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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근나 Apr 30. 2024

당신은 좋은 어른입니까?

<땐뽀걸즈> <거인> <한나 때문에>

영화 <굿 윌 헌팅>에서 주인공 윌의 친구는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네게 있는 재주를 가질 수 있다면 난 뭐든 할 걸.” 이름난 교수마저 윌 때문에 자격지심을 느낄 정도로 윌은 수학에 있어 엄청난 천재이지만, 불우한 가정 환경으로 인해 본인답게 살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인물이다.


윌은 심리학자 숀과 면담을 하게 되고, 숀은 재능이나 재능으로 인한 가치가 수식어로 붙은 윌이 아니라 그저 윌이라는 한 사람으로서 그가 자신의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 “네 마음을 따라가렴, 그럼 괜찮을 거야.”


읽었던 몇 권의 책-<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숨김없는 말들>,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을 떠올려 본다. 단 한 사람의 좋은 어른이 필요했던 사람들과 결국 그 단 한 사람이 구해낸 이들을 생각한다.


어려움에 당면했을 때 내 속에서 원인을 찾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내부적 원인 때문에 삶이 힘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떻게 하지 못하는 일도 세상엔 있고, 그 환경을 타개할 도움은 외부에서 오기도 하는 법이다. 사랑은 조그맣더라도 흔적은 깊을 수 있다.


세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는 작더라도 확실한 사랑이 필요했고, 그 사랑을 길어주는 어른이 필요했다. 나는, 좋은 어른일까?



땐뽀걸즈


© <땐뽀걸즈> 2017 이승문


다큐멘터리 영화인 <땐뽀걸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거제도의 여자상업고등학교, 학교 활동으로 댄스스포츠를 하는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표면적으로 여고생들의 댄스스포츠 동아리 활동을 다루고 있지만, 이면적으로는 하나의 산업-조선업-으로 경제가 돌아가는 지방 도시의 온상을 그려낸다. 구체적으로, 해당 산업이 무너져 내렸을 때 그곳의 시민들이 어떠한 삶을 살게 되는지, 그러한 가정에서 커가는 10대들의 현실이 어떠한지 보여준다.


현빈이는 생활비가 없어서 고깃집 알바를 한다. 현빈은 자신의 삶을 감당하지 못하는 때가 많다. 학교를 안 나오기도 한다. 은정이네는 식당을 하는데 조선업이 쇠퇴하고 오가는 사람이 없어 식당 역시 불황을 겪고 있다. 집에는 다섯 명의 동생이 있고 은정이는 맏이다. 지현의 아빠는 삼성 하청업체에서 일하다 퇴직 후 버스 기사 일을 하고 있다. 지현은 취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지만 취업 시장의 상황은 좋지 않고 취업하겠다는 결정조차 흐릿하게 느껴진다. 시영의 아빠는 희망퇴직 대상자가 되고 창업을 해보려고 서울로 올라간다. 시영은 아빠를 배웅한다. 조선소 취업이라는 안정적인 선택지가 무용해진 지금, 이 아이들의 열정은 어디에 있을까.


아이들은 생계에 도움이 되거나 자신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애쓴다. 당연히, 자아를 확립해 가는 이 시기에 생계와 밥벌이 같은 ‘현실적’ 단어들이 삽입되어 오자, 공부나 장래에 대한 꿈이나 희망적인 비전보다 당장 내일을 견디는 일의 각박함에 잠식된다. 그리고 여기, ‘땐뽀반(댄스스포츠반)’이 8명의 10대들의 꿈과 열정을 구원한다.


이규호 선생님은 댄스스포츠 동아리인 땐뽀반 담당 선생님이다. 그는 술을 마시고 숙취에 힘들어하는 열여덟의 제자에게 숙취해소제를 건네는 선생이다. 결석한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아프지 않기를 기도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아이들을 타일러 모이게 하고 밥을 먹이고 동기부여를 하고 연습을 시킨다. “승진? 우리가 승진하려고 선생 하는 건 아니다 아이가. 맞제? 아이들 가르키려고 하는데. 애들하고 잘 갈키고 사람 되게 만들어갖고 졸업시켜 주는 거 우리의 임무다. 애들이 몰라서 글치.“ 그가 동료 선생님에게 말한다.


