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송혜현 Apr 16. 2024

입장들

<추락의 해부> <오펜하이머>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인간의 민낯이 낱낱이 드러날 때’ 글에서 영화 <괴물>을 다루며 나는 이렇게 썼다.


사람은 저마다의 입장을 갖고 산다. 모든 사건은 그 사건을 구성하는 어떤 조각들이 두드러져서 드러나기 마련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 따라 같은 상황을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점이다.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관련된 사람들이 있다. 각자에게는 자신의 입장이 있고, 입장들이 펼쳐질수록 옳고 그름을 판별하려는 시도는 점차 무용해진다.


세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영화들은 여러 입장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조명한다. 영화가 그려내는 잘못과 책임 사이,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선악을 가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떠할까.



추락의 해부


© <추락의 해부> 2024 쥐스틴 트리에


“난 그를 죽이지 않았어요(I did not kill him).”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정말(That’s not the point, really).” 남편이 추락해 사망했다. 산드라는 남편의 살인 용의자가 되었다. 목격자는 시각 장애를 갖고 있는 아들 다니엘뿐이다. 가능성은 남편의 자살 혹은 산드라로 인한 타살. 정황 증거로 재판이 시작된다.


검사와 변호사의 대립, 증인들, 증거들, 판사와 배심원과 참관인들, 산드라와 아들의 모습을 가로지르는 법정 시퀀스는 ‘진실’과 상관없이 편견에 따라 독해되는 ‘정황’의 온상을 연극적으로 구현한다. ’증언의 진실성’이라는 환상과 “재판의 목적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는 판사의 말이 교차된다. 산드라와 남편의 싸움을 담은 녹음 파일은 그 자체로 ‘진실’이 될 수 있는가?


증인으로 나온 수사관은 “분노의 정도가 산드라가 더 심했기 때문에” 그녀가 죽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녹음된 파일을 들으면 알 수 있다더니, 현장 검증 땐 목소리를 들어서 확실히 안다고 말한 다니엘에게 “목소리만 듣고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 검사는 산드라의 소설 일부를 읊으며 소설의 내용과 설정이 현실의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에 마치 그녀의 소설 내용처럼 남편도 죽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변호사는 말한다. “그런 식이면 스티븐 킹은 연쇄 살인마인가요.” 검사가 답한다. “아내가 의심스럽게 죽은 적은 없죠. 시간이 지나면 진위는 자연히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은 정황이지만 주장하는 것은 진실이다.


산드라가 죽였는가? 아닌가? 유죄 또는 무죄라는 단 하나의 결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영화는 관객에게 단 하나의 결과를 결코 증명해 보이지 않는다. 법정 공방이 계속될수록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진실과 허구 사이의 혼란이며, 유죄 또는 무죄 가운데 단 하나로 귀결됨에도 정작 이 혼란은 풀리지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가 산드라를 어떻게 바라보냐에 따라 재판의 결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보는 우리가, 관객이, 그녀를 어떻게 재단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산드라는 정말 남편을 죽였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재판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산드라를 능력 있는 여성으로 보느냐, 혹은 외도를 저지른 불륜녀로 보느냐, 혹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여성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산드라는 무죄일 수도 유죄일 수도 있다. 그저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경험과 입장과 편견에 기대어, 그렇게 바라는 ‘진실’은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채로 남는다.


“그냥 결정할 수밖에 없어.”

“믿음을 지어내라고요? 확신이 없으니 확신하는 척을 해야 하나요?”

“아니, 둘은 다른 거야.결정을 해야해.”

- 다니엘과 마르주의 대화


이옥섭 감독의 <메기>에서 윤영을 연기한 이주영 배우는 영화 관련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마 누군가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로 선택하거나 믿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자, 산드라는 남편을 죽였을까?



오펜하이머


© <오펜하이머> 2023 크리스토퍼 놀란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천재라 불리는 오펜하이머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아 핵폭탄을 개발한다. 그는 ‘그때’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랐다. 인간이기에, 그의 성정이 더 극화할 수 있겠지만, 모순을 안고 사는 인간이기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영화의 한 국면, 오펜하이머는 매카시즘의 타깃이 되어 공산주의자로 의심받고 자신의 모든 행보가 난도질당하고 있다. “제가 겪은 일들은 그 맥락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실한 조사는 ‘진실’을 밝힐까? 샅샅이 드러난 그의 언행, 그의 사생활, 그의 수치는 맥락을 완성할까. 그는 핵무기를 개발해 수많은 사람을 죽였고 한편 누군가를 구했고 핵무기를 유용하다고 여겼으나 절대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공산주의 사상에서 희망을 보기도 하였으나 나라를 위한 애국심으로 일하기도 하였다.


