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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근나 Jun 11. 2024

죽음과 기억

<너와 나> <애프터 썬> <데몰리션>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존재의 형태가 바뀌었을 뿐, 사라진 건 없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녹은 눈과 얼음은 기화하여 구름의 일부로 소급될 것이고 구름은 다시 비로 내려 부지런히 순환하는 지구라는 거대한 기차에 도달할 터였다. 부재하면서 존재한다는 것, 부재로써 현존하는 방식이 있다는 것, 이번 겨울에 나는 그것을 배웠다.

조해진 <겨울을 지나가다> 132쪽

소설 <겨울을 지나가다>를 읽고 남겨 둔 감상평에 나는 이렇게 썼다.


"소설은 죽음이라는 이별을 통해 사랑을 서술한다. 내가 존재하는 한, 당신의 존재하지 않음을 지각하며 살아가는 것. 부재의 감촉은 나의 현존이 빚는다. 결국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린 이의 생애는 영원히 감추어지고 나라는 주체의 기억으로 그의 생애가 이 땅에 남게 된다. 몇 가지의 매개체로, 칼국수로, 김치로, 옷으로, 반려견으로, 사망보험금으로, 다이어리로, 어느 날의 대화로, 얼굴들과 표정들, 끝내 상대의 입으로 듣지 못해 혼자 짐작하는 일들로. 남게 된다."

세 편의 영화는 부재의 감촉을 현존으로 빚어낸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이별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기억한 영화들을 소개한다.



너와 나


© <너와 나> 2023 조현철


세미는 하은이 죽어 있는 불길한 꿈을 꾼다. 다리를 다쳐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는 하은을 두고 수학여행을 가는 게 괜히 불안해진 세미는 하은을 수학여행에 데려가기 위해 애쓴다. 이 애씀들, 세미가 하은을 배려해서 하는 것 같은 일들은 실은 자기를 위해 하는 일이다. 영화는 10대 소녀들이 겪을 법한 갈등과 서로 간의 서운함, 감정의 파동을 세밀하게 조명한다.


세미의 청춘은 성장한다. 갈등의 시작과 갈등의 폭발, 갈등의 해소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세미는 세상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던 내 마음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하은의 상황과 감정을 마주한다. “내 생각만 해서 미안해.” 하은을 바라보는 세미의 클로즈업 쇼트는 우리에게도 말을 건다. 마치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느냐는 듯. 우리는 과연 성장 할-다음 단계로 나아갈-수 있을까?


영화는 세미의 꿈 이야기로 시작되지만 사실은 하은이 ‘꿈 이야기를 하는 세미의 꿈’을 꾼 것이다. 그날의 죽음은 누구의 얼굴이든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사고의 비일상은 지금 남아 있는 존재가 나인지 너인지 혼란한 감각을 야기하고, 감독이 선택한 연출이 바로 이것이다. 꿈과 현실을 교차하는 것, 누구의 꿈인지 누구의 현실인지 확인할 수 없는, 흐릿하고 ‘꿈 같은’ 질감으로 그려내는 것.


영화가 꿈과 현실을 가로질러 마침내 보여주는 것은, 수학여행 이후 모두가 사라진 자리와 사고 이후의 날들을 겪는 하은의 모습이다. 하은은 버스에서, 세미와 앉았던 자리에 앉아, 운다. 배경으로 들려오는 소리는 버스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고 소식이다. 영화 내내 어렴풋이 짐작하던 관객은 그제야 뾰족한 확신을 얻게 된다. 영화가 말하는 사고는 세월호 사고. 죽음은 세월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죽음이다.


감독은 부재함의 이유를 붙들고 있지 않은 대신, 부재의 감촉을 현존에서 찾아내는 일에 열중했다. 영화는 ‘사건’에 대한 사실이나 진실이 아니라 ‘감정’의 사실과 진실에 집중한다. 비일상적 사건에 납작해져 버린 ‘진실들’ 사이 기어코 살아남아 어찌할 도리 없이 버티게 하는 것들을 세미와 하은이라는 인물을 통하여, 둘의 관계를 통하여, 둘의 하루를 통하여 매우 일상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그날들은 일상이었으니까.


반쯤 걸친 물컵, 혼자 남은 교실, 거울에 맺히는 상. 사랑과 죽음의 병치와 중첩. 일상적인 시선의 생경한 서술, 보편의 담화와 행간으로 설명되는 이유, 성장과 이기, 확인되지 못한 마음, 한 곳에 모인 피난처의 강아지들과 그들이 원래 살았을 집에 대한 상상, 돌아오지 않는 응답, 전하지 못한 말. 그리고 무한한 사랑해, 하나의 갔다 올게.


‘꿈에서라도 만났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그렇게 추억하곤 한다.



애프터 썬


© <애프터 썬> 2023 샬롯 웰스


“아빠는 열한 살 생일 때 어땠어?” 소피와 아빠의 여행이 그려진다. 빛의 미감과 여름의 냄새가 풍기는 여행의 장면은 다소 절제된 스토리라인을 갖고 있다. 무슨 상황인 거지? 싶은 의아한 순간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덜 노골적인 대사와 덜 표현되는 묘사.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 걸까? 영화 밖에서 영화가 조형된다.


