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울의 움직이는 성,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
2024년의 1월이 중반을 달리고 있다. 2023년이 시작할 때 나는 도망가지 말고 기회를 잡으려면 용기를 내야 한다고 다짐했고 딱히 실천되지는 않았다. 올해도 역시나 같은 다짐을 한다. 도전, 용기, 열정… 그런 단어들이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 때 꺼내 보고 싶은 영화들 세 편을 나누려 한다.
가업을 따라 모자를 파는 소피는 정작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생각하지 못한다. 그런 소피의 동생은 소피에게 말한다. “언니의 미래는 스스로 결정해야 해.” 황야의 마녀로 인해 소피는 할머니의 모습으로 변해 버린다. 모두가 알던 소피는 사라졌는데, 이전과는 달리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소피가 남았다.
소피는 '움직이는 성'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는 하울이 있다. 집은 아무래도 신경 쓰지 않으면서 외관은 신경 쓰는 이 사람. 그는 ‘보란 듯이’ 자기의 진심을 숨긴다. 마치 소피가 모자로 자신의 바람을 꼭꼭 숨겨내는 것 처럼 말이다.
성을 지키는 불꽃인 캘시퍼는 하울의 마음이다. 성의 내부와 외부가 끔찍한 모습으로 직조된 것은 하울의 마음의 방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황야의 마녀의 저주를 풀기 위해 캘시퍼의 제안에 따라 집을 청소하기 시작하는 소피. 소피가 하는 청소라는 행위는 하울의 마음을 치료하는 것과 닿아 있다.
하울은 크지 못했다. 그에게 남아 있는 것은 어린 시절 그대로의 순수함. “나 사실은 겁쟁이야. 이 잡동사니들 전부 마녀를 쫓는 방어막이야. 주술이 걸려 있어. 무섭고 무서워서 견딜 수 없어.” 영화는 할머니의 모습을 한 소피와 겁쟁이의 속내를 가진 하울을 나란히 세움으로써, 그들이 서로에 힘입어 성장하는 모습을 조명함으로써, 인간이라는 하나의 존재로서 우리가 가진 마음과 자존감에 대해 동화적인 서술을 풀어낸다.
원제는 <The Secret Life of Walter Mitty>. 드물게 번역 제목이 더 찰떡이라고 느낀 영화 중 하나다. 영화는 디지털 전환의 시대적 흐름과 맞물리며 폐간될 위기에 처한 ‘LIFE’지의 상황을 중심으로 한다. ‘LIFE’지에서 16년 동안 필름 사진 현상을 담당해 온 주인공 월터는 하루아침에 직무를 잃은 신세가 되었다. 구조조정 소식에 충격받은 와중에도 열일하는 성실한 직장인 월터에게 남겨진 마지막 작업은 그간 함께 협업한 사진작가 숀 오코넬이 말한 ‘삶의 정수’가 담긴 스물다섯 번째 필름을 마지막 호 표지로 싣는 것. 그런데 웬걸, 스물다섯 번째 필름이 없다.
월터는 스물다섯 번째 필름을 위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숀 오코넬을 찾으러 떠나게 된다. 그 여정에서 화산 폭발의 목격자가 되거나 헬기에서 바다로 뛰어내리고, 상어와 싸우고, 스케이트보드 하나를 들고 아이슬란드의 도로를 달린다. 상상일까? 현실일까?
현실에서 월터는 주어진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며 살아가는 ‘직장인 1’일 뿐이지만, 상상 속에서 무엇이든 되고 무엇이든 하는 사람이다. 끝내 만나게 된 숀은 눈표범을 찍고자 하여 그곳에 있었지만 정작 눈표범이 나타나자 찍지 않는다. 그는 “그저 그 순간 속에 머물고 싶지.”라고 답할 뿐이다. 우리가 기다리는 순간은 과연 어떤 순간인가. 삶의 정수란 무엇을 말하는가. 영화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월터는, 그리고 우리는, 스물다섯 번째 필름이 담고 있었던 삶의 정수가 무엇이었는지 알게 된다.
“To see the world, things dangerous to come to, to see behind walls, to draw close, to find each other and to feel. That this the purpose of ‘Life’(세상을 보는 것, 다가올 위험한 것들을 보는 것, 벽들의 뒤를 보는 것,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 서로를 발견하고 느끼는 것. 그것이 우리 ‘라이프/삶’의 목적이다).” 영화 속 ‘LIFE’지의 회사 비전처럼, 라이프, 즉 삶이란 뛰어넘고 도전하면서도 순간 속에서 발견하고 느끼는 것일까. 월터의 상상보다 더 상상 같은 현실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게 한다.
영화를 본 사람은 없어도 사운드트랙을 들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영화. 죽음이라는 키워드가 무색해질 만큼 소소한 웃음 포인트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마틴은 뇌종양, 루디는 골수암 말기. 시한부를 선고받은 주인공들은 병원 주방에서 마주친다. 내일 죽을 수도 있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테킬라와 레몬과 소금이었다. 살면서 바다를 보지 못했다는 루디의 말을 듣고 둘은 그 길로 바다를 보러 나선다.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 자유를 소망하는 이들의 여정은, 어떤 한계 앞에서 그 한계를 부수고 도로를 질주하는 <델마와 루이스>의 면면을 연상케 한다.
둘은 어쩌다 보니 차를 훔치고, 조직 폭력배에게 쫓기고, 은행을 털고, 납치범이 된다.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 “두려워.” “잘 들어, 루디. 두려울 것 하나도 없어.” 마틴의 발작이 잦아진다. 둘은 차 트렁크에서 발견한 돈을 죽기 전에 반드시 하고 싶은 일에 쓰기로 마음먹는다. 마틴은 엄마가 했던 말을 담아 두었고, 운전면허도 없는 엄마에게 캐딜락을 선물한다. 그 차는 엄마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말과 감정을 담고 있을 것이다.
“천국에 대해 못 들어 봤나? 그곳엔 별다른 얘깃거리가 없어. 바다의 아름다움과 바다에서 바라본 석양을 이야기할 뿐이야.” 죽음이 가까워져 온 순간에도 가장 지키고 싶었던 것, 늘 바라왔던 것, 그러나 행하지 못했던 것, 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으나 잊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소고. 눈앞에 죽음이 있다면 나의 바다는 무엇일까? 당신의 바다는 무엇이겠는가? 노을 진 바다를 볼 때마다 이 영화가 생각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