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 <엘리멘탈> <킹덤: 아신전>
<파친코>에 등장하는 재일교포들은 모두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거나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일본에서 태어난 교포 3세조차 일본인이 될 수 없고 영원히 조선인 취급을 받지만, 조국에서는 또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속지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은 미국 영토에서 태어나면 누구나에게나 시민권을 부여한다. 문제는 일본에서 태어난 조선인은 일본이 고향이고 일본이 모국어인데, 왜 자신이 외국인 취급을 받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 최대 피해자는 국민이지만, 아무도 국민이 당하는 고난에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 <파친코> 392쪽 작품 해설
개인의 역사가 거시적인 역사의 소용돌이를 헤엄친다. 이민진 작가의 소설 <파친코>는 일제강점기에 고향을 떠나 일본으로 이주한 재일교포들의 삶을 그려낸다. 소설이 담아내는 디아스포라의 경험은 당대의 여러 가치와 여러 마음이 잘 녹아들어 있다.
놀랍게도 시대가 바뀌고 인종과 민족이 바뀌고 공간적 배경과 시간적 배경이 바뀌었어도 ‘디아스포라’의 내면적인 갈등과 그 갈등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소되지 않았다. 낡지도 않은 채로 머물러 있다.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은 내집단과 외집단의 뚜렷하지 않은 경계에 저 혼자 뚜렷하게 내몰리는 것이고 그 과정의 고민과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일이다. 이방인으로 살아감을 말하는 세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모니카와 제이콥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고 한국에서 미국 아칸소에 터를 잡은 이민 가정이다. 그들은 열심히 살고 아들 데이빗은 심장병이 있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더 잘 살기 위해서 살아간다. 그럼에도 별반 나아질 것 없는 생활에 꿈은 잃어가고 서로 간의 갈등은 깊어진다. 모니카는 연고 없는 곳에서 가족만을 바라보고 산다. 정작 자신은 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가족들이 무사안일하고 편안하게 잘 먹고 잘살기를 바랄 뿐인데, 모아둔 돈으로 자꾸 ‘도전’을 하겠다는 남편 제이콥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러나 제이콥은 “언제까지 병아리 똥꾸녕”이나 보고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부부는 병아리 성별을 구분하는 일을 했다). 그는 “쓸모 있는 수컷”이 되기 위해-제대로 된 가장 노릇-을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건 우리만의 것, 나만의 것을 구축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농사를 지으려 한다. 잘해보려고 하는데 자꾸만 죄인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부족한 수도를 무리해서 끌어다 쓰더라도 꼭 이 농사를 성공시켜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나를 믿는 가족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해내는 것’이다. 그는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 의의라고 믿는다. 그가 지닌 지독한 부담감과 압박감이 가족을 갉아먹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로.
아들 데이빗은 엄마 아빠가 자기 심장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마다 다 자기 탓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프고 싶지도 죽고 싶지도 않다. 한국에서 온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자기를 사랑해 주는 게 어색하기만 하다. 도대체 이유 없이 지극한 사랑의 정체가 뭘까.
할머니는 말한다. “가끔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게 더 무섭단다.” 데이빗의 심장에 있는 구멍이 기적처럼 작아졌다고 했던 날, 불이 났다. 비로소 뛸 수 있게 된 그날, 데이빗은 할머니를 위해 뛰었다. 온 힘을 다해. ‘그랜마’ 같지 않은 나의 그랜마. 백인 할머니들처럼 쿠키도 못 굽고 요리도 못하고 팬티 바람에 화투만 치는 한국 할머니가 가르쳐 준 건 가장 한국인답게 사는 일이다. 미나리처럼 강하고 굳세게 어디서나 잘 자라는 “원더풀, 원더풀 미나리”가 되는 일이다.
가족들은 불에 타서 모든 것이, 모든 작물이 사라진 후에야 꿋꿋이 일어난다. 물가에만 있으면 어디서든 잘 사는 미나리처럼. <미나리>는 이민자 가족이라는 정체성을 통해 가족 안에서 등장하는 현실적 고민과 갈등을 사실적으로 그려냄과 동시에 그것이 가장 ‘한국적’으로 봉합되는 방식을 조명하고 있다.
