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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혜현 Mar 12. 2024

헤어짐으로써 완성되는 꿈과 사랑 사이

<먼 훗날 우리> <라라랜드> <패스트 라이브즈>

영화 <첨밀밀>의 두 주인공은 일명 ‘홍콩 드림’을 마음에 품고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이주한다. 둘은 친구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곁을 맴돌다, 현실이라는 이름의 선택과 선택이 겹쳐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한참이 지나 그들이 함께 좋아하던 가수의 부고를 전하는 뉴스에, 둘은 한 가게 앞에서 멈춰 서게 되고 운명처럼 조우하게 된다.


<첨밀밀>의 사랑이 그러하듯, 어떤 사랑은 둘의 끌림 자체로 온전해지지 않기도 한다. 헤어져야 비로소 완성되는 사랑들이 있다. 흔히 이러한 사랑을 엇갈림이라거나 ‘타이밍’의 문제로 이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그들이 엇갈렸기 때문에 이 사랑이 완성된 것이 아닐까 하는. 타이밍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둘은 사랑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이번에 소개할 세 편의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각자의 꿈이 있다. 꿈과 현실은 마치 물과 기름 같아서 균형을 이루며 적절히 조화되기 어렵기 마련인지라, 어느 한쪽의 손을 들면 다른 한쪽이 자연스레 자취를 감추게 된다. 사랑은 이 둘 사이를 매개한다. 사랑은 연결하고 또 사랑은 맺는다. 사랑은 주인공들이 가진 꿈에 대한 열정과 야망을 타오르게 하고, 주인공들이 현실적인 선택을 하도록 한다. 거기까지가 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패스트 라이브즈


© <패스트 라이브즈> 2024 셀린 송


제삼자의 입으로 서술되는 세 사람의 관계, 오프닝 시퀀스가 관객을 사로잡는다. 영화는 주인공 나영 가족의 이민으로부터 시작된다. 왜 이민하냐는 해성 엄마의 말에, 나영 엄마는 말한다. “버리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거든요.”


나영은 노라(Nora)가 되고, 12년이 흘렀다. 한국에서 캐나다로 캐나다에서 뉴욕으로 두 번의 이민을 거쳐, 노벨 문학상에 대한 야망에서 퓰리처상을 염원하는 극작가가 되었다. 해성은 좋은 대학에 다니는 군필 복학생이 되었다. SNS로 닿은 연락이 영상 통화로 긴밀해진다. 시공간을 넘어 연락을 이어가는 둘 사이의 긴장감이 지독하리만치 생생하다. 아직 어떠한 단어로도 정의되지 않은 채로 일렁이는 둘의 긴장과 설렘이 매개된 화면(노트북 모니터의 스크린)의 매개된 화면(극장의 스크린)으로 흘러 다닌다.


“넌 언제 뉴욕에 올 수 있어?” “내가 왜 가?” “넌 서울 안 와?” “내가 서울을 왜 가.” 서로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는 듯이, 결정적인 순간에 자꾸만 어긋나는 이들의 뜨거운 날들은 나영이 뱉은 몇 줄의 문장으로 끝이 났다.  “나는 두 번의 이민을 거쳐서 여기에 왔어. 이곳에서 이루고 싶은 게 아주 많아. 그런데 너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내가 자꾸만 한국 가는 비행기를 알아보고 있잖아.” 늘 붙어 다니던 초등학교 동창으로, 좋은 아이라는 기억이 남은 등하교 짝꿍으로, 오랫동안 보지 못한 친구라는 이름으로 남은 채로. 여전히.


그리고 12년 후, 나영은 결혼을 해서 가정을 이뤘고 해성은 사귀던 여자 친구와 결혼 문제로 헤어졌다. 나영은 가정을 이루고 단란하고 평범하게 살아가며, 해성은 스스로를 평범한 직장에 평범한 벌이를 가진 평범한 남자라 평한다. 해성은 휴가라는 핑계로 나영을 보기 위해 뉴욕을 찾아간다.


