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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년실격 Sep 24. 2023

할 줄 안다고, 할 필요는 없다

위탁생산에서 배우는 레버리지

당신은 물구나무를 할 수 있다. 심지어 잘한다. 그런다고 출근을 물구나무로 하진 않는다. 당신은 비트박스도 잘한다. 정확한 리듬을 찍는다. 그래도 소개팅에서 비트박스를 하진 않는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지금은 이상한 말처럼 들려도, 양쪽의 간극을 조금씩 줄이면 헷갈리는 지점이 생긴다. 할 수 있다면, 해야 한다고 착각했던 우리처럼.


셀프의 함정

우리는 젊은 남정네 둘이다. 건강하다. 키도 180이 넘는다. 손 뻗으면 까치발을 하지 않아도 천장이 닿는다. 둘 다 "첫 창업"에 대한 열망이 크다. 게다가 창업 초라 열정 넘친다. 언제든 열심히 몸 쓸 준비가 돼 있다. 심지어는 조금은 힘들기까지 바란다. 땀 흘리고, 창업하면서 한 두 군데 다쳐야만 진짜 창업이란 착각을 한다.   

 우리가 계약한 파티룸 매물은 연식이 있었다. 위치나 월세가 마음에 들어서 계약했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고민 많았을 매물이다. 그전엔 학원으로 쓰였다고 한다. 스튜디오로 탈바꿈하기 위해서 건물 안 쪽을 싹 다 벗겨야 했다. 천장, 벽지도 뜯어내고, 바닥은 부수고, 가벽은 전부 트고. 이른바 대철거의 시작이었다.

 동업자 친구는 전시 기획자 출신이다. 여러 공간을 다니면서 0부터 시작해서 멋진 공간을 만들어 본 경험이 많다. 물론 그가 직접 망치를 든 거는 아니다. 전문 실장님들을 고용해서 관리, 감독하는 일에 가깝다. 직접 망치를 들 때도 없지 않다. 그렇지만 그것은 돕는 일에 가깝다. 그의 메인 잡은 직접 철거의 1인분으로 참여하기보단 실장님들과 커뮤니케이션하면서 계획을 조율하는 일이다.


할 줄 알아서, 했다는 일에 함정

만약, 동업자 친구가 철거를 할 줄을 몰랐다면, 우리는 직접 철거를 하지 않았을 거다. 당연한 말이다. 할 줄 모르는 데 어떻게 하냐. 조세호가 결혼식에 던 것처럼.

우리는 아뿔싸 철거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래서 했다. 무엇보다 비용을 아끼고 싶었다. 게다가 육체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기분도 느끼고 싶었다. 신성한 노동을 대하는 마음처럼. 직접 인테리어를 해본 경험이 전혀 없던 나는 첫 하루, 이틀은 철거를 즐겼다. 쾅쾅 부시면서 스트레스 해소다.


그리고 그렇게 부동산 가계약부터 철거까지만 두 달이 걸렸다. 당초 1개월을 계획한 우리 일정을 훌쩍 넘긴 결과였다.


두 달

물론 매일같이 철거에 달라붙었음에도 두 달이 걸린 건 아니다. 우리는 둘 다 본업이 있었다. 그렇기에 늘 시간이 부족했다. 게다가 당시에 동업자는 해외 출장이 잦았고, 나는 지리적인 이유로 매일같이 파티룸을 갈 수 없었다. 가더라도 철거 방법도 몰랐다. 이와 달리 동업자는 가깝고, 전문가이지만, 절대 시간이 부족했다. 그러니 주말, 평일 저녁마다 짬짬이 하는 걸로는 진도가 나질 않았다. 짹각짹각 계속해서 시간만 까먹었다. 건물주와 잘 얘기해서 얻어낸 개업 기간 월세 무료 기간도 넘겼다. 우리가 파티룸 공사기간 동안 시간을 돌려서 딱 한 번 결정을 다시 바꿀 수 있다면 분명 철거는 업체에게 맡겼을 거다.


위탁 생산

위탁 생산은 본사에서 생산하지 않고 다른 업체에게 생산을 맡기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CMO라고도 한다. 제약회사에선 많은 이유로 의약품 생산을 위탁한다. 여기서 핵심은, 우리 회사가 약을 만들 수 있음에도, 다른 회사에 그것을 맡긴다는 결정이다.

