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선> <콩나물> <자전거를 탄 소년>
가정의 달에 가족을 생각한다. 모성애에 관한 대표적인 영화인 <케빈에 대하여>와 부성애를 다룬 대표적인 영화인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떠올리다가, 결혼과 임신과 태어난 아이와 그 아이를 돌보는 일을 생각했다. 가정이라는 최초의 사회는 어떻게 일구어지는 걸까? 세 편의 영화로 이 과정을 따라가본다.
<두 개의 선>은 결혼과 임신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오래 사귄 커플이 임신하게 되면서 생기는 일들을 담았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어떻게 개인의 정체성을 뒤흔드는지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영화의 감독이자 주인공인 지민과 그의 연인인 철은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 아이의 존재로 인해 선택의 여지 없이 ‘부모’라는 타이틀을 얻는다. 성인 남성과 성인 여성 사이에 아이가 생긴다는 것은 당장 그날부터 자신의 이름 대신 부모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알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지민과 철이고 싶다. 부모라는 이름이 차지하는 비중보다 지민과 철이라는 이름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를, 자기 삶에 남아 있는 그 이름들을 지키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부모와 아이가 존재하는 공동체는 가족이라는 이름을 부여받는다. 내 이름은 ‘엄마’, ‘아빠’와 같은 단어들이 대신한다.
나아가 결혼은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내로 살아가자는 약속으로, 제도는 이러한 호명을 상식화(化)한다. 이에, <두 개의 선>은 ‘결혼을 하면 임신을 해야 하고 임신을 하면 결혼을 해야 하는’ 등 이치로 시작되어 제도로 완성된 것들에 대해 묻는다. 영화는 ‘제도로서의’ 결혼은 개성 상실이자 억압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우려한다. 개인과 개인이기를 거부당하고 특정한 역할이 부여된다. 그에 따른 책임이 강제로 밀려온다. 신기하게도 이 역할은 모두가 떠올리는 공통의 관념이 있을 만큼 합의된 것으로, 결혼은 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선행되는 매우 평범한 절차이자 의식이다.
이 제도는 왜 있어야 하는가. 함께 살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사람들은 왜 이 제도를 따라야 하는가. 이 제도 안에서 합의된 역할이란 무엇인가. 지민과 철은 영화 내내 묻는다. 그리고 끝내 지민과 철은 결혼한다. 아이에게 생긴 ‘이상(異常)’에는 평범함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린 결국 가장 보통의 것에 저항하고 가장 보통의 것에 순응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제삿날, 친척들이 모여 엄마와 제사 음식을 준비한다. 어른들은 이야기를 하고, 보리는 듣는다. 아이가 알아들을 리 없는 어른들의 이야기이지만, 정작 보리에게는 어떤 방식으로든 남는 것만 같아 보인다. 엄마는 “길을 하나도 몰라”서 “혼자서 유치원도 못 가”는 보리에게 콩나물을 사 오라는 심부름을 시킨다.
넷플릭스에서 유통되고 있는 일본 예능 <나의 첫 심부름>이 떠오르는 듯한 이 영화는, 자기 생애 최초의 심부름을 수행하는 작은 인간 사람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겪는 온갖 처음들의 정체를 감독만의 따뜻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심부름의 여정엔 변수가 많았다. 보리는 골목과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슈퍼를 찾아간다. 어렵게 갔더니 콩나물을 안 판단다. 시장에 가보란다. 보리는 큰 강아지를 만나 주저하다가 따돌리는 방법을 깨치기도 하고, 도와주려는 택배 기사 아저씨가 괜히 무서워져 없는 엄마를 찾기도 한다. 또래들의 오락을 구경하다가 갈등이 생기기도 하고, 놀이터에서 정신없이 놀기도 한다. 평상에서 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막걸리도 얻어먹는다. 시장 가는 길은 왜 이리 멀고, 보리의 눈을 사로잡는 것들은 또 왜 이리 많은 걸까.
