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시간> <배드 지니어스> <드래프트 데이>
스릴러 영화라 하면 흔히 공포스러운 사건이나 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를 떠올리기 쉽다. 통상적으로, 평범한 일상에 특정한 사건, 이를테면 범죄와 관련된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추적하거나 파헤치면서 긴장감이 조성된다.
이번에 소개할 세 편의 영화는 기존의 스릴러와 조금 다른 이유로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영화들엔 당장이라도 쫓아올 것만 같은 살인마는 없었음에도 살인마의 존재가 조성할 수 있을 정도의 긴장감이 존재했는데, 그만큼의 긴장감은 심장을 요동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 긴장감의 정체는 저마다의 ‘선택’과 ‘결심’ 사이의 사투였다.
주인공 아론은 모험을 즐기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영화의 시작, 아론은 늘 그래왔다는 듯이 주위에 알리지도 않고 툭툭 장비를 챙겨 블루 존 캐니언으로 떠난다. 모험 정신이 깃든 아론은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로 등반을 하다가 좁은 암벽 사이를 지나게 되는데, 그때 커다란 바위가 굴러떨어져 오른팔이 한쪽 암벽과 바위에 끼게 된다. 생존을 건 127시간의 사투가 시작됐다.
아론은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해야만 한다. 그에게 있는 조금의 물과 밧줄과 잘 들지 않는 싸구려 칼로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 영화의 시퀀스는 다소 단조롭다. 절벽 사이에 팔이 끼어 매달려 있는 아론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니까. 그러나 보여지는 공간이 한정적이라고 해서 보는 우리의 감정이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이를 해내기 위해 조난 상황에서 나타나는 고립의 두려움과 외로움, 불안함과 체념, 허무와 슬픔 등 극한으로 치닫는 심리 상태를 상상과 회상으로 구현해 설명한다. 무엇보다 그가 가진 최소한의 것으로 어떻게든 탈출하려는 그의 여러 시도들을 처절하게 보여준다. ‘처절하게’.
아론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대로 혈류가 돌지 않아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스스로 팔을 자르고 빠져나오기라도 할 것인가. 아론은 자기의 팔을 자르기로 결심한다. 싸구려 나이프는 날카롭지 않았다. 몇 번씩이나 걸리고 걸려 고통은 배가 되었다. 아론은 자기의 팔을 일부러 부러뜨리고 살과 신경을 제 손으로 자른다.
그가 생존과 팔을 맞바꾸는 선택을 했을 때, 그가 삶을 위한 희소한 희망에 살면서 겪을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을 걸었을 때, 나는 스크린 밖 나조차도 보이지 않는 절벽에서 끼어 팔을 부여잡고 앓고야 말았다.
예능 프로그램에 <알쓸범잡>에 SAT 시험에서 국가별 시차를 이용해 커닝한 사건이 소개된 적이 있다. <배드 지니어스>는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애초에 이 영화는 실화가 모티브인 데다 소재 자체가 신선했다. 그 천재는 왜 커닝을 했는가? 서사의 개연성을 위해서 커닝 장면이 잠깐 포함되는 경우는 있어도 커닝을 소재로 한 영화는 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장르적 연출이 돋보인다. 세련된 음향 효과와 장면 전환은 장르 분류로 표기된 ‘스릴러’적인 연출을 특출나게 해낸다. 커닝할 때-해서는 안 될 일을 할 때-의 긴장감과 불안감, 일명 쫄리는 심정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주인공 린은 천재다. 그러나 가정 환경이 좋지 못해 가고 싶은 유학은 꿈도 못 꾸는 처지다. 교내 시험이 있던 날, 린은 성적을 올려야 하는 친구를 위해 정답을 알려주게 되고, 이것이 소문나 시험 때 정답을 알려달라는 학생들이 찾아온다. 린은 그 대가로 친구들에게 돈을 받고 커닝 비즈니스(?)에 묶이게 된다.
학교에서 꼬리가 밟혔다. 그러나 금수저인 친구들은 유학을 위한 국제 시험에서도 커닝을 하자고 제안한다. 린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리고 결국 하게 된다. 각각의 시험장에서 이루어지는 커닝이 정교하게 교차된다. 시험장 특유의 소리 적막과 부각으로 긴장감을 조성하고 인물들의 미묘한 표정과 미세하게 흔들리는 움직임들이 불안감을 이전한다. 이때 보이는 린의 모습은 자기 파괴적이라고 할 정도로 불안하고도 불안하다. 숨 막히는 압박은 극단의 떨림과 공포를 만들어낸다.
끝내 영화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누군가는 돈이나 출세를 위해서 부정을 저지르며 살아갈 수도 있지만, 그게 '잘못된' 것인 줄은 알아도 '잘못한' 줄은 모르겠지만, 결국에 그건 선택일 따름이라고. 두 시간에 걸쳐 감각하게 한 죽을 만큼의 '불안'을 벗어날 방법은 돈도 아니고 출세도 아니고 성공도 아니고 그저 ‘나의 좋은 선택’밖엔 없는 것이다.
<드래프트 데이>는 미식축구 신인 드래프트의 날, 그 하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과연 어떤 신인 선수를 데려와야 팀에 도움이 될 것인가? 그야말로 이날의 선택이 팀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지도 모른다. 구단, 선수, 팬들이 모두 주목하는 결전의 단 하루. 클리브랜드의 단장 써니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영화는 보편적인 스릴러라 할 순 없지만 심리전의 치열한 긴장감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단장 써니는 누가 봐도 1순위로 뽑혀야 할 보 캘러한의 행보를 찝찝해한다. 그리하여 7순위로도 충분히 데려올 수 있는 본테 맥을 1순위로 뽑는다. 그의 이러한 선택은 구단주도, 감독도 흥분하고, 다음 순서로 지명할 다른 팀 단장도 열받게 하는 충격적인 한 수였다.
이미 조성된 긴장감 속에서 써니는 레이 제닝스를 데려오기 위해 지명권을 두고 시애틀 시호크스와 잭슨빌 사이를 오가며 박진감 넘치는 협상이 이어진다. 정해진 시간이 끝나기 전에 성사되어야만 한다. 시간의 촉박함이 턱 밑까지 쫓아온다. 전화기 너머로 뜸 들이는 몇 초간의 정적은 ‘오케이’가 흘러나올 때까지 모든 것을 멈춰 세울 아득한 시간이 되었다.
영화는 신인 드래프트라는, 팀 스포츠에서 중요한 이벤트를 소재로 팀에 가장 이로운 선택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한다. 써니가 당연시되었던 보 캘러한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아무리 개인 역량이 뛰어날지라도 팀 생활에 문제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어디에 적힌 글처럼 겉으로 선명히 드러나 있어서 알게 된 것이 아니었다. 성인이 되는 스물한 살의 생일*에 팀 동료들이 한 명도 오지 않았다는 그 사실을 단서로, 그는 결심을 한 것뿐이다. 그리고 개인적인 역량은 덜 부각되었을지라도 팀을 간절히 원하는 선수를 뽑기로 선택했을 뿐이다.
* 미국에서 매우 특별한 날로 여겨진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