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들

<추락의 해부> <괴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by 은진송

*스포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래, 영화 <괴물>을 다루며 나는 이렇게 썼다.


사람은 저마다의 입장을 갖고 산다. 모든 사건은 그 사건을 구성하는 어떤 조각들이 두드러져서 드러나기 마련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 따라 같은 상황을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점이다.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고 관련된 사람들이 있다. 각자에게는 자신의 입장이 있고, 입장들이 펼쳐질수록 옳고 그름을 판별하려는 시도는 점차 무용해진다.


세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영화들은 여러 입장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내는지 조명한다. 영화가 그려내는 잘못과 책임 사이, 무의식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선악을 가르는 우리의 시선은 어떠할까.



추락의 해부


© <추락의 해부> 2024 쥐스틴 트리에


“난 그를 죽이지 않았어요(I did not kill him).”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정말(That’s not the point, really).” 남편이 추락해 사망했다. 산드라는 남편의 살인 용의자가 되었다. 목격자는 시각 장애를 갖고 있는 아들 다니엘뿐이다. 가능성은 남편의 자살 혹은 산드라로 인한 타살. 정황 증거로 재판이 시작된다.


검사와 변호사의 대립, 증인들, 증거들, 판사와 배심원과 참관인들, 산드라와 아들의 모습을 가로지르는 법정 시퀀스는 ‘진실’과 상관없이 편견에 따라 독해되는 ‘정황’의 온상을 연극적으로 구현한다. ’증언의 진실성’이라는 환상과 “재판의 목적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라는 판사의 말이 교차된다. 산드라와 남편의 싸움을 담은 녹음 파일은 그 자체로 ‘진실’이 될 수 있는가?


증인으로 나온 수사관은 “분노의 정도가 산드라가 더 심했기 때문에” 그녀가 죽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녹음된 파일을 들으면 알 수 있다더니, 현장 검증 땐 목소리를 들어서 확실히 안다고 말한 다니엘에게 “목소리만 듣고 어떻게 아냐”고 물었다. 검사는 산드라의 소설 일부를 읊으며 소설의 내용과 설정이 현실의 상황과 비슷하기 때문에 마치 그녀의 소설 내용처럼 남편도 죽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변호사는 말한다. “그런 식이면 스티븐 킹은 연쇄 살인마인가요.” 검사가 답한다. “아내가 의심스럽게 죽은 적은 없죠. 시간이 지나면 진위는 자연히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은 정황이지만 주장하는 것은 진실이다.


산드라가 죽였는가? 아닌가? 유죄 또는 무죄라는 단 하나의 결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만, 영화는 관객에게 단 하나의 결과를 결코 증명해 보이지 않는다. 법정 공방이 계속될수록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진실과 허구 사이의 혼란이며, 유죄 또는 무죄 가운데 단 하나로 귀결됨에도 정작 이 혼란은 풀리지 않는다.


말하자면, 우리가 산드라를 어떻게 바라보냐에 따라 재판의 결과는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보는 우리가, 관객이, 그녀를 어떻게 재단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산드라는 정말 남편을 죽였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재판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산드라를 능력 있는 여성으로 보느냐, 혹은 외도를 저지른 불륜녀로 보느냐, 혹은 가정을 돌보지 않고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여성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산드라는 무죄일 수도 유죄일 수도 있다. 그저 우리가 사로잡혀 있는 경험과 입장과 편견에 기대어, 그렇게 바라는 ‘진실’은 누구도 닿을 수 없는 채로 남는다.


“그냥 결정할 수밖에 없어.”

“믿음을 지어내라고요? 확신이 없으니 확신하는 척을 해야 하나요?”

“아니, 둘은 다른 거야.결정을 해야해.”

- 다니엘과 마르주의 대화


이옥섭 감독의 <메기>에서 윤영을 연기한 이주영 배우는 영화 관련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마 누군가를 믿거나 믿지 않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믿기로 선택하거나 믿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이라고. 자, 산드라는 남편을 죽였을까?



괴물


사람은 저마다의 입장을 갖고 산다. 모든 사건은 그 사건을 구성하는 어떤 조각들이 두드러져서 드러나기 마련이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 따라 같은 상황을 다르게 이해하고 해석한다는 점이다.


© <괴물> 2023 고레에다 히로카즈


예컨대, 극에서 호리 선생은 반 학생이 말한 "무기노 군이 죽은 고양이랑 놀고 있었어요."를 "무기노 군이 고양이를 죽였다."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는 여태껏 다소 이성적이고 바른 판단을 할 것이라는 그의 성정에 대한 극의 묘사와 사뭇 다른 양상으로, 수세에 몰리면 사람은 누구든지 누구라도 본인의 입장에 충실한 이해를 하게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런 식의 표현은 영화 내내 서로 다른 인물과 서로 다른 대사를 통해 등장한다.


인간은 자기만을 생각할 때 얼마나 불쾌하고 역겨워질 수 있는가.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듯이 자기만을 생각한 판단들이 타인에게 어떻게 회복되지 않는 상처를 입히게 되는가. "사실은 교장 선생님이 손녀를 죽였죠?" "걸스바 같은 데나 다니는 사람이". 나를 방어해 내기 위한 공명에 진위는 상관이 없다. 상황에 대한 어떠한 맥락도 사라진 채로 주관적인 응답은 정량화되고 이는 곧 사실이 된다(호리 선생님이 무섭습니까?를 묻는 설문조사처럼). 진실과는 상관없다. 자, 누가 '괴물'인가?