보리는 그렇게 아빠와 똑같은 모자를 쓴 할아버지를 만난다. 할아버지는 직접 키우는 해바라기를 보리에게 쥐여주고, 해바라기를 들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영정사진에는 그 할아버지가 있었다. 할아버지. 보리는 여태껏 기억으로 알지 못했던 할아버지를 알아버렸다. 그 사랑을, 상상 혹은 경험한 것만으로도 보리의 심부름은 성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는 지름길을 찾지 못하고 온 동네를 돌아다녔고, 그새 자랐다.
영화의 첫 장면은 시릴이 전화기를 붙잡고 사라진 아빠에게 전화하는 장면이다. 보육원은 그 무용한 행위를 막으려고 전화기를 뺏고 또 뺏지만 시릴은 전화기를 붙잡고 또 붙잡는다. 시릴은 뛰쳐나간다. 아빠에게 있는 자기의 자전거를 찾기 위해 달린다. 실은 아빠를 찾기 위해 달린다.
시릴은 차라리 자전거가 도둑맞은 것이기를 바란다. 아빠가 제 손으로 자전거를 팔지 않았기를, 자전거의 사라짐과 아빠의 사라짐에 ‘의도’가 없었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래서 시릴은 집착이라 느껴질 정도로 아빠 찾기에 열중한다. 영화의 카메라는 고정된 적이 없고, 시릴은 내내 달린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고 두 다리로 달린다. 시릴의 달음박질은 어쩌면 시릴이 떨쳐 버릴 수 없는 불안의 요동과 닮았다. 시퀀스에 묻어나는 절박함과 간절함이 안타까움이 되어 관객에게 다가온다.
"왜 나를 데리고 왔어요?"
"네가 그렇게 하길 원했잖니."
사만다가 시릴의 위탁모가 된 데에 '사만다의' 이유는 없다. 적어도 영화에선 사만다의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다. 사만다는 그저, 시릴이 그렇게 해달라고 했기 때문에 위탁모가 되었다.
아이는 사랑받는 것에 서툴다. 자신의 말을 대가 없이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시릴은 자기가 받을 사랑에 근거를 붙이고 싶어 한다. 근거 없는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리고 근거들은 타인에게 베푸는 호의를 무척 용이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예컨대, 동네 불량배가 자신에게 잘해주자 시릴은 그가 시키는 불법적인 일을 배우고 실행한다.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돈을 주겠다는 그의 말에, 시릴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그럼 왜 해?”라는 물음에 시릴은 “널 위해서”라고 답한다. 아빠는 돈 때문에 시릴을 키우지 못한다고 했었고 그 말이 기억난 시릴은 그렇게 훔친 돈을 아빠에게 주려고 한다. 아빠에게 돈이 생긴다면 날 사랑해 줄 수 있을까, 아이는 울지 않지만 울고 있었다.
사만다로부터의 근거 없는 사랑도, 사만다의 사랑에서 기인한 보호와 제한도, 제대로 이해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던 시릴은 불량배의 꼬임에 넘어가 친 ‘사고’를 그저 책임지는 사만다를 보고 마침내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는다. 둘은 가족이 된다.
"사만다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사만다가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아이에게 어린 시절을 주고, 매일같이 자신의 실존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평온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줄까?' 그 기회는 아이로 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군가 먹을 것과 미실 것을 주고, 목욕을 할 수 있고, 당연한 거지만 매일 '나를 사랑할까, 사랑하지 않을까' 하고 스스로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을 뜻하죠. 바로 이것이 그녀가 그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그녀는 그가 성장할 수 있도록 어린 시절이라는 형식을 돌려줍니다."
- 미셸 시망 / 김호영 옮김, 인터뷰집 <다르덴 형제>, 105-106쪽
한국 영화 <거인>의 희망적인 버전일지도. 혹은 일본 영화 <아무도 모른다>의 다르덴식 이해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