살아낸 삶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가진 삶의 의지와 닮았다.
“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Time to die. (모든 순간은 시간 속에서 사라지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죽을 때가 된 거야).” 모든 것은 자연스레 사라지기 마련인데, 영화 속 복제 인간들의 삶은 시스템에 의해, 타인에 의해 사라진다. 생을 마감하기 위한 어떠한 준비도, 준비에 쓰일 시간도 ‘과분한’ 것으로 여겨진다.
극의 말미, 눈물을 지우려는 듯 쏟아지는 비와 그 빗속에서 마지막을 맞은 복제 인간을 비추는 쇼트가 그를 쫓아 없애려던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의 독백으로 채워진다. “왜 그가 날 살려줬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그는 마지막 순간에 삶을 더욱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삶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의 삶. 내 삶. 그가 원했던 건 우리도 알고 싶어 한 대답들이었다. 우린 어디서 온 걸까? 어디로 가는 걸까?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나 남았나?”
우리는 우리의 생을 어떻게 살아가는가? 어떤 순간을 생각하며 사는가? 그러한 순간들은 인간을 어떻게 인간으로 만드는가? '살아가고자 함'에 담은 인간성을 사이버펑크로 표현해 낸 SF 영화의 클래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