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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현 Mar 25. 2024

전쟁의 소용돌이 속 아이의 시선들

<조조 래빗> <판의 미로>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영화 <햇빛 쏟아지던 날들>은 중국의 문화대혁명 시기를 살아가는 10대 소년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문화대혁명이 배척하거나 옹호하는 이념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결국 어떤 식의 결과를 낳았는지와는 하등 상관없이, 주인공과 친구들에게는 ‘햇빛 쏟아지던 날들’일 따름이었다. 문화대혁명의 때 내세워진 자유와 평등이라는 명분, 이 허울좋은 명분은 역시 허울좋은, 혁명이라는 이름의 비상식적 결과들을 낳았지만 주인공과 친구들이 보는 것은 어른의 억압이 없는 ‘자유로운’ 시간이다. 쏟아지던 햇빛을 맞으며 친구들과 뛰어노는 날들이다.


주인공의 과거 회상이 마치 ‘환상’을 보는 것처럼 묘사되는 이 영화는, 아이의 기억 속에 남은 순수가 현실의 잔인함과 교차됨을 통해 ‘어떤 사실’의 비극을 단순한 비극의 나열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느끼도록 한다.


이번 세 편의 영화는 역사적 사건이 중심이 된다. 시대가 묘사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인공은 어린아이이고, 아이들의 시선으로 서술되는 형형색색의 ‘사건’들이 맑고 투명해서 시리도록 아프게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조조 래빗


© <조조 래빗> 2020 타이카 와이티티


토끼 목을 비틀지 못해 ‘겁쟁이 토끼’라고 놀림 받는 주인공 조조. 자신도 히틀러 소년단에서 멋있게 전쟁 훈련을 받고 싶지만, 실은 겁이 날 뿐이다. 수류탄 때문에 상처까지 입게 된 조조는 자신의 추함(ugliness)을 탓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나치와 히틀러, 그리고 10대 소년인 조조. 히틀러는 조조의 상상 친구, 조조는 히틀러를 좋아한다. 뭐가 뭔지도 모르고 나치의 신념과 사상을 추종하지만, 그 ‘경도됨’에 열광하고 있을 뿐인 소년이다. 조조는 히틀러를 친구라고 생각하며 나치가 옳다고 믿지만, 이상하게도 친구이자 ‘옳아야’하는 이들은 자꾸만 자신을 불안하게 한다. 우리 가족들을 불안하게 한다.


알고 보니 우리 집 벽장에 숨어 있었던 유대인과 그런 유대인을 숨겨주던 엄마가 있었다. 그는 혼란하다. 뭐가 옳지? 그가 마주하는 현실, 그러니까 전쟁, 차별, 구분과 구별, 엄마의 죽음, 자신의 상처로 인한 참혹함이 아이의 방식으로 그려진다. 말하자면 똥꼬발랄하게. 심각한 담론이나 거대한 이해관계에 대한 논의는 수면 아래로 숨겨진다. 유대인이 말로만 듣던 ‘뿔과 꼬리가 달린 괴물’이 아니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 반나치 선전물 때문에 엄마가 죽었을 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세상이 ‘옳다’고 말하는 것과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조율해 나가는 조조라는 아이의 아이다운 방식이다.


우리는 얼마나 무의미한 것을 두고 서로를 미워하고, 싸우고, 죽이고, 욕했던 걸까. 아리아인이건 유대인이건 전혀 다를 바 없는 “human being”이라는 엘사의 말은 엘사에게 사랑에 빠진 조조의 마음으로 대변된다.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2006 기예르모 델 토로


주인공 오필리아는 임신한 엄마를 따라 새아버지가 있는 진지로 오게 된다. 아빠는 죽고 엄마는 새아버지와 재혼했으며 그의 아이를 임신했다. 새아빠라는 사람은 자기를 좋아하지도 않는 데다 또래는 없으며 임신한 엄마는 몸이 약해 침대에 누워 종일을 보낸다.


오필리아는 동화책을 사랑했고, 그런 오필리아에게 마치 동화처럼 요정 판이 찾아온다. 판은 오필리아에게 실은 오필리아가 지하 왕국의 공주이고 보름달이 뜨기 전에 세 가지의 임무를 완수해야 왕국으로 돌아가서 공주로서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는 주어진 과제를 따라가는 오필리아를 우리 또한 따라가게끔 한다. 판타지 장르의 이 영화는 동화적인 설정을 통해 어린아이인 오필리아가 ‘견뎌야 하는’ 현실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반추하도록 만든다. 영화의 결말까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오필리아가 본 요정 판은 진짜 오필리아에게 나타난 것일까? 아니면 오필리아의 상상일 뿐일까?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는 이처럼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아이라는 화자를 통해 소화한다.


1944년 스페인 내전이 끝나가던 무렵의 혼란한 시기라는 시대적 배경 아래, 아이는 행복해지고자 했다. 이왕이면 따뜻한 아빠와 따뜻한 엄마의 비호 아래 살아가는 공주이길 바랐다. 그러나 반드시 ‘공주’이기를 바랐던 건 아닌지도 모른다. 오필리아는 현재의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되고자 했다. 자신에게 불안감만 안겨줄 뿐인 현실에서만 벗어날 수 있다면.


그렇기에 오필리아는 마지막 순간에 마지막 임무를 수행한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질지라도.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 2008 마크 허먼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은 지독할 만큼 치명적이었던 동심과 그 순수함이 불러낸 비극을 설명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앞선 <조조 래빗>과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잔혹한 현실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주인공 브루노는 독일군인 아버지 밑에서 부유하게 살아가는 8살 소년이다. 아버지의 발령으로 도시에서 시골로 이사했다. 브루노는 지금 이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심심하고 지루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근처에 살던 할아버지는 의사이면서 왜 이런 지루한 곳에서 줄무늬 옷을 입고 농사를 짓지? 의아한 일투성이지만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집 뒤쪽에 난 개구멍으로 숲에 모험을 떠난 브루노는 같은 8살인 슈무엘을 만난다. 슈무엘은 그 할아버지처럼 줄무늬 파자마 같은 옷을 입고 머리를 빡빡 깎았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두 아이는 우정을 키워 나간다.


그렇다. 브루노의 아빠는 아우슈비츠의 관리자. 슈무엘은 수용소의 유대인이다. 이 영화는 가장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달려간다. 아버지가 없어졌다고 말하는 슈무엘과, 그런 슈무엘을 돕고자 하는 브루노. 브루노는 철조망을 넘어 함께 수용소로 간다. 독일군은 브루노와 슈무엘이 속해 있는 무리에게 ‘샤워’를 하러 가라고 했고, 브루노와 슈무엘은 그곳으로 간다. 물 대신 가스가 나오는 그곳으로.


영화는 가장 순수한 마음이 가장 파괴됨을 숨기지 않음으로써 이념과 사상의 ‘가치’를 묻는다. 아빠의 실종은 그게 어떤 인종이었느냐와 상관없이 찾기 위해 노력을 했어야 할 일이고, 그게 어떤 인종이었느냐와 상관없이 친구가 될 수 있으며, 그게 어떤 인종이었느냐와 상관없이 친구가 어려움에 처했으면 그걸 돕기 위해 움직인다는 것을. 그것이 결국 사람이 가진 선한 마음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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