“그런 거 있잖아요. 사람이 해야된다는 게 있을 때의 뿌듯함?”, “나 학교에서 제일 웃는 시간이 뭔지 아나? 체육 시간에 춤출 때가 제일 재밌음.” 댄스스포츠 재능과 별개로 학생들은 열정을 쏟는다. 그들의 열심이 드러나고 그 열심을 알아주는 선생님이 있다. 못한다거나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해보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함께 해내는 친구들이 있고 해내는 내가 있다.


“그냥 땐뽀하게 한 거… 못해도 열심히 할 수 있게 해주는 거. 잘하는 게 아닌데 그래도 맨날 열심히 하라고 봐줘서 그거 고맙고, (…) 그리고 사랑해요.” 일견 ‘문제아’로 보이는 이 아이들은 얼마든지 순수할 수 있었고 얼마든지 노력할 수 있었으며, 해냈고, 감사를 말했고 사랑을 표현할 줄 알았다. “애들은 떡 하나씩 줬는데 나도 하나씩 받아먹었는데 쌤이 들고 있는 떡을 내 입에 넣어줬을 때, 그때 그때 완전 감동이었어요. 아무것도 아닌데 그냥 한 명 딱 챙겨준 게 나잖아요.” 떡 하나만큼의 사랑은 그보다 훨씬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다.



거인


© <거인> 2014 김태용


에세이 <숨김없는 말들>의 부제는 ‘자립 준비 청년 이야기’. 작가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 ‘위탁 가정’에 맡겨졌다. 보호받을 나이의 아이에게 돌봐줄 사람이 없다고 판단되었을 때 위탁 가정의 보호를 받게 된다. 영화 <거인>에도 곧 자립 준비 청년이 될 한 10대가 등장한다. 주인공 영재는 부모가 있지만 아빠는 알코올중독에 다리를 다쳐 일을 하지 않고, 엄마는 허리를 다친 후 이모 집에서 살고 있다. 그렇게 영재는 그룹홈(공동생활가정)으로 보내진다.


아빠는 술을 끊고 열심히 살아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엄마 역시 영재와 동생을 돌볼 생각이 없는 것 같다. 영재는 성당의 운영 아래 있는 보호 시설 이삭의 집에서 신부가 되는 것이 꿈이라며 ‘착한 아이’ 행세를 한다. 그래야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버틸 수 있을 것이기에. 그래야 밥이라도 먹고 그래야 잠이라도 자고, 자기가 이렇게 함으로써 동생만큼은 원가정에서 잘 크기를 바랄 수 있기에. 그러나 사실 영재는 후원 물품을 훔쳐 팔고 있다.


눈칫밥이 낳은 가짜 꿈, 잘못된 방식으로 어떻게든 방출되는 불안과 스트레스,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팔아먹는 이기, 가식적이거나 위선으로 보이는 모습들까지. 윤리와 도덕은 영재와 멀어 보인다. 영재는 이렇게 기도한다. "무능한 아버지를 죽여주시고 못난 어머니를 벌해주시고 이런 나를 품어주세요." 그럼에도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영재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스크린 너머의 나 아니고서는 영재의 편은 한 명도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영재의 눈빛은 희망 없는 사람의 불온한 그것이다.


“어른이 돼서 왜 책임을 안 지려 그래? 우린 어디로 돌아가? 나는 누가 책임져? 민재는?” 영재는 매 순간 자기의 기대를 저버리는 가족을 미워하면서도 매 순간 가족에게 희망을 건다. 동생 민재마저 보호시설로 보내려 하는 부모님을 마주하자, 영재는 처참히 무너지고 만다. 동생과 함께 시설로 찾아온 아빠와 원장 아빠 앞에서 영재는 자해를 한다. 지금까지의 발버둥이 신부가 되겠다는 자기의 포장된 언어처럼 다 거짓 같다.