<엘리멘탈>의 엘리멘탈 시티는 네 가지 원소들이 모여 사는 도시다. 영화는 세계관부터 원소라는 소재를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주인공 앰버의 가족들은 불 원소로서 원래 살던 곳에서 더 이상 삶을 영위하기 힘들어 엘리멘탈 시티로 이주하게 된다. 한국계 미국인인 피터 손 감독도 <미나리>의 데이빗이었던 적이 있었을까?
영화 속 엘리멘탈 시티의 이방인인 불의 원소는 재미교포 가정의 문화를 보여준다. 예컨대 앰버의 가족이 고유의 특성을 이용해 가족 사업을 하고 부모님은 그들이 일구어낸 기반을 바탕으로 딸이 그 세계에서 탄탄하게 자리 잡길 바라며 딸인 앰버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등이 대표적이다. 앰버의 꿈은 물어진 적이 없다. 앰버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진심으로 대하기 어려웠고 아빠의 뜻에 반하기도 어려웠다. 앰버는 ‘착한’ 딸이 되기로 마음먹는다. 영화는 이민 2세대로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앰버의 성장을 따라간다.
또 ‘원소’라는 설정에 착안해, 두 원소의 상변화(相變化)를 이용해 관계의 발전을 표현하는 창의적인 시도를 한다. 불이 물을 만나면 사라지고 물이 불을 만나면 기화된다. 적당해야만 한다. 동시에 물과 불이라는 원소의 속성과 인간의 성격이나 성향을 대치시킨다. 물인 웨이드는 물처럼 흘러가듯 살아가고 어디에나 잘 섞인다. 불인 앰버는 말 그대로 불같이 타오르는 열정과 감정을 가졌으며 주변의 것을 태우는 탓에 다른 원소들과 잘 섞이지 못한다. 이러한 특성은 민족에 따른 전형성으로 치환되기도 한다. 웨이드의 가족은 전형적인 백인 중산층의 모습을 보인다. 어려움 없이 자란 웨이드와 값비싼 취미를 가진 가족들, 칭찬이랍시고 앰버에게 언어를 잘한다고 말하는 일종의 마이크로어그레션(microagression)*, 아시아계 사람들이라면 응당 그럴 것이라며 그들이 갖고 있는 예술적 혹은 여타 재능을 ‘개인적’인 능력이라 보지 않는다.
반면 불은 다른 원소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뭉쳐서 살게 된다. 이는 집단주의적인 문화, 즉 너무나도 가족적인 문화로 표상된다. 앰버의 아빠는 “물과 엮여서 좋았던 적이 없다”며 주류라 할 수 있는 이들에 크나큰 반감을 보이는데, 이는 자신들이 고칠 수 없는 고유한 특성 때문에 타자화된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렇기에 외국인과의 결혼이 터부시되는 문화가 조형되고 아빠의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안 되는 결사반대’와 이를 우려한 엄마의 도움이 등장하곤 한다.
상극의 우리들은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엘리멘탈>은 물 원소인 웨이드와 불 원소인 앰버의 로맨스를 큰 줄기로, 서로 다른 민족이 ‘융화(融和/融化)’되는 모습을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를 이용해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영화는 민족적 정체성에 내재화된 고정관념을 의도적으로 물질(원소)로서 속성화하고, 결코 어울릴 수 없는 것도 어우러진다는 것을 ‘상변화(相變化)’라는 양상으로 드러내는 똑똑한 전개를 취한다.
마이크로어그레션(microagression)* 차별이라고 자각하지 못한 채 행하는 편견에서 비롯된 무의식적이고 미묘한 차별.
큰 왜란이 휩쓸고 지나가 조선의 남쪽 땅이 참혹하게 유린되었는데
조선의 북녘땅에도 또 다른 불안이 싹트고 있었다.
압록강 너머 드넓은 만주 벌판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여진족들이
파저강 유역에 자리 잡은 호전적이고 강성한 파저위의 깃발 아래 결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진족 만 명이 모이면 천하에 당할 자가 없다"
심상치 않은 파저위의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낀 조선의 장수들은
그들을 정탐하고 견제하기 위해 또 다른 여진족들을 이용했다.