나영의 남편 아서는 해성의 존재를 알고 있다. 해성과 나영 사이에 자신이 낄 틈 없는 추억이 있다는 것도, 나영이 현실과 선택이라는 이유로 숨겨두는 어떤 진심을 알고 있다. 나영이 해성을 만나고 온 날, 아서는 나영에게 말한다. “너 잠꼬대는 꼭 한국어로 하는 거 알아? 가끔은 그게 겁나. 당신이 내가 이해 못 하는 말로 꿈꾸는 것. 당신 마음속에 내가 가지 못하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두려워.” 나영은 이민자다. 나영에게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고 해성은 나영의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해성이 “한국인답다(So Korean).”라고 말하는 나영의 말을 듣는 아서가 표정을 정리한다.


나영은 꿈을 위해 이민을 왔고 무엇이라도 해내야 했었다. 마침 그 시기 아서를 만났고 그린카드(시민권)를 위해 또래보다 빠른 결혼을 했다. 아서는 하필 그때 예술인 레지던시에서 만난 사람이 나여서 우리가 결혼한 것일까, 하고 나영에게 묻는다. 이민과 함께 갖고 온 너의 꿈이 나와 결혼해서 이스트빌리지의 작은 아파트에 사는 걸로 충분해진 거냐고 묻는다. 나영은 내가 지금 선택한 것은 너라고,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말한다. “자기는 내 삶의 의미를 크게 해주는데 나도 그런 의미인지 궁금해서.” 아서가 말한다.


“넌 너이기 때문에 떠나가야 했어. 내가 널 좋아한 이유는 네가 너이기 때문이야. 너는 떠나는 사람인 거야.” 늘 잘하고 잘 해내고 싶었던 1등 나영과 그런 나영을 사랑했던 해성. 나영에게는 이제 노벨 문학상이나 퓰리처상이나 토니상 따위보다 당장의 연극 리허설이 중요하다. 나영과 해성은 20년 전 그 애들을 그 자리에 두고 제자리로 떠나와야 한다. 어느새 숨어버린 이상처럼 그들은 서로를 거기에 두기로 한다. 어떤 것은 버렸고 어떤 것은 얻었다.



라라랜드


© <라라랜드> 2016 데이미언 셔젤


주인공 미아와 세바스찬은 꿈을 꾸고 있다. 이때 꿈은 중의적이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일과 가정해 본 상황에 대해 꿈을 꾸는 것 같은 연출로 구현하는 꿈. 영화는 꿈의 세계라 하였다. ‘라라랜드’ 자체도 꿈이란 말이다. 곧 이 영화는 꿈의 재현, 즉 영화는 관객에게 꿈을 꾸는 듯한 경험을 부여하고 관객은 무의식 속에서 그에 동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라라랜드>는 영화라는 꿈을 꾸는 관객에게 러닝 타임 동안 꿈같은 장면들을 선사한다. 실제인 듯 또는 상상인 듯 경계가 모호한 꿈처럼 묘사하는 장면들로 플롯을 이어간다. 그리고, 이 꿈 같은 장면들을 엮어 ‘꿈’이라는 서사를 서술한다.


미아와 세바스찬은 각자의 꿈을 이루고자 하지만 그들의 방향은 같지 않았다. 미아는 꿈을 향해 달려가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힌 자신을 견딜 수 없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자신의 열정을 지키고 싶어 한다. 세바스찬은 미아보다 자신의 꿈에 있어 미아보다 훨씬 열정적인 인물로 묘사되지만, 점차 꿈이 아닌 현실의 세계에 좀 더 몸을 기울이게 되면서 미아의 걸음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둘의 저녁 식사 장면은 미아와 세바스찬의 엇갈림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바스찬은 미아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꿈을 내려놓고 현실에 타협한다. 원래 하고 싶었던 “한 물간” 재즈를 하는 대신, 유명 밴드의 키보드 세션이 된다. 모순적이게도 미아는 세바스찬의 이 현실적인 선택에 실망한다. 자신과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던 동반자의 현실 타협이라니. 저녁 식사 전 세바스찬의 공연 장면, 즐기지 않음에도 안도하고 타성에 젖어 듦에도 기뻐지고자 하는 그의 모습과 미아의 복잡한 심경이 어우러진다.