성당 선생인 대학생 누나는 말한다. “근데 선생님은 네가 네 말에 속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말하는 대로 살았으면 좋겠어.”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영재의 위안은 스스로를 속이는 데에 있고, 영재에겐 어쩌면 속아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현실이라는 말로 자꾸 아픔을 새기는 사람들로 둘러싸여 살아온 영재에게, 자기의 헛된 말을 반쯤은 속아주며 그리하는 마음을 살펴주는 사람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자기는 더 이상 자기를 속이거나 자기에게 속으면서 위안 삼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러나 희망이라는 단어를 심어줄 단 한 사람이 영재에겐 없었고, 그는 자기의 지갑과 돈을 동생에게 모두 건넨 후 다른 보호 시설로 떠난다.


살았으면 좋겠다. 영재가. 그리고 픽션 밖에서 그렇게 소망하는 일이 미안했다. 픽션 밖 어딘가에 존재할 영재에게 내가... 그렇게 말해도 좋을까. 그렇지만 꼭 살았으면 좋겠다. 꼭.



한나 때문에


© <한나 때문에> 2021 김달리


<한나 때문에>에는 베트남과 한국 혼혈의 다섯 살 한나가 등장한다. 한나가 다니는 어린이집에 어느 날부터 ’한나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우진의 엄마는 우진의 언어 발달이 느린 것이 혼혈인 한나에게 옮아서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또 한나가 낮잠 시간에 성적인 행위를 해서 다른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고 말을 전한다. 반 선생님인 유영은 소문이 의아하다.


어른들은 겉으로는 티 내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한나를 차별한다. 그들은 자신의 것이 너무나 소중하여 한나를 제대로 보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우진 엄마는 ‘다문화 가정’의 한나가 자기 아들과 같이 지내는 것이 은근히 신경 쓰여 원장에게 한나의 소문을 얘기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결코 한나의 존재가 불쾌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어린이집 원장은 소문이 어찌 됐든 한나가 어찌 됐든 다문화 가정의 한나보다 ‘중요한’ 학부모들의 의견을 들어주고 상황을 수습하는 게 더 중요하다. 어린이집 선생님들 역시 다문화라는 명분-어린아이들이 다양한 문화를 경험하면 좋다는, 이마저도 한나를 위한 명분은 전혀 아닌 명분-을 내세워 한나를 또래보다 어린 나이의 반으로 옮기자는 원장의 결정에 그저 동조한다. 한낱 기간제 교사일 뿐인 유영에게만 이 문제적 현실은 너무 또렷하게 문제였다.


크고 작은 차별들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차별들에 상처받으면서도 무뎌져 가는 아이는, 유영에게 돼지코를 해 보이며 못생겼냐고 묻는다. 다른 선생님 손에 이끌려 다른 반으로 옮겨져도 아무 말도 아무 투정도 부리지 않는다. 한나는 벌써 제 나이에 비해 많은 것을 알아버렸고, 또 감내하고 있었다.


영화는 다소 작위적이고 연극적인 방식으로 일명 ‘한나 때문에’ 생긴 문제들을 갈무리한다. 유영은 CCTV로 분위기를 바꾼 후, 어른들의 졸렬한 속내와 달리 재고 따지는 법이 없는 아이들의 순수한 적극성이 돋보이는 ‘연극적 놀이’를 한다. 아이들의 함성과 뜀박질이 어른들이 묻어놓은 차별의 구분 선을 들춰내고 또 헝클인다. 어른들은 당황하지만, 아이들은 뛰어노는 것일 뿐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한나는 같이 뛰어놀 친구일 뿐이다.


한나 때문에 일어난 일들은 과연 한나 때문이었을까? 한나 때문이라고 한 사람들 중에 한나의 입장과 생각과 의견과 감정을 물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한나에겐 한 사람이 있었다. 불리하고 불안정한 위치임에도 결국엔 나서주는 유영이 있었고, 한나와 아이들은 친구를 잃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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