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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근나 Apr 23. 2024

먹고사는 일에도 낭만은 필요하다

<비긴 어게인> <굿모닝 에브리원> <소울>

소설가 장류진의 단편 ⌜탐페레 공항⌟의 주인공은 학창 시절 내내 ‘다큐멘터리 피디’를 장래 희망으로 적어내던 사람이다. 그는 특별한 경험을 쌓고자 더블린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나는 길에 환승 공항이었던 탐페레 공항에서 시력을 잃은 노인과 이야기를 나눈다. 노인은 주인공의 사진을 찍어주고는 집으로 보내줄 테니 주소를 적어달라고 말한다. 한국으로 돌아온 주인공을 반기는 것은 오로라 엽서에 쓰인 노인의 편지와 그날의 사진. 그는 기뻤고 벅찼으나 답장을 미루고 미뤄서 끝내 그 사진과 편지는 서랍 속 어딘가에 잠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다큐멘터리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그날의 대화도 깊숙이 잠들어 버린다. 주인공은 현실에 치였다. 힘들었고, 지쳤다. 취업을 준비했고 안 되었고 그게 반복되었고 불안했고 무력했다.


연봉계약서에 서명하던 그 순간, 씁쓸한 감정이 들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정말이지, 진심으로, 기뻤다. 방송국이고 피디고 뭐고 지긋지긋했다. 대신 4대 보험이 어쩌고 하는 말들과 상여금, 특근수당, 연차와 실비보험 같은 단어들이 그렇게나 따뜻하고 푹신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p. 206-207, 탐페레 공항, 일의 기쁨과 슬픔



그렇게 ‘푹신한’ 이유로 피디와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던 주인공은 우연히 신입 피디 채용공고를 보게 된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했던 경험과 그 이유를 기술하시오.’ 자기소개서에 있던 문항이다.


나는 테이프 위에 남은 꼬질꼬질한 종이의 흔적을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회하는 몇 가지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써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고, 떼어내도 끈적이며 남아 있는, 날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꺼내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는 힘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p. 209, 탐페레 공항, 일의 기쁨과 슬픔


하여간 우리는 일생에 고민이 많다. 특히 먹고사는 일에 관해서는.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서랍 속 숨겨둔 오로라 엽서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미루고 미뤄서 미처 보내지 못한 답장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가장 후회’하게 될 일이라는 것을 내심 짐작하게 있으면서 애써 무시하고 있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쉬이 낭만이라는 단어 하나로 축소되고, 또 낭만이라는 단어 하나를 이유로 굉장히 어려워지기도 한다. 당신의 오로라 엽서와 답장을 함께 찾아 헤맬 세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비긴 어게인


© <비긴 어게인> 2014 존 카니


기회의 도시, 뉴욕. 어느 바에서 그레타가 노래를 부른다. “God, tell us the reason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Searching for meaning. But are we all lost stars, trying to light up the dark…” 바람난 남자 친구인 데이브에게 불러준 적이 있는 자작곡이다. 그리고 그곳엔 실패의 기운이 온몸을 휘감은 ‘한물간’ 프로듀서 댄이 있다. 그는 동업자와의 갈등으로 회사에서 내쫓기고 오늘도 술을 마시고 있다. 음악에 관하여는 천재적 안목과 감각을 가졌지만, 가정은 와해되고 술을 달고 살며 제대로 된 삶을 꾸려나가지 못하고 있는 신세다. 그런 그가 그레타의 노래를 듣게 되고 계약을 제안하게 된다.


‘나’다운 진정한 음악을 하고 싶었던 그레타. 뉴욕에 함께 온 남자 친구는 대중적인 성공에 취해가고 급기야 연인으로서도, 음악인으로서도 자신을 배신하기에 이른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좋은 음악을 제작하고 싶었던 댄. 단순히 돈이 된다고 기계 찍어내듯이 찍어내는 흔해 빠진 음악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마주한 현실은 본인이 일군 회사에서 쫓겨나는 것. 그렇게 각자의 현실에 절망했던 그레타와 댄은 좋은 노래를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잃었던 열정과 희망을 찾아간다.


'lost stars', 'tell me if you wanna go home', … 연주자들과 그레타의 친구 스티브와 댄의 딸 바이올렛과 댄이 골목에서 또 옥상에서 하나가 되어 하나의 노래를 만들어 간다. 가사와 멜로디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동안 그들의 삶 곳곳에 벌어져 있는 상처들도 하나씩 봉합되어 나간다. 가족에 대한 사랑, 노래에 대한 열정, 내가 하고 싶었던 음악에 대한 진심 어린 고민, 돈 되는 대중성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이 댄과 그레타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들을 다시 삶의 자리로 세운다. 좋은 조건의 음반 계약을 마다하고 온라인에 1달러로 공개한 앨범은 그들이 붙든 마음과 삶을 잃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느껴진다.