소피는 알고 싶은 게 있다. 영화는, 혹은 소피의 기억은, 혹은 소피가 본 캠코더의 영상은 끝내 정답을 말해주지 않는다. <너와 나>에서 영화가 나열한 사건들이 꿈에서 일어나는 일인지 현실의 일인지 확실하게 구분해 주지 않듯, <애프터 썬>도 톡 까놓고 말하지 않는다. 다른 점은 <너와 나>는 말하지 않았음에도 우리가 그 ‘끝’과 그리로 이르는 과정을 알아차릴 수 있지만, <애프터 썬>은 말하지 않았기에 끝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짐작할 뿐이다.


기억은 불가 항의 선택, 기록은 의식적 순수다. 결국 그것들을 모으고 모아 섞는 것은 기억과 기록의 주인이자 외부인인 ‘나’일 따름이다. 내게서 조형된 기억과 달리 기록은 다른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록조차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진실은 발화되지 않는 한 끝까지 알 수 없고, 그건 참 잔인한 사실이다. 기억과 기록이 섞이기에 괴롭다. 이 영화가 말하는 부재의 현존이란 그런 것이다.


서른한 살의 소피가 본 서른한 살의 아빠의 얼굴은 열한 살의 소피가 기억하는 얼굴과 다르다. 관객이 보고 있는 것은 소피가 꺼내 보는 캠코더의 영상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제야 보인다는 것이다. 아빠의 불안함이 보인다. 아빠를 휘감고 있는 우울의 형질을 알 것만 같다. 짧은 휴가가 끝나고 엄마에게 돌아가는 소피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아빠의 모습이 화면 안에서 일렁인다. 밤바다에 걸어 들어갔다가 나와 울며 소피에게 쓴 편지, 돈을 털어 산 비싼 러그.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은 아빠.


아빠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신이 겪는 아픔과 우울을 숨기고 딸의 기쁨을 위해 노력해 마지않는 아빠의 얼굴을, 소피는 이제야 마주한다. 화면 너머로. 기억의 편린을 기록으로 기워서. 소피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얼굴에서, 늙지 않고 남아 있는 얼굴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에서 기인한 모종의 상실감과 미안함을, 한편의 동질감을 느낀다. 아빠는 어둠을 꼭꼭 숨겼고 여행은 빛으로 가득 찼다. 소피가 잊지 못하는 그날의 빛만큼은 진실일 것이다.



데몰리션


© <데몰리션> 2016 장 마크 발레


“슬프게도 아내가 죽었는데 괴롭거나 속상하지도 않아요.” 아내의 죽음으로 시작되는 영화, 그 죽음이 슬프지 않다고 고백하는 남자가 있다. 아내가 살아있을 때 무심했듯이 죽음 앞에서도 무심해 보인다. 아내의 부재가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일까.


그러나 사람은 자기의 감정을 잊고 살아갈 때가 있다. 정확히는 속고 속인다. 마주 봐야 하는 감정을 피하고 싶어 외면하고 또 외면할 때, 감정을 지각하려는 용기가 사라질 때, 표면적으로 드러낼 ‘괜찮은’ 감정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위장된 감정에 스스로 속는다.


평소와 같이 일상을 살아가던 데이비스는 고장 난 자판기에 욱해 화를 내고 자판기 회사에 항의 편지를 쓴다. 항의 편지에는 그가 뱉어내고 싶은 내면의 말들이 구구절절 담긴다. 그가 속이고 싶었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냉장고에 붙어있는 아내의 쪽지 “바쁜 척 그만하고 나 좀 고쳐줘요.” 집안 곳곳에 존재하는 아내의 흔적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아내. 마침내 정체가 드러난 고독과 공허함 앞에서 데이비스는 고장 난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해. 뭐가 자네를 강하게 하는지. 사람 마음 고치는 것도 자동차 수리와 똑같아. 철저히 살펴본 후에 다시 끼워 맞추는 거지.” 장인어른이 말한다.


데이비스는 분해를 시작한다. 집안의 물건들을. 냉장고도, 컴퓨터도. 끝내 집도 부순다. 아내와의 기억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파헤치고 꺼내봐야 할 기억들이 모든 곳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무렇지 않게 여겼던 일상이 아내와 함께하는 결혼생활이었으며, 그것이 곧 그의 삶이었기 때문에, 그는 부순다. “파괴, 파멸. 뭔가 깨부수고 싶었던 것 없어?”


“뭐 하는 거라고요?”

“내 결혼을 분해하는 거.”


그렇게 모든 것을 해체하고 분해하고 파괴한 후에야, 데이비스는 드러난 자신의 마음과 조우한다. 차 안에 남아있던 아내의 쪽지를 읽고 데이비스는 울음을 참지 못한다. 밀려오는 추억들, 흐르는 기억들. 아내를 사랑했다. 다만 자신이 고장 났다. 진작에 깨졌어야 했으나, 정작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야 깨질 수 있었다. 그리고 결국 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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