오펜하이머에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자네가 그 성취의 결과들을 감당할 차례라네. 사람들은 충분히 벌을 주고 언젠가 자네를 불러 연어를 주고 감자샐러드를 주면서 자네를 위한 연설을 하고 상을 수여할 걸세. 그들은 자네 등을 토닥이며 이제 모든 것이 용서되었다고 말할 것이네. 그러나 그건 자네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기억하게. 그건 그들을 위한 것일 뿐이네.”


자기가 해야 했던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고 자기가 따르고자 했던 것을 따랐던 이 사람은 그간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듯, ‘진실’이란 미명 아래 열린 청문회라는 심판의 자리를 견딘다. 마치 핵분열의 연쇄반응과도 같은 생의 연쇄적인 파멸을 삶으로써 증명해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 어떤 이론도 이론대로 적용되지 않는 삶이라는 실험은 타인에 의한 오명과 타인에 의한 찬사 사이에서, 여태까지의 온 과정을 뛰어넘어 오펜하이머를 엔리코 페르미상의 수상자라는 명예로운 결과로 남긴다.



* 이우빈, 2023-08-24, 씨네21  / “제가 겪은 일들은 그 맥락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습니다.” 1954년 비공개 청문회 자리에서 오펜하이머가 던진 말 / 이라고 언급된 부분에서 인용함.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2024 하마구치 류스케


조용한 산골 마을이 시끄러워진다. 도시의 중소 연예기획사가 이곳에 글램핑장을 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사업에 정부가 지원해 주는 보조금을 받고자 한다. 설명회에서 마을 사람들과 직원들의 대치 장면과 엔터 회사의 회의 장면이 잇달아 이어지며 도시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 순간 돈을 목적으로 삼는 자본주의의 치부처럼 느껴진다. 이들의 방식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그려지지만, 그 자체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언어와 겹쳐졌을 때 비인간성을 띠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마을 사람들 편인가요? 왜요?”


영화를 보는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 서 있게 된다. 그러나 직관의 영역에서 한 발 빠져나가 관조해 보면 그 관계에서 사실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마을 사람들이다. 마을 대표가 설명회를 진행하러 온 엔터 회사의 직원들을 대하는 모습도 그렇고, 마을의 주요 인사인 타쿠미가 그들을 대하는 모습도 그렇다. 또, 마을 사람들이 내세운 ‘입장’은 실상 자연 보호의 정의 따위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것으로 돈을 벌기 때문에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과연 이 극을 보는 나는 어떤 관점에서 산골과 자연을 바라보고 있었는가?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스테레오 타입은 무엇이었는가? 어쩌면 설명회 담당자로 마을에 온 타카하시의 생각처럼 "관리인이나 하면서 개나 키우고" 편히 살 수 있는 곳을 산골 마을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들도 똑같은 인간이다.


마을 사람들은 보조금을 받아먹으려는 도시의 회사에 일정 정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도 똑같이 자연의 것을 취하며 살아가고 제대로 잘 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멀리서 울리는 사슴 사냥 총성은 신경 쓰지 않는다. ‘멀리’ 있기 때문이다. “머니까 괜찮”기 때문이다. 각자의 책임은 거기까지다. 도시의 엔터 회사가 무엇이든 내세워 돈을 벌 명분을 삼고 적정한 선에서 책임론을 설파하듯, 마을 사람들도 그렇다.


“거긴 사슴이 다니는 길이야."

"울타리를 치면 되지 않을까요?"

"정말 단순한 사람들이네."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

 - 타쿠미와 엔터 회사 직원들의 대화


타쿠미의 딸 하나가 사라진다. 하나는 이곳의 사슴과 대치된다. 하나가 다니는 길과 사슴이 다니는 길, 사슴이 다니는 길을 막자는 도시의 사람들과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가냐고 묻는 타쿠미. "절대. 야생 사슴은 사람을 헤치지 않아. 빗맞았거나 그 부모인 게 아니라면.” ‘멀리’에 있던 것이 아주 가까이의 문제가 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괜찮다고 넘기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를 찾기 위해 뛴다.


자연의 삶을 안온함으로 치환하는 오만과 자연의 중요성에 숨은 이기, 타당함과 합리성, 정의와 이해(利害)를 오고 가는 우리의 ‘입장’은 결국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마지막 시퀀스로 이어진다.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간섭 가운데 결국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 선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 수 없다. 혹은 그 무엇도 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알 수 없다. 자연도, 인간도, 악도, 선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설명하는 이분법의 지리멸렬. 세속성에 대한 자연의 환유. “문제는 균형이야.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져.”

이전 13화 전쟁의 소용돌이 속 아이의 시선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