굿모닝 에브리원


© <굿모닝 에브리원> 2011 로저 미첼


누구나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오랫동안 꿈꿔왔던 자리를 얻어내고, 자리를 얻었으면 인정받고, 인정받으면 지켜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던가. <굿모닝 에브리원> 속 베키도 마찬가지다.


베키는 지방방송국에서 조연출로 일하고 있다. 맡은 일을 무난하게 잘 해낸 덕분에 자기가 곧 책임 PD로 승진하게 될 거라는 소문이 제 귀에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돌아온 것은 승진이 아니라 해고 통보다. 참담한 심정이었지만, 당장의 생활 앞에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법. 베키는 재취업을 위해 노력했고 메이저 방송사의 아침 프로그램 ‘데이브레이크’의 PD를 맡게 된다.


그러나 인생사 새옹지마라 하던가, 이 모닝쇼 문제다. 시청률이 바닥, 베키는 시청률을 끌어올려야 한다. 남자 앵커는 제멋대로에 비협조적이고 예의도 없다. 이대로라면 팀원들 간의 조율도 안 될 테니 시청률은커녕 내일 폐지나 안 되면 다행이다. 베키는 그를 자르고 새로운 앵커를 영입하기로 한다.


거물 앵커 마이크 포베로이. 월급은 받으면서 맡은 프로그램은 없는 상태. 기자 정신의 프라이드로 모닝쇼 따위는 하기 싫단다. “데이브레이크는 저와 같아요. 가능성을 믿어줄 사람이 필요하죠. 제 능력이 미덥지 않으시겠지만 전 항상 가장 먼저 출근해서 마지막에 퇴근해요.” 사정하여 마이크를 불러왔더니 이젠 여자 앵커인 콜린과 자존심 대결을 하기 시작한다. 베키는 두 고래 사이의 새우가 되어 등이 터져가면서 바닥을 친 시청률을 회복시켜 폐지를 막으려고 고군분투한다.


영화는 저널리즘과 방송이라는 영역에서 어떤 이슈를 다룰 것인가에 대한 의미를 말하기도 한다. 흔히 가십이나 이슈 거리 등 자극적인 것을 내보내는 이들은 흔히 먹고사는 일에 몰두하여 중요한 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경시되기도 한다. 영화 속 마이크가 데이브레이크를 꺼렸던 것도 본인은 거시적이고 진중한 사안을 다루는 것만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그 프리타타’ 만드는 법 따위를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것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그러나 영화는 본인의 자리에서 열정을 쏟는 베키로 인해 마이크가 “정보도 있고 흥미도 갖춘 일명 ‘현미 도넛’”의 뉴스를 직접 특종을 잡아 보도하고, 그렇게 폄하하던 에그 프리타타를 스스로 앞치마를 두르고 만들어주는 모습으로 뉴스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화합을 꾀한다. 우리가 현미만 먹고 살지도 않고 도넛만 먹고 살아서도 안 되듯, 뉴스 또한 진지한 것이 있으면 이슈 메이킹에 중점을 둔 아침 프로그램도 필요한 게 아닐까. 어쩌면 현미 도넛처럼 둘 다 잡으면 더 좋고 말이다. 먹고사는 일도 그런 것 아닐까. 진중하고 열정적인 한편 도넛같은 유쾌함도 필요한 법이다.



소울


© <소울> 2021 피트 닥터


재즈 피아니스트로 성공하고 싶은 주인공 조는 기회를 찾고 있다. 마침 기회가 온 찰나,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고 만다. 조가 도착한 곳은 지구로 가기 전 영혼들이 모여 있는 ‘유 세미나’. 그곳에서 사고뭉치 영혼 ‘22’의 멘토가 되어 그를 지구로 귀환시켜야 조도 지구로 돌아갈 통행증을 얻는다.


22가 사고뭉치 영혼 취급을 받게 된 이유는 그가 지구에 가기를 미루고 또 미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22는 지구에 가야 하는 본질적인 이유, 그러니까 영혼뿐이었던 지금에서 육체가 씌워진 삶을 살아내는 것의 목적을 찾아내지 못해 지구에 가기 싫어하는 상태였다.


우여곡절 끝에 둘은 지구로 가게 되지만 조의 영혼은 고양이의 몸속으로, 22는 조의 몸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22는 조의 몸으로 세상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22는 인생의 사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고 조는 22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생각해 왔던 삶의 목적성과 지향점을 재고한다. 성공에 대한 확고함을 삶의 목적이라 칭해도 충분할까.


스스로 근사해지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면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삶의 목적이나 삶의 의미, 그런 것은 ‘내’가 대단해지는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맑은 날씨에 햇볕을 잠깐 쬐더라도 그 안에서 기쁨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지에 달린 것일지도 모른다. 일분일초에 느끼는 감각과 순간의 행복을 알았을 때, 이 땅의 창조물에 감사와 은혜를 느낄 때, 비로소 내 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정답을 알아서가 아니다. “Find your spark, and never let it go.” 어쩌면 재능도 그 기쁨의 일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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