 생산기획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위탁생산은 여러 장점을 가지고 있다. 먼저 핵심은 CAPA확보다. CAPA란 생산능력을 말하는데, 쉽게 풀면 "특정 기간 동안 생산할 수 있는 수량의 합"이다. 우리 회사는 대략 연간 10 억정 근처로 약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다른 업체에게 위탁생산을 맡기면 우리 회사의 총 CAPA를 더 할 수 있어서 CAPA를 확보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진다. 만약 의약품을 상대적으로 인건비와 생산비용이 저렴한 제3 국에 맡긴다고 해보자. 말할 것도 없이 저렴한 값으로 약을 생산할 수 있다. 원가 및 비용 절감은 모든 생산관리, 기획 직무에서 중요한 관리 지표기에 큰 장점이 된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약을 만들기 위해서 별도의 투자나 시설 확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당연히도 각각의 공장마다 특정 제품에 특색화돼있는 공장이 있다. 건강기능식품을 잘 만드는 공장, 혹은 수액제를 잘 만드는 공장처럼 말이다. 만약 우리 회사가 수액제를 만들기 위해선 대규모 투자가 이뤄진 후에야 가능하겠지만, 그런 공장에 위탁을 맡기게 되면 CAPA뿐만 아니라 그들의 노하우까지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결론적으로 위탁생산은 할 수 있음에도, 남에게 맡기는 일이다. 왜냐면 그것이 비용을 더 절감해주기도 하고, 그들이 더 잘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덜어낸 시간과 비용으로 "우리 제품, 우리 일"에 더욱 집중할 수 있으니까.


제약 CMO 담당자

나는 회사에서 위탁 의약품을 생산 기획하는 업무를 담당한다. 거창할 것 없다. 언제까지 완제품 납품이 필요한지 정하고, 원료 및 부자재를 사급 하며, 전체적인 생산을 스케줄링&관리한다. 제조가 완료됐는지, 완제품 포장 예정 시점은 언제인지, 식약처의 허가변경과 같은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지를 살핀다. 내 책임은 위탁 맡긴 완제품이 최종적으로 우리 공장에 입고돼서 출하되는 데까지 있다.


철거를 위탁했더라면

단지 철거 과정이 힘들기만 해서 "철거 돈 주고 할 걸"후회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철거 과정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요했다. 매달 월세가 꼬박꼬박 나가는 점에서 보면, 시간은 곧 돈이다.


직접 철거를 안 했다면 오픈일이 훨씬 더 당겨졌을 거다. 게다가 그 시간 동안 여러 번 운영 관련한 경험치도 쌓았을 수 있다. 마케팅, 홍보와 관련된 활동에 더 많은 체력과 자원을 넣었겠지. 인테리어 컨셉을 더 많이 고민하면서 다양한 옵션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철거 과정을 위탁, 레버리지 했다면 우리가 진짜 해야 되고 집중해야 하는 일에 더 힘을 썼을 거다. 그랬다면 초반에 우왕좌왕하면서 소요된 기회비용을 훨씬 더 아꼈을 거다.


셀프의 장점 

물론 우리가 셀프로 철거한 게 부정적인 면만 있는 건 당연코 아니다. 우리는 철거 이후에도, 천장, 미장, 도장, 가구도 전부 직접 진행했다. 유독 철거 일정이 회사에 바쁜 시즌과 겹쳐서 더뎠지, 그 이후에는 순탄하게 일정을 밟았다. 실제로 비용도 많이 아꼈다. 공간을 직접 만들었기에 애정도 크고 우리가 그렸던 대로 구현할 수 있었다. 0부터 100까지 직접 결정하면서 "결정 능력치"도 분명 레벨업 했다.   


위탁을 고려하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우리와 똑같은 직장인 창업 포지션이라면, 나는 위탁을 적극 권한다. 여기서의 위탁은 완제품 만드는 중간중간 업체를 쓰는 것을 포함하여, 권리금을 주고 전체를 인계받는 것까지 포함한다. 실제로 만약 우리가 2호점, 3호점을 오픈한다면 거기엔 매장을 통째로 살 계획도 옵션에 있다. 왜냐면 우리가 진짜 집중해야 하는 일은 파티룸 매물을 쓸고 닦고 해서 오픈하는 그 과정 자체보다, 앞단의 완제품 만드는 시간은 줄이고, 운영과 마케팅에 포커싱하여 "매출 만드는 일"에 총력이 필요하단 걸 배웠기 때문이다.


할 줄 안다고, 반드시 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혹시 철거할 일이 있다면 한 번쯤은 괜찮다. 첫 철거는 나름 낭만도 있다.


사실은 우리만 그 고통을 느낄 순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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