조선에 귀화해 살아오던 여진족들로 '성저야인'이라 불리던 자들이었다.
백 년이 넘는 오랜시간동안 조선땅에 살아왔던 그들은 여진족도 조선인도 아닌 멸시받는 천한 대상이었다.
<킹덤: 아신전> 중
주인공 아신은 '번호부락'에 살고 있던 '성저야인'이었다. 이들은 여진족이지만 여진족이 아니다. 아주 오랜 시간 조선 땅에서 조선의 임금을 왕으로 여기며 살았다. 조선에서 나고 자란 아신은 그런 면에서 조선인이지만, 그렇다고 조선인인 것은 아니었다. 아신과 번호부락의 사람들은 여진족이자 조선인, 동시에 여진족이 아니면서 조선인도 아닌 '성저야인'으로 재정체화된다. 이들은, 여진족의 우두머리 격인 '파저위'에게는 '형제의 피'를 배신한 배신자이고 조선인에게는 우리 땅에 기어들어 온 야만적인 여진족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어디에도 인정받지 못하는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가진다.
그런 상황에서 아신의 아버지는 조선에 대한 충정심을 가지고 '조선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천하다는 도축 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조선 북방 군의 밀정을 자처한다. 군관 민치록의 명으로 조선에 유리한 말을 퍼트리기 위해 아신의 아버지는 여진의 땅으로 간다. 조선에서 자신과 부락민의 존재를 인정받고, 조선의 보호 아래 관직을 얻고 살아갈 언젠가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부락 사람들은 파저위에 의해-사실상 조선에 의해- 몰살당했다. 홀로 살아남은 아신은 조선 군에 도움을 요청하고, 파저위에 복수를 꿈꾸며 악착같이 살아남는다. 밀정 역할을 도맡아 하며, 돼지와 함께 자고, 조선 군졸에게 유린당해도. 그러다 아신은 조선이 북방의 힘을 쥐고 있는 파저위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거짓 정보를 주어 번호부락을 희생시켰다는 걸 알게 된다. 아버지는 딸인 자신을 지키고 이 땅에서 살고자했을 뿐이다.
조선의 토사구팽에 분노한 아신은 좀비를 만든다. 죽음을 죽음으로, 피를 피로, 즉 조선에 생사역을 풀어 "이 땅에 살아있는 것을 다 없애는" 아신의 복수는 현대 민주 사회의 해결책이라 할 순 없지만 요즘 세태가 열광하는 해결 방식의 일면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하다. 이런 식으로 무한히 복수할 때 나타날 결과는? 영화는 그 결과가 좀비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흔히 이런 식의 대응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경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에 대한 구절이 등장한다. 이 구절에는 상당한 오해가 있다. 원래의 맥락은 누군가가 잘못을 했을 때 딱 그렇게만 벌을 주고 그쳐야 한다는 것으로, 현대에 와서 점점 잘못 받아들여져 복수를 옹호하는 식으로 변질되었다. 실상 이 구절이 설명하는 것은 복수가 아니라 용서에 대한 강조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딱 그만큼’만 벌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잘못한 것에 대해 그대로 돌려받는 것도 불가능하고, 어떤 죄에 대한 대가로 분노한 심정을 조금도 섞지 않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 그램도 모자라지도 차지도 않게 돌려주는 것도 불가능한 게 인간이다. 그렇기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불가능함의 역설을 통해 복수가 아니라 용서로 나가야 함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킹덤: 아신전> 속 아신의 서사는 이 불가능함을 절절히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킹덤: 아신전>은 인류의 평화를 위해서 거인을 죽이지만 진상은 그게 아니었던 <진격의 거인>을 생각나게 한다. 인간과 대치하는 생물-좀비와 거인-이 있다는 설정도 그렇지만, 그 뒤에 있는 정치권력과 인간의 욕망이 그렇다. 권력과 힘에 대한 무의미한 탐욕, 차별과 혐오라는 실체 없는 화풀이, 민족과 인종, 혈통과 정통성, 죄와 벌. 우리는 구분할 수 없는 것을 구분 짓고 추악하고 잔혹한 것들과 세상을 바꾸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