막상 세바스찬은 미아만큼은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은 사랑을 위해 미아를 위해 현실과 타협하지만, 미아만큼은 자신의 이 현실적 선택을 딛고 꿈을 쫓길 바란다. 그러나 그의 마음과 달리 미아의 사랑은 자신 ‘때문에’ 현실적인 선택을 한 세바스찬의 모습에 생명력을 잃고 만다.


극의 끝, 둘의 추억이 담긴 이름의 재즈바, 셉스에서 세바스찬과 미아가 먀주한다. 세바스찬은 자기의 연주 공간이 있는 재즈 연주자가 되었고, 미아는 유명 배우가 되었다. 그들은 헤어졌고, 꿈은 이루어졌다. 셉스에서의 맞닿은 두 시선이 전하는 메시지는 오롯이 관객에게 떠넘겨진다. 이 헤어짐은 비극일까 혹은 행복일까.


"만약 이랬다면"이라는 상상으로서 존재하는 생각을 재현하는 가정법의 영화. 우리가 부딪히는 수많은 현실의 벽은 결국 사랑이었던가. 그리 생각하면 참으로 낭만 없는 영화인데도, 그들의 사랑이 꿈을 지켜내기 위한 사랑이라면 영화 속 플래시백(flash back)처럼 낭만적인 영화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먼 훗날 우리


© <먼 훗날 우리> 2018 유약영 / 넷플릭스


성공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베이징으로 온 주인공 샤오샤오와 젠칭. 타향살이를 의지하던 친구에서 연인이 된다. 작은 방 한 칸에, 당장의 미래는 막막하고, 돈은 없어도 행복은 충만하다. “더는 먹고 살기 위해서만 일하지 않는다. 샤오샤오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게 일하는 낙이다. 사는 게 만만치 않지만 샤오샤오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견딜 수 있다. 베이징에서 둘이 지내니까 혼자보다 훨씬 더 살만하다. 악착같이 돈을 버는 것도 우리 둘을 위해서다.”


샤오샤오는 집 있는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 젠칭은 게임을 만들어 성공하고 싶어 한다. ‘이언이 역경들을 물리치고 캘리를 찾아가는 내용’의 게임. 둘은 하루하루를 서로의 작은 웃음에 힘입어 살아 내보려 하지만, 젠칭은 스스로가 자꾸만 초라해진다. 성공하고 싶다는 마음이 꺾이고 사랑도 사람도 신경 쓸 수 없을 만큼 무너져 내리고 만다. 샤오샤오는 젠칭의 등 뒤로 이별을 말한다. 젠칭은 샤오샤오를 쫓아가지만, 결국 샤오샤오가 탄 지하철에 차마 올라타지 못한다.


“이언이 캘리를 못 찾으면 세상에 색깔이 없어”진다는 게임의 내용처럼, 영화는 둘의 현재를 무채색으로 보여준다. 10년이 지나, 젠칭이 만든 ‘이언이 캘리를 찾는’ 게임은 성공했고 베이징에 집을 살 수 있는 남자가 된 젠칭은 샤오샤오를 찾는다. 하지만 샤오샤오는 말한다. “이제는 나도 그때 내가 아니야.”


“난 보금자리를 원했어.” 샤오샤오가 원했던 것은 ‘베이징’의 집이 아니라 그저 집이라는 관념으로 표상되는 안온함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단칸방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던 소파처럼, 둘만의 온기를 간직할 보금자리 말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는 재혼하여 외국에 있는 샤오샤오에게는 내 편으로서 나와 함께 의지하며 살아갈 동반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살아갈 집은 반드시 베이징이 아니어도 괜찮지만, 그저 베이징이라는 이름으로 속삭이기 쉬웠을 뿐이다. 가장 깊은 진심은 가장 쉬운 언어로 치환되기 마련이다.


젠칭은 묻는다. “그때 네가 떠나지 않았다면 훗날의 우리는 달라졌을까?” 샤오샤오는 말한다. “I miss you.” 나도 보고 싶었다고 답하는 젠칭에게 샤오샤오는 다시 답한다. “내가 널 ‘놓쳤다’는 말이야.” 놓쳐서 말할 수 있는 그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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