영화는 이 질문을 요리의 '병'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으로 치환한다. 날 때부터 돼지의 뇌를 가져서 병이 있다고 가스라이팅 당한 요리는 아버지로부터 동급생들로부터 괴물 소리를 들어왔다. 알고 보니 그 병이라 함은 동성애‘일 수도 있음*’을 말하는 것이었고, 이에 앞서 등장인물 각자의 관점에서 서술된 인간스럽지 않은 개개인의 일면들을 보여주면서 정말 인간이 갖고 있는 괴물성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말하자면, 사회가 '병폐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정말 병폐적인가, 또 그러한 것들을 병폐적인 것으로 취급한 우리는 정말 당당하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지금 여기 죄 없는 자가 있는가?


세계를 좁게 만드는 건 이미 좁아질 대로 좁아진 우리의 편협함 때문이다. 아이들보다 더 자유로이 무언가를 할 권한이 있는 사람들이 자꾸 자기만의 좁은 세계로 얼마든지 넓어질 수 있는 세계를 구겨 넣는다. 인간의 편협함을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극에서 등장하는 돼지의 뇌인가? 극에서 되묻는 것처럼 외계인이기 때문인가? 아니. 인간이. 인간이 그렇게 한다.


*‘일 수도 있음’이 중요할 것이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나이는 정체성을 확립하기에는 어린 나이다. 그러니 이들의 관계는 얼마든지 우정일 수 있는데, 그걸 이분법적으로 먼저 재단해 버린 아버지(어른)의 시선을 꼬집는다고도 볼 수 있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2024 하마구치 류스케


조용한 산골 마을이 시끄러워진다. 도시의 중소 연예기획사가 이곳에 글램핑장을 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사업에 정부가 지원해 주는 보조금을 받고자 한다. 설명회에서 마을 사람들과 직원들의 대치 장면과 엔터 회사의 회의 장면이 잇달아 이어지며 도시 사람들의 모습은 어느 순간 돈을 목적으로 삼는 자본주의의 치부처럼 느껴진다. 이들의 방식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그려지지만, 그 자체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마을 사람들의 언어와 겹쳐졌을 때 비인간성을 띠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마을 사람들 편인가요? 왜요?”


영화를 보는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마을 사람들의 입장에 서 있게 된다. 그러나 직관의 영역에서 한 발 빠져나가 관조해 보면 그 관계에서 사실상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마을 사람들이다. 마을 대표가 설명회를 진행하러 온 엔터 회사의 직원들을 대하는 모습도 그렇고, 마을의 주요 인사인 타쿠미가 그들을 대하는 모습도 그렇다. 또, 마을 사람들이 내세운 ‘입장’은 실상 자연 보호의 정의 따위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것으로 돈을 벌기 때문에 지키고자 하는 것이다.


과연 이 극을 보는 나는 어떤 관점에서 산골과 자연을 바라보고 있었는가? 이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스테레오 타입은 무엇이었는가? 어쩌면 설명회 담당자로 마을에 온 타카하시의 생각처럼 "관리인이나 하면서 개나 키우고" 편히 살 수 있는 곳을 산골 마을이라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러나 그들도 똑같은 인간이다.


마을 사람들은 보조금을 받아먹으려는 도시의 회사에 일정 정도의 반감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도 똑같이 자연의 것을 취하며 살아가고 제대로 잘 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멀리서 울리는 사슴 사냥 총성은 신경 쓰지 않는다. ‘멀리’ 있기 때문이다. “머니까 괜찮”기 때문이다. 각자의 책임은 거기까지다. 도시의 엔터 회사가 무엇이든 내세워 돈을 벌 명분을 삼고 적정한 선에서 책임론을 설파하듯, 마을 사람들도 그렇다.


“거긴 사슴이 다니는 길이야."

"울타리를 치면 되지 않을까요?"

"정말 단순한 사람들이네."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갈까?"

- 타쿠미와 엔터 회사 직원들의 대화


타쿠미의 딸 하나가 사라진다. 하나는 이곳의 사슴과 대치된다. 하나가 다니는 길과 사슴이 다니는 길, 사슴이 다니는 길을 막자는 도시의 사람들과 그럼 사슴은 어디로 가냐고 묻는 타쿠미. "절대. 야생 사슴은 사람을 헤치지 않아. 빗맞았거나 그 부모인 게 아니라면.” ‘멀리’에 있던 것이 아주 가까이의 문제가 되었을 때,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괜찮다고 넘기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를 찾기 위해 뛴다.


자연의 삶을 안온함으로 치환하는 오만과 자연의 중요성에 숨은 이기, 타당함과 합리성, 정의와 이해(利害)를 오고 가는 우리의 ‘입장’은 결국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는 마지막 시퀀스로 이어진다.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간섭 가운데 결국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 선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 수 없다. 혹은 그 무엇도 악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알 수 없다. 자연도, 인간도, 악도, 선도,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설명하는 이분법의 지리멸렬. 세속성에 대한 자연의 환유. “문제는 균형이야. 정도가 지나치면 균형이 깨져.”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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